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DE성경연구

TDE 성경연구(특강용)

도제조 안형식 2010. 1. 3. 23:28

TDE 성경연구(특강용)


                            안형식 목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회 청지기)



제1장 Thinking  (바른 사상)


성경연구(공부)를 하는 목적은 배우는 분의 입장에서는 잘 되기 위함이며 교수하는 분의 입장에서는 잘 되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잘 되는 방법은 복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말씀을 받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성경에 문자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따라서 복을 받고 잘 되기 위해서라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깊이 통달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 공부를 합니다. 왜 일까요? 이는 지적인 추구, 진리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1. 내 신학의 발전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달고 고소합니다. 내가 오늘 내 하나님으로 절대신앙하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인공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셨고 어떻게 사랑해 주셨고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셨는가에 대하여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사로잡히면, 어느덧 성경을 읽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착각이 되어집니다. 그것은 확신입니다. 다윗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는 확신은, 그 하나님을 내 현실의 문제로 모셔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처하여 있는 이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보여 드리게 되고 건져달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 절망적인 환경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다윗처럼 구원해 주셨다는 감격에 떨게 됩니다. 세월이 가면서 이러한 일들이 더욱 많이 경험되면서 하나님은 내게 절대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더욱 더 깊은 맛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내 절대자가 되셨다라는 사실은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또 하나님과 나는 현실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것이 내 미래를 어떻게 결정하게 하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논리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논리가 형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내 신학입니다.


내 신학이 생겼다면, 내 신학을 변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격이 들어오게 되면  방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신학과 다른 설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내 신학과 같은 신학을 가진 성도들과는 교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방어체제를 구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와 같은 신앙적 체험을 경험한 분들과 함께 모이게 되고 신앙체험에 대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하게 되며 자신들과 다른 신앙체험이나 혹은 다른 주장들에 대하여 비판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내 신학과 남의 신학을 비판할 때 기준이 되는 객관적인 근거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것은 혹시 내 신학이 잘 못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신학이 잘 못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며 구체적인 판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의구심이 바로 학문의 시작입니다. 이 의구심은 대단해서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담임목사님과 부목사님 심지어 전도사님의 설교까지 모두 비교 되어지고 비판과 의혹의 대상이 됩니다. 간혹 한 구절에서 여러 개의 해석이 나오는 포괄적인 개념의 성경구절에 대하여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의 해석이 다르게 나온다면 큰일이 납니다. 예면 예요 아니면 아니요로 풀어져야지 한 개의 성경구절에서 몇 개의 해석이 나온다면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왜 해석이 몇 개씩 나오느냐 이겁니다.


이럴 경우 쉽게 풀어주는 담임목사님의 설교 보다는 학문적인 설교를 하는 교육전도사님에게 점수를 많이 줍니다. 담임 목사님 앞에서 일부러 오버액션까지 취하면서 한껏 추켜 세웁니다. 학문적으로 설교를 했다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교인이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의구심이 풀리지 못한 내적인 불만이 응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 이것 때문에 교회의 모든 일에 사사건건 충돌하고 발목을 잡는 위험한 문제 교인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제가 지금까지 인터넷 선교를 통해 신앙상담을 해 본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학문적으로 의구심을 풀어 주지 못하면 내적인 불만인 응어리가 생깁니다. 이는 설교나 강해식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요. 문제교인이 한결 같이 똑똑한 교인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시면 알 일입니다. 문제교인으로 발전된 원인이 학문적인 자기신학의 논리체계에 대한 불만으로 생긴 것이라는 것,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4단계니 10단계니 등의 단답형적인 풀이식의 성경공부로는 양이 차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는 주석적인 성경공부로도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사상의 논리체계에서 발생한 문제임으로 사상적인 논리체계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2. 내 신학의 검증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적인 체험이 생긴 내 신학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믿음에서 발생한 내 신학의 논리를 확고히 검증해 줄 수 있는 권위자의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그 권위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저명한 신학자이면 좋겠습니다. 신령한 은사자라도 좋습니다. 자신의 신학을 검증해 줄 수 있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자신이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권위자이거나 은사자라면 검증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박철수 목사의 영성훈련원이 번창할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이 검증과 인정에 있었습니다. 10단계로 신앙의 상태를 검증해 주고 전화 상담을 통해 인정해 주는 시스템을 통해 3만 명으로 추정되는 교인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은 방서를 쓸 수 있는 사도적인 권위까지 가지고 있는 신령한 목사라고 소개해 왔습니다.


베뢰아 아카데미 역시 신앙에 대한 검증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자의 단계는 중생을 체험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다음 단계는 귀신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능력자. 다음 단계는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자. 그 다음 단계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능력자. 그 다음 단계는 귀신대장을 내어 쫓을 수 있는 능력자. 그 다음 단계는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이며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초절한 권위자로서 김기동 목사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라는 이름은 이들에게 있어서 요술방망이이며 도깨비 방망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는 베뢰아의 근본이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합일주의"를 벤치마킹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는 신합일주의를 토대로 귀신론을 중요한 교리로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귀신론은 검증을 위한 도구로 쓰여지며 베뢰아의 실체는 예수와 귀신, 이 두 가지 핵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마 선교회의 이명범은 베뢰아의 귀신론을 가져다가 고급 베뢰아로 발전시켰지요. 중심 멤버들이 다 강남교인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이단들은 눈으로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검증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각 단계의 시스템을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공부해야 하고 남몰래 시험해 보는 일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다단계 성경공부, 피라미드 성경공부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하여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성경을 쪼개는 성경주해식 성경공부에 있는 힘을 다 쏟았습니다. 신앙에 대한 검증은 직분으로 대신했습니다. 방언 혹은 병고침의 능력, 축사(귀신 내어 쫓는 행위) 행위는 이단시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검증 시스템도 없으니 열심을 내라고 해도 도무지 열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어느 단계까지 도달했는지 알아야 다음 단계로 갈 터인데 인정해 주지도 않고 검증도 해 주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검증 시스템이 있는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복음 교회만 해도 방언을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검증 시스템이 있습니다. 계급적인 철저한 검증 시스템으로 인해 각 직분 간의 우열은 철저히 구분됩니다. 순복음 교회의 교역자라면 반쯤은 하나님과 통하는 분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니 그런 교역자에게서 믿음의 단계를 인정받으면 잔치를 열 정도의 경사거리 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단교회들과 순복음 교회의 교인이 열심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본 TDE 성경연구는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성경연구를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 믿음의 단계를 구별하고 또 학문적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연구되어져 있습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시각과 판단도 정확하게 내릴 수 있도록 배려되었습니다. 이 점이 TDE 성경연구의 강점이며 많은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신학적 사상에 대한 검증은 객관적일수록 좋습니다. 투명하면 투명할수록 좋습니다. 자신의 내 신학은 신학자를 통해 검증 받고 신앙에 대한 인정은 담임 목사에게서 받게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검증시스템은 없습니다.


