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이룬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 | |||||||||||||||||||||||||||||||||
고속도로가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업적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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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형식 논설위원, reverend1@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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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강의 기적을 빛낸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 (고속도로가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업적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 이 논문은 한국도로공사 40주년기념 학술논문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논문임. 목차 서론 1.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라는 의미 2.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초석이라는 의미 3. 본 논문의 연구방향 1장. 고속도로의 발전사 1절. 경부고속도로 프로젝트의 태동 1. 꿈과 상상으로 만든 설계도 2. 꿈과 상상력은 미래의 동력 3. 아우토반을 벤치마킹한 경부고속도로 4. 독일 방문으로 얻어 낸 소득 2절. 경인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의 시험판 3절.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신화 2장. 한국 경제의 동맥인 고속도로 1절. 천지개벽 1. 신화창조 2. 한국적 공사방식 3. 시간과의 사투 2절. 국가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초과달성에 기여한 공로 1. 달라진 경제지도 2. 국민적 자긍심 고취 3. 건설단가의 신기원 3장.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 1절. 문화의 발전 1.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2.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2절. 교육의 발전 1. 서울대학과 수도권 대학의 경계를 허문 경부고속도로 2. 한국 교육의 발전은 세계적 3절. 명절문화 탄생 1. 명절문화 탄생배경 2. 명절문화는 효 문화로 정착 4절. 여가 문화의 풍요로움 4장.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가는 고속도로 1절 한강의 기적의 견인차인 고속도로와 포항제철 2절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한국의 고속도로 결론 참고문헌 서론 영웅 율리어스 시이저는 로마를 통일하고 난 뒤에 “세상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총 8만㎞의 도로를 건설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육로 개척에 있어서도 완벽한 승리자였다. 로마가 세계를 재패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육로개척의 완성에 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후에 한국에도 동일한 의미의 어록이 탄생했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로 통한다.”는 어록의 탄생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 함의되어 있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선진국 문화권으로의 진입이자 대한민국의 총체적 발전을 뜻한다. 짚어 보자. 1.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라는 의미 먼저는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다. 1970년 7월 7일, 칠석날을 상징하는 이 날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까마귀 다리에 비견되는 경부고속도로가 탄생했다. 서울의 견우와 부산의 직녀는 6시간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에서 재회했다. 12시간 동안이나 지린내가 풍기는 열차 여행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여행자에게는 자유의 선언이며 동시에 후진국형 열차문화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천지개벽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식에 참석한 귀빈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기원했다.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는 여기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새롭게 써지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총 공사를 지휘했던 윤영호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축 테이프를 자르면서 벅찬 감동으로 소리쳐 울었다고 고백했다. 윤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역사적인 고속도로 그 현장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책의 제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언급한 것은 윤 장군의 인생에 있어서 경부고속도로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상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대한민국의 경사일 뿐 아니라 세계의 건축, 토목계의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에서 한국의 경부고속도로는 ‘최단 시간에 최장의 고속도로 완공’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는 한국의 건축과 토목분야의 기술력이 세계 수준으로 향상되었음을 입증한다. 세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기원 전(B.C)의 역사와 기원 후(A.D)의 역사로 나뉘고, 한국의 역사는 고속도로 이전의 역사(근대사)와 이후의 역사(현대사)로 나뉜다. 고속도로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구분 짓는 경계점이며 한국의 현대사는 실상 고속도로의 완공시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경부고속도로가 가지고 있는 위상은 사고의 범위를 초월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인해 경상북도의 대표적 오지마을인 추풍령, 황간, 약목, 신암 등의 오지마을이 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특산품 상권 지역으로 부상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산골 오지마을에 천지가 개벽하는 정도의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산간 오지 마을은 오히려 인기 높은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지역 특산품을 생산하는 생산도시로 거듭나는 동시에 일약 문화도시로 부상 했다. 만약 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2.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초석이라는 의미 돌이켜 보자.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한반도를 유린한 육이오 동란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졌다. 