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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월남이... 왜 베트콩한테 먹혔나 ???

도제조 안형식 2007. 9. 26. 03:43


월남은 왜 망했나?




자료제공: 崔 雲 (ID:주말군딩 echelon@m018.com)
출처: 1975년 5월 7일 문화공보부 발행 " 월남은 왜 망했나?" 에서...



▣ 월남 약사 ▣


1900
1940
1945
1953
1954
1955
1963
1965
1967
1973
1975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불령 인도지나 연방에 편입
일본 인도지나 점령
호지명 월남 민주 공화국 선포, 프랑스 월남 재통치 주장
베트민 공세로 월남 남북으로 양단됨
6월 고 딘 디엠 월남 정부 수반 취임,7월 제네브 협정 조인 (17도선 분단)
고 딘 디엠 신생 공화국 대통령 취임
쿠테타 성공, 두옹 반 민 정권 인수
미 해병대 다낭 상륙, 한국군 참전(맹호,청룡부대)
티우 대통령에 피선
파리 휴전 협정 조인,한국군 개선 철 수
4월 21일 티우 사임,후옹 대통령 취임,
4월 28일두옹 반 민 대통령 취임,
4월 30일두웅 반 민 항복



▣ 보름사이에 패망한 두나라 ▣


인도지나 반도에서 보름만에 두 나라가 패망했다.

1975년 4월 17일에는 크메르가 패망했고

그리고 1975년 4월 30일에는 자유월남이 패망했다.

실로 어이 없는 일이다.


크메르가 패망한지 나흘이 되는 1975년 4월 21일,

월남 대통령 "티우"는 눈물의 사임을 발표했다.

"티우"의 뒤를 이은 "후옹"대통령은 불과 5일만에 그 자리를 또 "민"장군에게 넘겨주었고

"민"대통령은 불과 3일만인 4월 30일,베트콩과 월맹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근 400만명이 죽거나 다친 30년간의 월남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패망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었다.

미국은 월남전쟁에 1,500억 달러의 돈을 들였고,

미군 장병 5만명 이상을 월남전에서 잃었다.

우리국군도 1965년 이래 8년간 월남 땅에서 피흘려 싸웠다.


공산화된 크메르와 월남은 이 모든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빼앗아가 버렸다.

모택동은 "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거니와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주의의 본질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베트콩의 공격이 격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티우 정권이 미국의 원조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 과장보도를 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했었지만, 그런 추측과 의심이 얼마나 근거 없는 낭설이었는가 하는것이 증명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때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바 있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살랑 장군은

"월남의 앞날에는 대량학살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300~400만명이 총살당할 것이다"

라고 했다. 크메르에서는 이미 정부군의 위관급 이상의 장교와 공무원, 그들이 가족 및

민주시민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있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다.


월남전에는 두 가지의 전쟁이 있었다.

하나는 "피 흘리는 전쟁"이요, 다른 하나는 " 피 안흘리는 정치 전쟁" 이다.

결국 월남은 "피 흘리는 무력전쟁" 과 "피 안 흘리는 정치전쟁"이라고 하는

두개의 전쟁에서 모두 지고 만것이다.

왜 크메르와 월남은 이같이 허무하게 지고 말았을까?





▣ 월남 패망의 원인(1) --- 거듭되는 혼란과 분열 ▣


크메르와 월남이 진 것은 군사적인 면에서만 진 것이 아니다.

"피 흘리는 전쟁"에서만 진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 피 안흘리는 전쟁"에서 더 먼저 진 것이다.


베트콩은 이 " 피 안흘리는 전쟁", 즉 정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이른바

통일 전선의 전략전술을 교묘히 사용하여 내부로 부터의 와해를 끈질기게 공작해 왔다.

그런데 월남은 바로 이 같은 베트콩의 전략 전술에 휘말리는 줄도 모르고

"민주" 다 "인권"이다 떠들고 날뛰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분열과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그로 말미암아 월남 정부는 강력한 반공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조차 없었다.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게 된 것도 이 같은 내부 혼란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월남이 진것은 군사적 패배보다도 이 정치전쟁에서 진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고 하겠다.