보수교단의 목회자들은 먼저 교인의 신앙을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인정해 줄만한 것을 찾아 보시고 인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더욱 열심을 낼 것입니다.


신학은 사상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이냐 신학적이냐, 성경우선적이냐 체험우선적이냐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신학사상의 토대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이 토대를 제공해 주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척량할 수 있게 됩니다. 신학적 사상의 토대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신학대학(4년과정)에서는 3학년 이상, 신학대학원(3년 과정)에서는 2년 이상은 되어야 연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사상의 체계에 대한 연구는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TDE 성경연구에서는 가장 먼저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등학교에서도 세계사 속에 드러나는 인문학과 철학을 기본적으로 공부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 교육의 수준은 높습니다. 


현실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자 중에 80%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고도의 지식층으로 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현실에서는 저학력자들도 상당함으로 모든 교육 프로그램을 지식층 위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가 안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의 커리큐럼을 어떻게 배정하는가와 얼마의 수준으로 기획하는가에 대한 눈높이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딜렘마로 작용합니다. 올리려면 어느 수준까지 올려야 할지, 낮추려면 어느 수준까지 낮춰야 할지 심히 고민됩니다. 하지만 이 고민은 해 보려고 하는 목회자의 고민이지 교육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목회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학교 졸업자라고 해도 30대 이상이 되면 경륜과 연륜이 쌓여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사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고도의 학문적인 수준을 요구합니다. 못 따라가면 혼자서 공부해서라도 따라 가겠다는 의욕이 넘칩니다.


문제는 기술입니다. 수준은 신대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상적 토대의 수준에 맞추어 두고 교수자가 기술적으로 해결해 주면 될 일입니다. 즉 전문적인 용어는 풀어서 교수해주면 얼마든지 수준은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상 신학적인 전문용어는 철학 용어를 풀이한 것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그대로 사용해도 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사상적 배경에 대한 강의를 해주면 의구심으로 똘똘 뭉쳐 내 신학을 절대 고수했던 문제성 교인들이 스스로 풀어지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TDE 성경연구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는 신앙의 문제점들을 위한 해결 내지는 도움을 주기 위해 현실과 미래라는 로드맵을 구성하여 이정표를 세워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단으로 빠져 나가는 문제교인에게는 족쇄를 채워주겠고, 환경의 늪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미래의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도록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삼위일체론을 기본적인 지식으로 채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성경연구의 틀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발생한 "내 신학"을 기본 출발점으로 삼고 내 신학의 근거에 대하여 스스로 성찰할 수 있도록 정통적인 경계점을 구분해 준다면 건강한 교인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3. 내 사상과 내 성향


모든 글에는 전달하려고 하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논지라고 하지요. 논지는 전개과정과 목적이라는 결론이 있습니다. 논지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가는 것이 글입니다.


글은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논리는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며 그 이론을 주장 혹은 주의(ism)로 부릅니다. 모든 ism에는 사상이라는 핵이 있습니다. 사상은 생각하는 틀입니다. 이를 사변이라고도 하며 사상자는 일정한 범주(category)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상의 성격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상의 성격은 방향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향이라고 합니다. 성향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적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가지게 되며 체계화 됩니다. 사상적 체계가 세워지면 이로써 자신의 이론, 즉 논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논리를 형성하게 되면 역동성이 나타납니다. 이 역동성은 방어 혹은 공격이라는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같은 사상의 그룹과는 소통이 되고 반대 사상에 대하여는 공격성을 갖게 됩니다. 공격성과 방어성은 외적인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상대방의 사상에 대하여 공격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되면 공격을 하게 되어 있고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방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상이 같으면 소통이 되어지고, 소통을 통해서 같은 뜻이 확인 된다면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배짱도 같다면 함께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학문이 완성 혹은 발전 되고 사상이 전파되게 됩니다. 


사상이 공산주의냐 혹은 자유민주주의냐로 가는 방향성은 사상의 성향으로 특정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상의 문제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성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이단이 되고 정통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정통적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적인 것에 대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고전으로 둘러싸게 되어 있습니다. 가구가 그렇고 듣는 음악이 그렇고 보는 책도 고전적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현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현대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상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성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성향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 순서입니다. 고전적인지 현대적인지 자신의 성향이 어느 쪽을 선호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고전적이라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보수주의자요, 정통주의자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성향이 현대적이라면 자유주의를 선호하게 되어 있고 개혁이라는 단어에 즉각 호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분이 보수주의 신학을 하게 되면 교단전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들들 볶아 먹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분은 길을 잘 못 든 것입니다. 양자가 잘 못 만난 것이지요. 서로에게 불행입니다.


부부도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야 합니다. 종교가 같다고 해도 성향이 다르면 서로가 피곤해지고 서로가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달라도 성향이 같다면 그럭저럭 살게 되어 있는데, 더 큰 발전은 못합니다. 보편적인 가치에서 한 사람의 성향, 사상은 그의 활동영역에 따라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가정에서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가장 먼저 따져 봐야 할 것이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현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 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향이 달라 발생하는 불행을 상당부분 막아 줄 것입니다.


본장에서는 사상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보편적인 가치, 즉 역사적으로 드러나 있는 가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신학의 흐름과 현재 한국의 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민중신학까지 석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물 흐르듯 개괄하는 형태로 펼칠 것이나 민중신학 부분에 대해서는 무게를 두겠습니다. 그 이유는 민중신학자 들의 상당수가 현재 정부의 실세(전 문화부 장관, 현 통일부 장관)가 되어 민주화로 위장한 친북노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정체성마저 크게 위협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비중있게 다뤄야 하고 깊이 다뤄져야 할 문제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심장부까지 파고 들어 대한민국의 정체성까지 위협할 정도로 민중신학은 작은 누룩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부풀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수주의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이라는 스스로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민중신학이 정부의 요직까지 파고 들 수 있도록 방치한 결과입니다. 과거 대원군 시절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 시작된 카톨릭에 대한 박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선교사들과 정부가 세운 원칙이었습니다.