전쟁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한반도는 이를 복구하는 데에 만 5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한국이 개발도상국가로 진입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 전란 후 가장 절박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특히 맨몸으로 월남한 피난민들과 함께 전란을 겪은 폐허 더미에서 한국민 자력으로는 경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향해 눈물로 지원을 호소했다. 세계 각국은 6.25 동란의 참상에 대한 보도와 이승만 대통령의 눈물어린 호소들 타전했다. 세계 각국은 구호품, 의약품, 식료품을 보내왔다. 한국이 세계로부터 구호품으로 연명하며 국토재건에 온 힘을 다한 결과 13년이 지난 1966년의 국민총생산은 125달러(1962년 83달러)로 성장했으나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 되고 난 이후부터 한국은 급속한 발전으로 고도의 성장을 이뤄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이듬 해인 1971년 한 해 동안에 무려 10억 6760만 달러가 수출되었다.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치는 7억 달러였다. 이를 무려 50% 이상을 초과 달성한 셈이다. 발전의 속도와 성장의 폭이 워낙 커서 세계는 기적으로 표현했다.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과 필적할 만한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했다. 구체적인 통계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경상가격 기준으로 살펴보면, 1966년 말의 37억 달러에서 1991년 말의 292억 달러로 25년 간 7배 가까이 늘어났다. 같은 기간 국민 1인당 총생산은 125달러에서 6,757달러로 53배나 격증하였다. 수출규모는 1966년 말의 2억 5천만 달러에서 1991년 말의 718억 7천만 달러로 286배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통해 단 하루 만에 고객이 원하는 장소로 배달되었다. 인천항만을 통해 수입된 원목은 수도권의 가구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제작되어 고속도로를 통해 부산 항만에 대기하고 있는 콘테이너에 실려 수출되었다. 서울외곽에 있던 가발공장에서 완성된 가발은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항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기에 수출의 규모가 286배나 폭증할 수 있었다. 3. 본 논문의 연구방향 본 논문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한국이 선진국을 넘볼 수 있는 정도의 문화국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고 기술했다. 한국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발전에 있어서 고속도로는 동맥이자 골격을 이루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척추에 비견된다. 모든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 고속도로가 기여한 공로는 가히 절대적이다. 한강의 기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고속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한국의 현대사 발전에 가장 큰 틀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 정직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겨우 역사학자들에 의해 근, 현대사에 몇 줄 정도의 글로 평가된 것이 전부이다.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로서 경부고속도로가 박정희의 잔재물로 처리된 점과 둘째로는 지정학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고속도로는 특성상 천재지변에 노출되어 있고 대형사고의 위험이 상존한다. 특히 바캉스 계절과 명절 시에 주차장화 되는 한국적 고속도로의 특성은 고속도로의 수많은 공적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인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견인한 고속도로의 현저한 공적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고속철도의 위상은 극대화된 반면, 한반도의 동맥인 고속도로의 위상은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심히 불만스럽다. 고속도로에 대한 평가는 경제적, 역사적,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되어져야 하고 정직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재적 발전은 고속도로가 근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고는 정치적, 지정학적 원인에 의해 저평가 되어 있는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하고 고속도로의 이면에 함의되어 있는 문화적 의의를 석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전개될 논지의 방향은 만하임 주의적 석의 방식을 채택했다. 만하임(K.Mannheim, 1893.3.27~1947.1.9)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기와 다른 정치적, 학문적, 사상적 성향에 대한 변증으로 보며 학문적(지식사회학)인 입장으로 접근하며 해석했다. 통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채용하고 있는 해석방식이며 용어상으로는 비평적 양식으로 구분한다. 반면, 마르크스(K.Max, 1818.5.5~1883.3.14)는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존재성을 독립적 존재로 인식하면서 현실의 삶에 대한 불만 (그것이 계급적 사회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내재된 불만)을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의 논리로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상으로는 비판적 방식이다. 본 논문의 한계는 순수한 학문적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 혹은 평가로 비쳐질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속도로 발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의 개연성은 분리될 수 없도록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박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과 연계되면서 전국의 도로망은 고속도로와 연계 구도로 건설되었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기도 한 고속도로에 대한 평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빼고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 내용에 객관적인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덧붙여 본 연구자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최대 난공사로 불렸던 “당재 터널”공사의 현장인 옥천이 고향이다. 동이휴게소와 직선거리로 1km도 되지 않는 평산리에 적을 두고 있다. 사촌들은 마의 구간으로 불렸던 당재 터널 공사에서 건설역군으로 일을 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고 사촌들은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인건비를 저축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사촌들은 밭을 한 뙤기씩 장만하여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사촌인 하영이와 영철이는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를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1장. 