▣ 월남 패망의 원인(2) --- 베트콩의 속임수 ▣


전국 각지에서 준동하던 베트콩들은 1960 년 12월 20일

"남부 월남 해방 민족 전선"을 수립했다.

이 "남부 월남 해방 민족 전선"이라는것은 1961년 하노이 방송이 확인 했듯이

"공산 월맹의 지원 아래 북위 17도선 이남을 관장"하려는 월남 공산당, 즉 베트콩이다.


베트콩은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속이고 " 민족,민주연합정부"를 세우자느니,

평화와 중립 정책을 쓰자느니 하는 위장된 구호를 내세웠다.

이들은 1969년 6월 9일 이른바 "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세우고

이들이 " 월남 인민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표"라고 선전했다.

이들 베트콩이 주장한 것은 한결같이 월남의 합법적인 민주 정부를 때려엎자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정부를 전복하고 혼란을 일삼는 것으로 그들의 투쟁 전법을 삼았다.

1949년 부터 1955년까지는 당시의 베트남 국왕 바오다이를 타도하자는 것이

그들의 투쟁 목표이었다. 그리고 고 딘 디엠이 1955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번에는 "고 딘 디엠 타도"를 들고 나왔다.

1967 년 9월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베트콩은 다시 티우의 사퇴를 요구 하고 나섰다.


1975년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사임한 것도

베트콩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일 동안 대통령은 두 번씩이나 바꾸었지만 그 종말은

"무조건 항복" 이라고 하는 참담한 최후가 있었을 뿐이다.



▣ 월남 패망의 원인(3) --- 끊임 없는 정치 싸움 ▣


공산주의자들이 월남에서 게일라 활동을 본격화 한 것은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취임,

월남에 강력한 반공 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 시작하던

1957년경부터 였다. 즉 월맹이 월남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게릴라 활동을 격화시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산세력의 공격 앞에서,월남의 내부의 단결은 금이 가고 있었다.

베트콩이 고 딘 디엠 정권을 넘어뜨리고 소위 " 민족.민주 연합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때, 이에 동조하는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1960년 11월 11일) 비록 하룻만에 진압되기는 했으나 3백명의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은

베트콩에게는 용기를,월남 국민에게는 실망과 불신을 주었다.


이로부터 3년 후엔 1963년에는 또다시 쿠테타가 일어나 고 딘 디엠 대통령은 살해되고

정국의 혼란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그뒤 3년후인 1966년에는 "후에"에서 정부군이

또 반란을 일으키고 사이공에서는 불교도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였다.

이때의 데모는 이미 데모가 아니라 폭동화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베트콩은 더욱 미주 정부의 타도와 "연합 정권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며,혼란을 부채질 하고 있었다.

한편 베트콩은 1968년 "구정공세"라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며

이러한 공세를 당하고도 월남의 일부 지식인과 전직 관료들은 사이공과 후에에서

이른바 "월남 민족.민주.평화세력 연합"이라는 것을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을 적극화 하였다.


이로써 베트콩은 지금까지 농촌에만 발판이 있었는데

이제는 도시까지 그 발판이 확대되어 이를 기반으로 1969년에는

소위 " 남부 월남 임시 혁명정부"라는 것까지 조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월남의 평화 협상에서 베트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불법단체인 베트콩과 불법집단인 이른바 "남부 월남 임시 혁명 정부"가

대화와 협상의 자리에 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1973년 1월 23일 조인된 "베트남 전쟁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에서는

월남에 2개의 정부와 3개의 세력이 있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사이공의 월남 공화국과 베트콩의 임시혁명 정부라고 하는 2개의 정부와 군대,

그리고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는소위 제 3세력을 포함하여 정치 세력은

3개의 큰 파벌로 나누어지게 되는 해괴하고도 미묘한 정치 판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이 결국은 오늘의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하나의 나라 안에 2개의 정부와 3개의 군대,그리고 3개의 세력이 있게 한