분명하게도 보수주의의 핵심인 칼빈주의는 세상정치와 신정치를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칼빈은 도시국가인 제네바를 통해 의회정치를 구현했고 성경에 입각한 법체계를 입법화 했습니다. 현대 정치의 시작이지요. 이후 화란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1837.10. 29 ~1920.11.8)는 개신교 목사이며 화란의 첫 사립대학인 자유대학을 설립한 설립자이며 그 대학의 총장이었고 언론인이었으며 칼빈주의 정통신학자였습니다.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는 칼빈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세계적이며 더 나아가 우주적입니다.

    


제2장 Doing (멋진 삶)


1. 현실의 문제


1) 크리스찬의 자살 증가와 위기극복에 어떤 도움이 효과적인가의 문제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사이에 어린아이가 없어져 버리듯 어제까지 지성과 미모를 자랑하던 빛나는 얼굴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1996년 1월에는 가수 서지원이 유서를 남긴 채 약물과다복용으로 숨졌습니다. 이후 같은 달 6일에는 가수 김광석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2005년 2월에는 영화배우 이은주 양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올해 1월에는 가수 유니가 그리고 2월에는 정다빈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인과 자식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 놓고 외로움에 못 이겨 자살한 기러기 아빠들도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 이토록 보잘 것 없는 것일까요.


먼저 떠난 이들의 공통점은 대화의 단절에 있습니다. 자신의 위기에 대하여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는 점이 크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외로움이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인가?


자살자의 유언에는 자살자가 죽음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줄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다는 죽음에 대한 동기가 선명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죽으려고 하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줄 것이 없는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을 택했다는 유서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근래에 들어 크리스챤들의 자살률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기독교는 자살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절대적 가치관인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악한 행위로, 있어서는 안 될 행동으로 강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크리스챤에게서 자살률이 늘고 있습니다. 사회적 병리현상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살현상은 충동이 되었든 신드롬이 되었든 반드시 막아내야만 할 중차대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신(神)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1) 


중세시대에서 억눌렸던 인간의 가치는 르네상스를 통해 표현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를 수단으로 인문주의를 복원하였습니다. 복원된 인문주의는 과학과 경제와 결탁하면서 사랑을 인간의 최고의 가치관으로 노래하는 인본주의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본주의의 한 갈래는 남녀의 사랑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연애론을 발전시킵니다. 다른 한 갈래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발견된 넓은 세계에 눈을 돌리며 제국주의의 가치를 크게 높입니다. 이때부터 정치가와 사상가 철학가라는 수식어와 명패가 여러 개씩 따라 붙고 세계1차 대전의 불씨가 되어 세계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다른 한 갈래는 신과의 대결을 모색하면서 니힐리즘(nihilism)으로 발전합니다. 니힐리즘은 자살과 맞물려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2) 니힐리즘(nihilism)


니힐리즘의 기원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 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2) 


니힐리즘의 의식은 19세기 후반 F.W.니체, M.슈티르너, F.M.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니힐리즘은 극한의 대립을 이룹니다. 가장 위험한 니힐리즘의 양태는 절망적 니힐리즘으로서 일체의 사상이나 주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하는 양태입니다. 이 양태는 두 갈래로 갈립니다.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사물에 무관심으로 대응하며 살아가는 쪽이 있습니다. 사상가에 있어서 리힐리즘은 무를 무로 받아들임으로써 사상에서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의 길을 모색하는 완전자유주의자이거나 불교 수행자 그룹에서 찾아집니다. 


허무주의자 쇼펜하우어는 (1788~1860) 완전자유주의를 외치며 자살예찬론을 펼칩니다. “신은 없다. 자살은 자선이며, 선이다. 어서 죽자”고 선동합니다. 하지만 그는 88세까지 질기게 오래 살았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이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로 응답했습니다.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지상은 포기되었으나 초인에게는 최고의 안식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초인에게 있어서 지상의 의의는 영겁회귀를 통해 삶의 긍정의 최고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며 초인의 이상을 가르쳤습니다. 이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1886년 발표된 "선악의 피안(彼岸)" 에서 니체는 위의 사상과 연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고 고발하면서 이를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초인이 되어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인간 자신이 초인이 되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초인이 되기는커녕 2년 후인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했습니다. 이후 정신착란의 발작을 일으키다가 2년 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니체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독과 싸우며 신과 싸웠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를 설파하며 허무주의로 청소년을 자살로 몰아가고 있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실존주의가 일어납니다. 쇼펜하우어 보다 25년 뒤에 태어난 키에르케골 입니다. 19세기의 실존주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키에르케골(1813.5.5-1855.11.11)은 철학의 귀재로 불렸습니다. 키에르케골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 병은 절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절망에 도달하게 되면 죽음의 유혹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가고 결국은 죽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원인으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지목합니다. 니힐리즘의 주창자들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은 실존의 바탕이 잘 못 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실존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종교적 실존입니다.


케골은 인간 실존의 모델을 세가지 양식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세가지 실존의  양식을 삶의 여정의 단계로 풀었습니다. 세가지 실존의 양식은 심미적(쾌락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입니다. 삼자간에는 나이, 성향, 체질이라는 외모적 조건과 학력, 가치관, 종교라는 내면적인 요소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며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발전의 과정은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의 양식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각각의 삶의 모형은 철저히 독립되어 있고 구분되어 있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라는 점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쉽게 연결될 수도 있겠고 발전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각 단계의 삶의 양식은 실존이라는 공존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의 벽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한계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으려면 이전까지의 삶의 양식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중대한 계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가령 마틴 루터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마틴루터는 친구와 함께 비가 내리는 길을 빠르게 걷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번개가 치며 벼락이 떨어져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마틴 루터는 멀쩡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마틴 루터는 깊은 고민과 갈등 끝에 이는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이라는 확신을 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때의 종교적인 체험은 나중에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루는 동안 수많은 위험과 핍박 그리고 회유를 이기고 종교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케골은 마틴루터처럼 극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의 경우, 인생역전의 계기를 결심할 수 있기 전의 갈등상태가 절망까지 가야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케골은 이를 한계의 벽으로 혹은 절망으로 말합니다. 절망은 한계의 벽인 동시에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열쇄이기도 합니다. 절망은 마침내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마주 설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린 생과 사의 기로입니다. 단독자는 이 절망에서의 구출을 하나님께 요청하게 되고 결국 구출됩니다. 구출된 단독자는 이전의 삶의 양태를 버리게 되며 새로운 양식의 삶으로 도약합니다.3)