고속도로의 발전사 박정희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2년~1966년)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곧바로 인천항과 영등포(신월동)를 연결하는 총 연장 23.9km에 달하는 경인 고속도로 공사에 착공했다. 재원은 일본정상회담으로 인한 보상금 6억 달러와 월남파병으로 파월장병들이 미국으로부터 지급받은 달러, 독일방문 기간 중에 확보된 차관으로 충당했다. 독일 방문 기간 중 에르하르트 독일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꼭 잡고 통일이 되는 날까지 경제 발전에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한국과 박 대통령에 대해 호의를 품은 에르하르트는 서독의 5대 재벌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이들로 하여금 대한 차관단을 결성토록 도와주었다. 이로 인해 재정 차관 1,350만 달러, 상업 차관 2,625만 달러를 확보했다. 당시 외화 보유고가 1억 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4천만 달러의 독일 차관은 실로 큰 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독일 차관은 그 후 우리나라에 외자 도입의 길을 열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한 경인고속도로는 우여곡절 끝에 2년 만에 완공되었다. 1969년 4월 12일 고속버스 20대가 경인 고속도로 위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1년 동안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얻어진 노하우와 기술력과 안전도에 있어 자신감을 얻은 40대의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2월 1일, 총연장 417.4㎞의 왕복 4차선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착공했다. 착공 후, 2년 5개월인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10년 만에 고속도로 1일 통행료 1억 원을 돌파하는 대 기록을 세웠다. 1절. 경부고속도로 프로젝트의 태동 1. 꿈과 상상으로 만든 설계도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꿈으로 디자인되고 상상력에 의해 설계되었다. 겨우 125달러에 달하는 국민소득의 규모로서 10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한 고속도로를 거론한다는 것은 비난의 대상을 넘어 죄악시 되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임기 중에 완공하겠다고 공포했다. 당장에 반대여론이 불일 듯 일어났다. 정치적 반대 여론의 중심요제는 “국가 재정파탄을 불러들일 공약”, “부자를 위한 유람도로”였으며 연일 정치공세가 이어졌다. 이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가에 대해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은 회고에서 “2년 반 동안의 연구를 끝낸 박정희는 67년 5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만 있고, 진행상황은 전혀 없이 5개월여가 흐른 10월 하순 어느 날 朴대통령은 ”늦어도 내년 초에는 착공한다.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회고했다. 2. 꿈과 상상력은 미래의 동력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은 “꿈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행복과 경제를 가져다 준다”고 역설했다. 덴마크의 미래학자이자 드림컴퍼니의 최고상상력책임자(CIO)롤프 옌센은 “미래는 꿈과 감성이 있는 스토밍의 시대”로 정의했다. 스토밍이란 꿈과 감성이 실려 있는 스토리의 연속적인 전개를 뜻한다. 미래는 꿈과 감성을 파는 시대인 스토리 시대이며 스토리가 있어야만 경제가 창출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스토밍”이라 했다. 옌센은 지난 2일 제주 전국경제인연합회 하계 포럼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정보화시대 이후의 미래사회에는 품질보다는 꿈과 감성을 파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국가와 기업ㆍ개인 모두 경쟁력을 가지려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우러진 ‘이야기(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옌센은 나이키가 다른 상품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은 품질 외에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보화시대 이후는 꿈의 사회가 될 것이며, 꿈의 사회에서는 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GDP) 지수를 대체하게 될 것으로 말했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주거 문화와 음식 등 모든 면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토리로 경제를 창출해 내는 방법으로 ‘브레인 스토밍’만으로는 고객을 움직일 수 없으며 소비자들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쓰는 하트 스토밍이 비결이라고 역설했다. 한국의 고속도로는 꿈으로 디자인 되었고 상상력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린 그림대로 완성되어 한국의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의 여력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고속도로는 완공 시까지 숱한 화제를 낳았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기획하고 공사에 참여한 주인공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꿈과 감성이 어우러져 있는 스토리들이며 상상력으로 디자인 되었다는 골자를 담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대한민국 전체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프로젝트였다. 만약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현재로 갈 수밖에 없다는 답답함도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꿈의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무려 2년 반 동안 공부하며 고민한 끝에 경부고속도로를 디자인했다. 3. 독일의 아우토반을 벤치마킹한 경부고속도로 “청와대 비서실”의 저자 김진은,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지칭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내노라하는 건설관계자와 경제학자등이 대역사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朴正熙의 작품이었다. 구상은 64년 말 서독방문길에서 그려졌는데, 朴正熙는 이때 중요한 체험을 했다. 서독의 고속도로(아우토반)와 라인강 운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라고 서술했다. "朴대통령이 현대식 고속도로를 처음 본 것은 54년 미국의 포병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였어요. 그러나 당시는 한 여행객의 입장이었겠지요. 