소위 제 3세력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스스로 베트콩도 지지하지 않고 월남 정부도 지지하지 않는

엄정 중립주의자라고 말한다. 전에 국가 원수까지 지낸 바 있는 두옹 반 민

(그가 4월 30일 베트콩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전 부통령이 었던 구엔 카오 키,

안쾅 불교파의 부 반 마우 상원 의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요구한것은


1. 베트콩과의 협상,

2. 티우의 사퇴,

3.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 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베트콩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제 3세력은 월남 국민의 양심과 정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소위 "민주"와 "인권"을 부르짖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를 통해서

월남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을 만한 국민적 지지도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욕에만 눈이 어두워 데모와 일부 언론을 선동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것을 그들의 유일한 정치 투쟁으로 삼고 있었다.

월남이 공산화된 지금 이들의 이른바 제 3세력과 공과는 스스로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 월남 패망의 원인(4) --- 데모로 지새운 나날 ▣


적과 총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상황 아래서도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데모가 끊일날이 없었다.

학생은 학생대로, 언론인은 언론인대로, 그리고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갖가지 데모가 매일같이 계속됐다.


학생들은 적과 싸우기 보다는 반정부 데모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67년 9월 총선에서 '티우'와 '키'가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티우의 당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데모를 했다.

1972년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월남에서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국론의 분열은 더해가고 반 정부 운동은 더욱 가열돼 갔다.


1973년 파리 휴전 협정 이후 베트콩의 공세가 심해지자

월남 정부는 학생들을 징집할 수 있는 병역법의 제정안을 만들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 군대에 안가겠다"고 데모를 벌였다.

월남 전쟁에서 월남의 청년들이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싸운단 말인가?

자기의 의무는 다 하지 않고 정부 비판만을 앞세우는 월남의 사태가

오늘과 같은 공산화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월남의 언론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승리하여 영광스러운 평화를 누리겠다는 결의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베트콩의 한 대표인 "고 아 단" 여사는

"파리 협정에 따르면 공산주의를 선전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데,

티우 정부가 부당하게 이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월남 언론인들은 이 비난이 옳다고 호옹하고 나섰다.


마침내 월남 정부는 이 같은 언론의 이적 행위를 다스리기 위해 법률안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월남 언론인들은 정부의 이 같은 정책이 언론 탄압이라고 하면서

데모를 벌였다. 참으로 데모 만능의 시대와도 같았다.

일부 종교인들도 데모를 했다. 1974년 6월 18일 천주교 신부들이 정부를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9월 8일에는 "후에"시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안쾅 불교파에서도 정부가 베트콩과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데모를 벌였다.

이 연이은 데모의 와중에서 월남 정부는 베트콩과 싸우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월남의 공산화는 바로 이 데모가 불려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월남 패망의 원인(5) --- 분열된 국론 ▣


월남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싸우면서도 반공 사상은 희미했다.

오히려 공산주의를 지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모두의 생각이 달랐다.종교인은 종교인대로,학생은 학생대로,

소위 민주세력은 그들대로, 모두의 생각이 달랐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의 의견이 다르고 천 사람이면 천사람의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심지어는 정부의 관리들까지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했다. 그러므로 국민의 일치된 총의라는 것이 없었다.

베트콩과 싸우자는사람, 그들과 협상을 하자는 사람,

베트콩은 나쁘지만 공산주의는 좋다는 사람,

공산주의는 나쁘지만 베트콩은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사람 등등.


이와 같은 국론의 분열과 내부의 혼란을 안고

적어도 공산주의자와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월남과 크메르는 왜 졌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국민이 단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 월남 패망의 원인(6) --- 군사적 패배 ▣


월남이 진 것은 물론 군대와 군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왜 월남은 군대의 싸움에서 졌는가?

결코 무기가 모자라고 군대가 적어서 진 것은 아니다.


공산군은 베트콩과 월맹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었다.