케골은 절망적 상황에서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설정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설정 되는 일은 우주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이러한 신앙적인 재발견이 있어야만 신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자란 대사건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우주의 중심이며 절망을 이긴 능력자입니다. 마치 전기를 경험했듯 창조주 하나님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단독자)으로서, 문자 그대로 단독자로서 나를 하나님께 관련시켜 보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올바른 형식이다. 이러한 관계가일단 성립된다면 그것은 유럽의 전쟁과도, 그리고 지구의 모든 구석까지도 다 포함한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우주를 가장 깊숙한 심연으로까지 몰고 가는 대변동의 사건이다. 이러한 유의 관계적 대변동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의지해 본 경험이 털끝 만큼도 없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이 전기를 만지면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4)


키에르케골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실존으로 종교적 실존을 추천 했습니다. 종교적 실존에는 두 가지 삶의 모델이 제시됩니다. 구약에서는 욥이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실존자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구약의 욥은 자살의 환경까지 내어 몰렸어도 끝까지 믿음의 순전을 배반하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은 복있는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이 가장 가치가 있는 죽음인지 몸소 실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케골이 종교적 실존자의 유형을 욥과 예수그리스도로 지정하고 죽음과 절망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니힐리즘과 염세철학에 대한 철학적 사상 전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왜 케골이 순교자 사도바울을 종교적 실존자로 지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했는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상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모순이지 않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갈등과 의문은 아래에서 풀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매우 특징적인 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너무 대망한 나머지 현세와 내세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와 영혼을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충돌하게 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實在)가 극단적으로 대립되면서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유발합니다. 사도바울의 이원론적(二元論的) 대비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되고 있습니다. 지상(地上)에서의 육체적 생존은 그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럽혀지고 타락한 육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까지 도달됩니다. 이 결론에 도달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기뻐하며 감성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육체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나타납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며 가치가 없는 인간이니 죽어 마땅하다는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을 때에,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요청되고 있느냐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갈려 나타납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을 재요청할 때, 자신을 염치없는 자, 벌레같은 자, 뻔뻔하고 악한 존재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서 자신을 끝까지 낮추고 비하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살리소서.”라는 신앙적 믿음의 행위(기도)를 통해 위기 혹은 절망에서 탈출합니다. 그러나 소수자는 자살을 선택하고 맙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한 신앙은 그가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점에서 극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는 꿈 혹은 환상을 통해 본 삼층천에 입성하기 위해 순교하기로 결단하고 죽을 자리만 골라 찾아 다녔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육체적 본능이 불길같이 타오름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순교하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터에 가정과 자식을 남겨서 어쩌겠느냐는 책임감, 결혼은 자신의 순교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는 가시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골이 위대한 순교자 사도 바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실존자의 모델로 제시한 것은 "삶의 자리"인 현실에서 어떤 죽음이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냐를 놓고 따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가치 있는 죽음이나,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입성하기 위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죽음(순교)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따라서 케골이 종교적 실존 모델에서 사도바울을 지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한 의미는 명백합니다.


살신성인, 이왕 죽으려거든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죽음을 선택하고 가치 있게 죽으라는 말이지요. 순교에 대한 가치는 지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에 대하여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과 면류관을 위한 순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살신성인의 순교는 차원이 다릅니다. 케골은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살신성인적 순교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잃었다면 많은 것을 잃은 것입니다. 거기에 건강까지 잃었다면 최악의 수준입니다. 만약 목숨까지 잃었다면 다 잃은 것입니다. 순교는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뒤에 천국에서 면류관의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순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전쟁이나 혹은 선교지에서의 순교 등  순교를 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주어질 때 순교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살신성인적 순교는 여건만 되면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해 주고 대신 죽는 순교,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구출해 내고 대신 죽는 순교, 지하철에 투신한 자살자를 구출해 내고 대신 죽는 순교 등등이 그것입니다. 


순교는 믿음의 배반을 종용하는 정권이나 칼이나 총으로부터 믿음의 순전을 지키는 것만 순교로 말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런 류의 순교는 명분이 주어져 있는 순교일 뿐입니다. 친구를 위해 대신 죽어주는 것도 순교입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공인을 해 주신 덕목 중의 으뜸이며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대신 죽어 주거나 친구를 위해 대신 죽어 주는 것도 순교라는 말입니다.


순교가 거창하게 왕이나 대통령 혹은 공산당 앞에서 "나와 내 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겠다."하고 사형을 받아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게 되어도 순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병을 얻어 죽게 되어도 순교입니다.


사도바울처럼 거창하게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하고 순교를 하는 것만 위대한 순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창한 순교이지요.  


사도바울에 대하여 다루는 성경공부 교재를 보면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고, 순교에 대한 정돈도 없이 거창한 순교만 장려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교단은 이라크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할 순교지원자를 뽑았습니다. 정부당국에서 말리고 전 국민이 걱정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어이 갔다가 죄다 이라크 공항에서 잡혀서 망신만 당하고 돌아 왔어요. 또 북한선교를 하는 어떤 선교회는 순교자를 다 뽑아 놓았답니다.


이는 순교에 대해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입니다. 또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거창한 것에만 의미를 두려고 하는데요 그것은 성경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작은 것에 더욱 가치를 두셨습니다. 거창한 것을 거절하시고 그런 것은 외식이라고 경고까지 하십니다.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준 것,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심지가 견고한 자, 중심으로 회개한 세리와 창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등등.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고쳐 주시지 않았어도 문둥이와 거지는 고쳐 주셨습니다.


문제는 중심입니다.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 중심에 그리스도를 단단히 모시고 있는 사람. 심장(심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겨 넣은 사람. 이들은 숨을 쉬는 것도 기도요, 움직이고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하셨습니다. (습 3:17) 의인의 죽음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게 죽은 사람의 죽음을 귀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이지요. 만약 그리스도인이 지하철 자살자를 구하고 대신 죽었다면 그것이 순교입니다. 