64년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탁월한 기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합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가 朴대통령에게 '나는 아우토반에 진입하거나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 나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 도로에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한 말을 10여 년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 장면에 대해 백영훈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朴正熙는 국빈용 벤츠승용차에 몸을 싣고 서독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시속 1백60km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의 사물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응시하던 朴正熙는 동승한 서독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두서는 없었지만 계획단계에서 건설 관리에 이르기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朴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20km구간을 왕복하며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 시설 등은 물론이고 앞뒤 선형까지, 아우토반의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했다. 줄곧 곁에 서있었던 나는 朴대통령이 큰 결심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백영훈의 예상대로 朴正熙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호되게 매달렸다. 각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관한 기록을 밤늦도록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연구보고서를 제출받기도 했다. 국토를 개조해서라도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패기만만한 40대 대통령의 야망이었다. 현대건설 사장 鄭周永은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각하께서 밤늦게 불러 들어가 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 가지 안을 제시해 의견을 묻곤 했다." 4. 독일 방문으로 얻어 낸 소득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파독 간호사와 파독 광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해야 했다. 지하 1000m의 지하갱도에서 악전고투를 하는 광부들의 처참함을 보아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의 시골병원에서 시체를 닦고 환자들의 피고름으로 범벅되어 있는 시트와 옷가지를 빨고 피고름을 받아 내던 어린 간호사들의 통곡과 외침은 “우리도 국력을 길러 속히 선진국이 되게 해 달라”는 절규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한국을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시도 그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김충배 전 육사교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우리처럼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 명이나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回生)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戰後)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2절. 경인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의 시험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경부고속도로에 적용할 실험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반공사와 공기 등에 대한 기술력의 문제와 키로미터 당 얼마의 건설비가 소요되는가의 경비 문제를 산출하기 위해서였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 등이 경부고속도로건설의 기초자료로 사용될 것이었다.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하여 1969년 4월 12일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인천 인터체인지)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신월 인터체인지)에 이르는 고속도로로 길이 23.9㎞, 너비 20.4m, 왕복6∼8차선이다. 길이 23.9㎞, 너비 20.4m, 왕복6∼8차선이다. 왕복6차선은 10.39㎞, 왕복8차선은 13.5㎞이다. 서울특별시 0.5㎞, 인천광역시 17.59㎞, 경기도 5.8㎞이다.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하여 1968년 12월 21일에 가좌 인터체인지까지 23.4km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되었고, 1969년 7월 21일 가좌에서 인천 인터체인지까지 6km 구간이 개통되었다. 1969년 4월 12일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로 지정되었고, 2002년 5월 1일 변경된 새로운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고속국도 제2호에서 제120호로 바뀌었다. 이렇게 축적된 고속도로의 건설능력은 곧장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연결되었다. 12월15일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 구성되어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구체화 되었다. 1차 공사구간인 서울~수원은 2만5천분의 1 지도에, 이와는 별도로 서울~부산까지는 5만분의 1과 2만5천분의 1 지도를 여러 장 연결해 등고선별로 색칠을 했다. 5일 만에 등고선 채색작업을 끝낸 이들은 노선작업에 나섰다. 단 하나의 기준, 최소 공사비를 위해 고지는 가급적 피해 이리저리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그리고는 수원까지 발로 답사를 해야 했다. 헬기를 이용한 공중답사는 물론 지프를 타고 현장 확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朴正熙가 이들에게 현장답사를 지시한 것이었다. 3절.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신화 마침내 68년 2월1일 4백28km 대장정의 첫 삽질이 시작됐다. 공사는 글자 그대로 불도저식이었다.1공구 공사를 하며, 2공구 3공구 설계를 해나가는 식이었다. "빨리, 빨리"는 예정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당기기 위한 구호였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준공되었다. 개통된 뒤에는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이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되었다. 기존의 철도·국도와의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이 마침내 연결되었다. 이후 경수지역의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1989년 10월부터 1992년 7월까지 양재∼수원 간 18.5㎞를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였고, 1991년 5월부터 1993년 7월까지 대전세계박람회를 지원하기 위해 수원∼천안 간 51.5㎞ 구간을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고, 천안∼남이 간 40.3㎞를 왕복6차선으로, 남이∼청원 간 8.3㎞를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였다. 또한 1992년 5월부터 1995년까지 반포∼서초 간 2.2㎞ 구간이 왕복6차선으로 확장되었고, 서초∼양재 간 3㎞ 구간도 왕복8차선으로 확장공사를 완료하였다. 마침내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의 내용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서울에서 부산 간 4차선 총 428㎞, 총 공사비 430억 원, 공사기간 2년 5개월, 동원 인력 9백 만 명, 희생자 77명. 국가적 역량이 총 집결된 경부고속도로는 힘차게 뛰어오른 경제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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