이에 비해 월남군은 115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 공군은 1,800대나 되는 공군기를 가진 세계 제 4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도 보급도 모두 공산군보다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월남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후퇴만 했다.

후퇴마저 제대로 못 해 수백대의 전투기를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었다.

월남군이 공산군에게 넘겨준 무기는 무려 50억달러어치나 된다.


다낭에서는 공산군이 공격해 온다는 풍문만 듣고 군대가 배를 타고 후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도 공산군이 왔다는 소식이 없어

다시 상륙해 시내에 들어가보니 아직 공산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왜 월남 군대는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목숨을 바쳐 싸워 지켜야 할 조국에 대하여

애착을 잃은 탓이라 하겠다. 정치 한다는 사람들이

후방에서 매일 정치싸움과 데모로 날을 지새우고

국가를 대표하고 통수권을 가지는 대통령에 대하여

있는일, 없는일 가릴 것 없이 공격만 되풀이 하여

국위는 땅에 떨어지고 4분 5열로 국론은 분열되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

남의 일처럼 옆에서 구경만 하는 사람, 돈만 버는 사람등,

이런 속에서 군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피를 흘린단 말인가?

군인에게서 충성심이 없어지고 사기가 떨어 졌을 때

그 군대는 이미 오합지졸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파리 휴정 협정이후 사이공이 함락되기까지 단 한명의 군인도 공산군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육탄으로 막았다는 말이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래알처럼 분열된 국론이 바로 월남의 군사적 패배까지 몰고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빼고 만 것도 이같은 월남의 끊임없는 혼란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원조를 해 주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 월남 패망의 교훈 : 평화의 보장은 힘 ▣


크메르와 월남이 왜 졌는가 하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크메르와 월남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인도지나 반도 사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첫째 "공산주의자들과의 평화 협정 혹은 긴장완화는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힘의 균형이 깨져서 우리의 힘이 공산측보다 약하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는

협정이니, 약속이니, 조약이니 하는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루 아침에 무력으로 침략해 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전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이요, 대화요, 협상이요 할 때는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이 쉽게 나올 때는 힘으로 안 되니까,

시간을 벌면서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월남 사태에서도 1973년 1월, 파리 휴전 협정을 체결한 후 2년동안,

그들은 월남 침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왔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런데 월남은 공산군의 이 같은 음모에 대비할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으며

계속되는 데모와 정치싸움으로 허구한 날을 소일했다.



▣ 월남 패망의 교훈 : 힘없는 자에게는 도움도 없다 ▣


월남의 패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두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자기 나라의 국방은 자기의 힘으로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안보를 남의 나라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방의 지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기를 지키는 능력이 없으면 남의 도움도 못 받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월남의 경우를 보자.

15년간 미국이 도와 주었지만 그 동안에 자주 국방의 태새를 갖추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월남사태가 일단 공산화의 방향으로 기울게 되자

아무도 그들 도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우려해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자기 나라를 피와 목숨을 바쳐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와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크메르와 월남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중공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공산세력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아래서,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

자주 국방의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확고히 다져야 한다.



▣ 월남 패망의 교훈 : 힘은 국민 총화에서 ▣


인도지나 사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세번째 교훈은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에 빠졌을 때에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사시에 그 힘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의 월남 사태도 그렇다.

정부군이 병력이나 장비면에서나 공산군 보다 훨씬 우세했다.

그런데도 결국 지고 말았다.


왜 그런가?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국민의 총화 단결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불안과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등 집안 싸움만 하다가 패배를 맛보고 만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임진 왜란때는 왜군이 쳐들어 오느냐, 안 쳐들어 오느냐 하는것을 놓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7년 전쟁의 전화를 치루었다.

6.25 때도 " 설마 설마"하며 한눈을 팔다가, 북괴군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월남 사태를 거울 삼아

우리의 국가 안보를 위한 국민 총화 체제를 더욱 굳게 다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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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월남이 패망한 직후인 1975년 5월 7일자로
문화공보부에서 발행한 "월남은 왜 망했나?" 에서 퍼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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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글쓴이 : 나라사랑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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