지금까지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검토해 보면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부분이 사도바울의 신앙과 믿음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도바울에 대해 다룰 때, 특히 순교를 향한 달음질에 대해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입니다. 이 괴리는 현실과 대조하여 충분히 설명해 주거나 풀어 써 주어야 합니다. 교수자가 사도 시대의 상황과 현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거나 오히려 사도의 시대와 현재를 막바로 연결해서 설교하거나 가르친다면(실제로 성경이 구속사의 방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논리로 사도시대와 현재를 막바로 연결하는 설교와 성경공부가 얼마나 많은가)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은 현실과 사도바울의 시대를 직접 연결해서 제멋대로 상황을 설정하고 적용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공부는 성경을 적용하는 피드백의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결단의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결단의 기도를 유도하고 있지요. 결국 “사도바울처럼 살아야겠다.”, “나도 사도바울처럼 순교자가 되어야겠다.”는 가치관의 결단 기도까지 유도해냅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나 성경공부에서 드러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청소년의 순수한 감정을 도발적으로 악용하는 강사들이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울고 웃기는 것으로 자신이 능력을 검증해 내려고 합니다. 많은 부흥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이런 유형의 실수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는 한 인간의 평생에 족쇄를 채워 놓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원기도로 연결시켜 결단의 기도를 유도하고 결단의 기도 중에 눈물을 빼내는 것입니다.


CCC에서는 대학초년생들의 순수한 감성을 이용하여 순결서약을 받아 낸 적이 있습니다. 제 아들도 순결서약을 했답니다. 친절하게도 순결서약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스킨쉽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까지 내려진 모양입니다. 아들은 이를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다해서 지켜야 한다고  착실히 임무 수행 중에 있고 연애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결혼하고 싶어 했던 여자친구로부터 광신자로 오해를 받고 절교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당히 갈등하고 있는 중입니다. CCC 측이야 성경대로 했다고 하면 그만이겠으나, 그것이 어느 선에서 나왔느냐가 중요합니다. 결혼한 지도 목사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실력이 있는 미혼 간사의 선에서 나왔느냐가 중요합니다.


CCC는 켐페인성 행사 한 방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아내고 메스컴을 탔으니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순결을 지킨 순수한 대학생들이 한 순간의 감정유입으로 서원까지 한 이후의 사후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는 지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똑 같이 순결서약을 했던 남녀가 만날 수 있도록은 배려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책임이 있는 기독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단체들이 단체의 명성을 얻기 위해 수많은 행사와 성경공부를 기획합니다. 단회성의 행사로 그쳐지는 행사도 있고 수십 년째 연결되는 행사도 있습니다. 수십 년을 가지고 갈 수 있는 행사라면 성경공부 밖에 없습니다. 수십 년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성경공부라면 적어도 그 효과에 대해 충분히 검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공부에 대해 검증을 하는 기관도 없거니와 교육의 차원이라는 미명하에 이단의 성경공부마저 용인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이미 100년을 넘어섰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역사로 보나 문화권으로 보나 전통적 종교로서 한국인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가 한국인의 정신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연구도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각종 기독교 단체들에 대한 검증차원의 연구 결과물도 나와 주어야 하지요. 큰 틀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해냈는지에 대한 검증이고 작은 틀에서는 기독단체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추려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검증은 KBS와 MBC에서 기독교계의 비리 혹은 목사의 비리에 대해 고발형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발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듯 가히 필사적으로까지 보입니다. 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100년의 역사 동안에 세습과 헌금착취, 대형교회 건물 건축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전유물이 교회라는 등식으로까지 전락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방송매체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준 자칭 교회개혁이라는 완장을 두른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기울여야 할 첫 번째 할 일은 사후관리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사후관리가 어떻게 되고 있느냐를 검토해 주어야 합니다. 교단은 기독교 단체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난립되어 있는 초교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있는 기독교 단체들에 대한 검증을 실행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각종 성경공부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합니다. 


2. 현대 신학의 배경


신학에는 시대적인 배경과 사상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15세기 르네상스에서 발전한 인문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과 더불어 개신교의 시대가 도래되면서 신학사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17세기는 죤 칼빈의 개혁주의신학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로 평가되며 이때의 신학은 칼빈의 "예지 예정론"이 중심이었습니다. 18세기에 들어 와서는 웨슬레 형제를 중심으로 칼빈의 예정론을 수정한 "자유의지론"이 주창되고 장로교는 감리교(죤 웨슬레)와 성결교(동생 찰스 웨슬레)로 나뉩니다. 19세기에는 보수주의(복음주의)와 자유주의로 양분됩니다. 칸트와 헤겔의 인문주의 철학의 사고가 도입되면서 인문주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문화 비평(역사비평학)이 현대신학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적 사고로 성경을 해석하는 접근양식을 자유주의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사고(이성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은 리힐리즘의 허무주의 철학과 접촉점을 가지게 되면서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와서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후, 불과 25년 만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독일의 신학은 "위기의 신학"으로 불려집니다.5)


위기의 신학은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르트는 전쟁광인 히틀러가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면서 다른 기독교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며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바르트는 이때에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와 예정론에 대하여 상당한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두 기독교 국가가 전쟁을 할 때 두 국가의 국민이 다 같이 한 하나님께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인가? 히틀러에 의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자행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용하신 것인가? 또 이런 대학살까지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인가? 하는 절규로 위기를 말합니다.6)


바르트에 의해 천명된 위기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단절"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단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무지에서 발생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성과 신에 대한 이해(제목 : 계시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허담 역)를 발표합니다. 바르트는 위기의식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내용은 신을 향한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19세기의 신학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사고를 서술한 것이라는 역사비평의 신학이 우세했으며 헤겔의 영향을 받은 정반합의 원리(헤겔은 감정과 감정에 반하는 이성이 서로 합한 합리적이며 변증적인 논리로 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성경해석의 방법으로 추천되었다.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이 신에게 갈 수 있는 노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신이 어떻게 인간을 찾고 발견했느냐를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주가 말씀하셨다."가 성경의 전부라고 주장합니다.7)


바르트의 "계시의 그리스도교적 이해"가 발표되고 난 이후 신학계에서는 "이는 유원지에 모여 있는 신학자들에게 폭탄을 던진 것과 같은 충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발생한 신학의 위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때에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바르트에 의해 제기된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세계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위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항상 잠복해 있었고 갑자기 치솟아 올라 전쟁이 유발되어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전쟁은 반복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은 항상 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던 겁니다.


바르트는 위기신학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냈습니다. 전쟁을 통한 인류의 위기는 반복되지만 하나님의 존재양식인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계시한 계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로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위기는 더 이상의 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류는 그 어떤 위기에도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계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안에 모든 답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 그리스도의 계시론입니다.  


1) 신정통주의


바르트의 계시론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라는 이름을 달고 신학의 역사에 나타납니다. 위기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로 풀이가 되는 신정통주의는 단절의 위기라는 상황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의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삶의 자리에서 혹은 상황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해석의 모형이 제공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상황윤리와 상황신학이 나왔습니다.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는 한국 신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상황에 따른 성경해석의 모형은 자유주의 신학의 또 다른 갈래를 만들어냈습니다.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중국적 신학에 바르트의 신정통주의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즉 상황과 시각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도 그 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나온다면 정통신학이라는 새로운 정통이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탄생하고 난 이후 세계의 기독교는 정치적 이해와 환경의 이해에 따라 각각의 자국적인 기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지방교회는 중국적 기독교로, 남미는 해방신학으로 정치적 이해와 환경적 이해에 따라 각각의 변질된 기독교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도입된 바르트의 신학은 바르트의 제자 윤성범 교수에 의해서 입니다.  감리교 신학대 학장이었던 윤성범 교수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존재론적 신학 방법을 한국 신학과 접목하여 토착화 하는 작업, 즉 한국적 기독교를 만들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8)


윤성범의 신학적 기조는 두 개의 각각 다른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바르트의 존재론적 신학양식과 다른 한 가지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양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두 가지의 신학적 양식을 한국교계에 토착화시키기 위한 윤성범의 노력은 1960년대에 한국신학계에 논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한철하 교수와 벌인 신정통주의에 대한 논쟁, 1963년에는 단군신화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1973년에는 유교의 진리체계와 접목시킨, 이른바 '성(誠)의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철하 교수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 신학의 한 전통으로 간주했습니다.


윤성범은 기독교와 한국사상과의 접촉을 통해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이 노력으로 국내 유교·불교 학자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국제 종교사회학에서도 적극적인 활약을 하여 한국 신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적 신학의 정립을 위해 애쓰는 동안 감리교는 한국적 감리교가 되어 자유주의신학과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2) 해방신학


바르트의 위기신학의 전통은 남미로 건너가서 해방신학을 탄생시킵니다.  해방신학은 자본주의 신학에서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신학이 자본주의 배경에서 나온 신학이라고 지적하고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관점(공산주의)에서 성경을 재해석하는 신학입니다. 주요 기전은 칼 바르트의 종말론, D.본회퍼 이후의 정치신학, 가톨릭 신학자 K.라너의 신학 등 유럽의 20세기 신학사조를 차용하여 근거로 삼았습니다.


해방신학은 카톨릭 사제들에 의해 천명되었고 제3국인의 인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백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신학도 자본주의신학이 있고 빈민의 신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인 위주의 신학을 통해 제3국의 신학은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해방신학에는 예언자적 심판의 개념과 하나님의 의의 종말론적 성취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를 통해 예고된 심판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 심판이 진행되는 것으로 봅니다. 심판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착취세력들입니다. 이들은 기업가이며 지주들이며 이들과 결탁되어 있는 정부의 지도자들입니다. 더 나아가 정부와 연결되어 있는 서방의 자본시장까지 심판의 대상으로 확대됩니다. 


해방신학의 근저는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에 두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를 통해 예언된 그 때, 그 나라가 오면 (사 11:6~9, 참조 복음성가 47장,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모든 압제와 억압 그리고 탈취에서 해방되어 해를 당하지 않는 나라가 구현된다는 것이지요.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발표된 것은 중대한 배경이 있습니다. 남미는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령에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가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국가라는 위치에서 비록 독립되기는 했으나 과거의 식민지 역사는, 서양인들이 식민지화를 위하여 기독교(카톨릭)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카톨릭)를 통해 식민지 국민들의 정신문화를 억압하고 탄압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문화양식과 민족적인 정신문화권은 소멸되어 버리고 대신 서방세계의 양식을 따르게 되었고 서방세계를 의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본을 앞세워 노동력과 경제를 착취하여 경제식민국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특히 가난한 자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가난한 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근본적으로 유럽의 교회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가난한 자의 교회이며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초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각각 10~30명 정도로 구성된 지역교회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음식, 물, 하수처리, 전기 등의 필요를 공급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기초 공동체는 대부분 평신도 지도자가 이끌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형성 되어있습니다. 


해방신학운동은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해방신학의  목회 방향은 부유한 엘리트에 대한 가난한 자의 정치적 투쟁을 포함한다고 주장되어 투쟁의 성격과 방향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해방신학자들을 공식적(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비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조달자로서 또는 폭력적인 사회혁명의 주창자로 비판되었습니다.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처럼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몇몇 사제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제는 그들의 활동이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주장함으로 보수주의에서 벗어났습니다.


두산백과사전을 제공하고 있는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 해방신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1950년대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모델로 하는 ‘발전’ 혹은 ‘개발’이라는 이념 아래 사회·경제 발전을 통한 현대화를 추구했는데, 그것은 발전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기구들에게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과학자들 사이에는 그러한 발전주의가 선진국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경제적 종속(從屬)을 초래했다는 논의로 발전하였다. 즉, 1960년대에 선진국의 부(富)는 배로 증가했으나, 세계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제3세계의 빈곤은 심화되어만 갔고, 결국 이 빈곤은 전자의 부산물이라는 주장이다. 또, 이같은 상황의 극복은 종전의 발전주의 모델을 통해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해방이라는 개념은 이제 그러한 발전주의에 대치되어야 하며, 새로운 의미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을 흡수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발전주의는 기존의 세계 경제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반해, 해방은 이것의 혁명과 이로부터의 정치·사회적 해방을 의미하며, 이 혁명과 해방이 실현되지 않고는 인류와 역사의 참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사회적 문제상황의 과학적 분석이론으로서 원용되고 있다. 이같이 해방신학에 내포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는 소련에 의해 대변되던 이른바 변증법적·형이상학적 유물론이거나 무신론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종말적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박두해 가는 실천의 이론적 도구 내지 매체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은 앞서 말한 상황과 분석을 성서에 증언된 종말론적 구원신앙의 실천적 계기로 삼고 있다.』9)


해방신학의 특징은 남미의 특징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것은 남미의 특징이 낙천적이며 소박하고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게 살 수 있는 문화적인 특징에서 출발합니다. 자원이 풍부한 남미의 환경적 특성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자연이 주는 것만큼 누린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경쟁심과 출세하고 성공하겠다는 도전력보다는 낙천적인 삶을 누리고 살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경쟁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의 시장경제원리는 자신들의 삶의 근간과 정신문화권까지 위협하는 것으로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식민지 국가의 백성의 신분과 경제적 식민지 국가의 백성의 신분은 다릅니다. 정치적인 식민지 국가의 백성은 포로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주인이 먹여 살려야 하는 겁니다. 반면, 경제적 식민지 국가의 백성은 노예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따라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빼앗아서라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방운동은 지주세력(자본)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게 되고 노동력에 대한 착취세력에 대한 항거라는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공산주의의 혁명논리이지요.


해방신학은 공산주의 혁명논리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신학적 동기를 부여해 준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 원리에 신학을 결합한 형태로서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을 지지하기 위한 신학으로 출발되었습니다. 


3) 민중신학


다음으로는 해방신학과 같은 원리에서 나온 한국의 민중신학이 있습니다. 민중신학 역시 공산주의를 지지해 주기 위해 탄생한 신학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신학으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민중신학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민중신학은 1970년대에 생겨난 한국 개신교의 실천신학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봅니다.  


『1975년 김찬국, 김동길의 출소를 기념한 3.1절 예배 강연에서 안병무는 복음의 민중적 성격을 들어 ‘민중’이라는 용어를 처음 신학해석의 핵심틀로 사용하였고, 그해 서남동도 《신학사상》 4월호에 ‘민중의 신학’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이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교 민중사와 한국민중사를 신학에 합류시켰다. 또 현영학은 탈놀이 등의 민속문화에서 민중종교의 표현을 발견하여, 민중은 현실을 비판하고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창조하는 주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경향을 아우르는 말이 민중신학이다.


이 용어는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후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신학인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한국적 상황신학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민중신학은 특히 제3세계의 신학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민중신학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시작된 1960년대에 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아직 구체적으로 역사와 구원의 주체로서 ‘민중’이 고려된 것은 아니었지만 개발독재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된 기층민중들의 고난 현실과 그들의 저항에 접한 일단(一團)의 신학적,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한 까닭이다.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의 충격과 연이어 시작된 유신체제는 구체적으로 민중신학이 발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신학자들은 이른바 ‘정통신학’은 정적(政敵)이며 여기에는 이미 박제 되고 죽어 버린 ‘말씀’만이 있을 뿐이라고 공박하고 그 ‘말씀’이 다름 아닌 지배자의 눈으로 본 신학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한국의 고난 현실을 낳은 여러 문제들과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한다(사건의 신학). 또 그들 자신은 민중을 이끄는 무엇이 아니라 계속되는 기층민중들의 고난을 ‘민중사건’으로 증언하고 민중의 고난으로 구원받는 존재임을 고백한다(증언의 신학). 그들에 따르면 민중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 그것이 살아 숨쉬는 성서의 메시지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 자신이 민중이었고 그러한 구원의 길을 실천한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성서신학자 안병무, 조직신학자 서남동, 문익환이 있으며 이들이 개척한 길 위에 민중신학은 한편으로는 이론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으로써 아직도 진행형이다.』 10)


2000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는 “[한국의 인맥] 안병무 학파”라는 기사에서 민중신학의 계승자로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제자그룹은 그가 73년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를 통해 배출한 후학들이다.민중신학적 관점에서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손규태(성공회대), 민중신학을 전통신학적 입장에서 해석한 임태수(호서대), 민중의 생활ㆍ사건ㆍ운동을 중점 연구하면서 민중신학 계승에 힘쓰고 있는 김성재(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ㆍ한신대), 신화적 이해에 머물렀던 요한복음을 민중신학으로 해석한 최영실(한국신학연구소장, 성공회대), 경제신학적 측면에서 민중신학을 발전시킨 채수일(한신대)교수와 한국사상사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을 조명한 박재순(한신대 강사),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민중신학을 계승한 강원돈(한일장신대 강사), 사회과학이론의 바탕에서 민중신학을 계승ㆍ발전시키고 있는 최영묵ㆍ김진호씨 등이다."11) 


현재 한국신학연구소 출신의 민중신학자들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그리고 현재 노무현의 참여정부의 핵심으로 부상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성재 교수입니다. 김대중 정권시절에 민정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거쳤습니다. 현재 경인방송 대표이사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교수직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한신대 교수 출신들이 청와대에서 중직을 맡았습니다.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는 성공회대 출신들이 출세를 했습니다. 현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성공회대 교수 출신이지요. 각종 위원회의 장과 위원들은 민중신학자이거나 민중신학을 주창하는 목회자들이 대거 기용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기독교와 한국사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민중신학이 정치의 실세로 등장함으로 인해 한국의 정통 기독교(보수주의)는 기득권자이며 동시에 부르주아로서 민중에 의해 심판받아야 할 적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실상 한국 기독교는 민중신학의 해방전사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개정사학법입니다. 개정사학법 반대를 외치며 목사님들이 항의의 표시로 15분이 삭발투쟁을 했으나 안 되었습니다.


개정사학법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잠복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의 자유화를 외치고 있는 불교계의 와해 공작입니다. 재가불교에서 출발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외칩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예배와 종교행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세운 학교는 기독교계 사학의 1/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10밖에 되지 않는 사학교로 9/10가 넘는 사학을 대표하는 것처럼 오만과 오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명상을 수행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상법이라는 미명하에 권장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둘째는 기독교 사학의 설립자들을 기득권자이자, 지주적 부르주아로 정의하고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이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혁명과업의 일환으로 친북계 라인이 앞장을 서서 정치적으로 야합하고 사학법을 개정했습니다. 여기에 민중신학자 출신의 인권위가 투입되어 있습니다.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현 통일부 장관을 배출한 민중신학이 한국 전체에 끼치고 있는 영향의 깊이와 차원은 일개 이단이 파급시키고 있는 영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남한 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중신학이 친북노선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친북노선의 중심에는 체제전복의 혁명이론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들이 개입되는 곳에는 반미구호가 외쳐지고 선동적인 혁명구호가 외쳐지면서 폭발성을 유도해 내고 결국에는 분신자살 등의 과격시위로 돌변합니다. 이들은 앞으로는 평화를 외치나 속으로는 오직 혁명이론 뿐입니다.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신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이론을 신학적으로 뒷받침 해주는 작업으로 실상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인을 상납해주는 이단적 논리일 뿐입니다. 다시 민중신학은 친북자인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이용을 당하면서 역적논리로 변모합니다. 즉 사상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친북자들을 위해 사상을 세탁해 주었다는 겁니다. 빨갱이들이 사상세탁을 거치니 지식인으로 둔갑을 했습니다.


과거 한신은 일제시대에 동일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와 함께 창씨 개명의 논리를 제공해 준 일입니다. 이는 한신이 공산주의 사상을 최우선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도 할 수 있었고 창씨개명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들 일단의 공산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의식화된 민중들이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되어 민중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들의 앞에는 정치인이라는 팻말을 든 김대중과 종교인이라는 팻말을 든 문익환이 앞장을 서고 의식화된 민중은 뒤를 따랐습니다. 이들 민중신학의 신학자들이 민중을 의식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공부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동안 보수주의 교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교회는 거룩하고 정치는 악한 것이다, 교회는 목사가 정치는 정치가가 해야 한다는 이분법으로 구분해 왔습니다. 여기에 교회와 국가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세워 놓고 담장을 둘렀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나 보수주의 교회는 그 경계를 끝까지 지켜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한민국에서는 칼빈주의자 대통령이 나오지 못했고 국회의장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인 여운형은 평양신학교를 중퇴한 기독교인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개국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에 공산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해방을 말하게 되어 있고 행동력을 가진 파괴집단으로 둔갑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즉, 공산주의의 혁명논리를 위해 기독교를 악용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과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은 이미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에 감응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해방정신으로 왜곡시키며 스스로의 혁명논리에 대입하여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런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공식에 묶여 해방전사로 자처하게 됩니다. 개혁의 일꾼이라는 완장을 스스로 만들어 차고 말이지요. 속히 자신이 만든 공식에서 벗어나야 할 일입니다.


제3장 Eating (거룩한 습관)


거룩한 습관에 대하여는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미래를 어떻게 열어야 하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으로 가고 다음으로는 거룩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식환경과 공간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할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연구를 통해 미래와 연결시키고 경제와도 연결할 수 있는 라인(line)을 만드는 작업에 고민을 할까 합니다. 성경연구가 미래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히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성경연구를 엘빈 토플러가 말한 부의 미래와 연결시켜 미래적 답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영혼이 잘 되듯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미래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망하며 공동체를 이뤄 살자고 하는 베드로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마 17장)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요6:29) 이 말씀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강조하시고 때로는 심히 책망하신 이유가 설명이 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믿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나 똑같이 주어진 과업입니다. 믿는 일은 근본적으로 주어진 일이요 여기에 직분이 맡겨졌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믿어야 합니다. 잘 되게까지 믿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미래를 말했습니다. 미래에는 부의 시대가 올 것이며 시간과 지식 그리고 공간이라는 3박자를 갖추고 있는 국가나 개인에게 몰린다고 역설합니다. 3박자를 갖추면 미래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미래론을 펼쳤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간도 돈이요, 지식도 돈이요, 공간도 돈이라는 뜻입니다. 공간도 돈이라는 말에 의아해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몰리는 곳에 돈이 있다." 라는 말과 "인적자원이 돈이다" 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지식환경과 공간.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1) 지식환경의 개념


지식환경을 스펙으로 표현하면 이해가 더 쉽겠습니다. 스펙(specification )이란 지금까지 공부한 학식과 학력 등 이력의 총체를 말합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김상복 목사는 아세아 연합신학 대학원 리더십 강의에서 지식환경이란 여러 개의 줄로 동아줄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통상 40대까지 만들어지는 지식환경은 고작 30년 정도를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40대까지 만들어진 동아줄의 굵기와 길이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그 동아줄로 항공모함을 묶을 수 있기도 하고 겨우 보트를 묶을 수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얼마나 성실하게 지식환경을 만들어 두었느냐에 따라 지도자의 길이 달라집니다.12) 


축적되어 있는 지식환경은 어떻게 끄집어내어 사용하느냐에 따라 목표와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목표는 꿈이며 소망이고 방향성은 현재의 직업을 말합니다. 지식환경이란 자신의 꿈과 소망 그리고 성취를 위해서 준비해 둔 환경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무기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현재 사회에서는 대학원 이상의 고학력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전공에 대하여 실무가 약하거나 혹은 이론이 약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고학력화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학력의 전공자를 원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전공에 따라 직장 생활을 순탄하게 하고 있다고 해도 후일을 위해 공부를 더해 두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석사는 보통이고 박사는 되어야 전문가로 인정을 받을 정도로 고도화 되어 있습니다.


전공은 실무와 결합하면서 더 나은 발전을 이룹니다. 그 발전의 속도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일생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식환경을 잘 준비해 두었고 성실하게 준비해 두었다면 그것으로 평생을 가지고 가며 발전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자신이 전공한 분야와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분들도 상당합니다. 만약 자신이 전공한 분야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그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전공과목 선택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저 대학입학을 위해 성적에 맞추다보니 할 수 없이 선택한 전공이라면 자신도 불행하고 사회도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고 있으며 고도의 지식을 요구합니다. 어떤 계통에서든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일인자가 되어야 합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전략까지 짜야 할 판입니다. 기계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개발되어 사람의 손을 대신하며 사람의 잔손길이 필요한 농사 같은 일은 고소득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또 반드시 수공업으로만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용이나 이발 등이지요. 문제는 손으로 벌어먹는 일은 수입이 신통치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다 그럴까요?


얼마 전부터 주택가에 블루클럽이라는 신개념의 미용실이 생겼습니다. 대개 여성미용사들이 남성의 머리를 이발해주는 곳인데요, 요금이 5000원입니다. 체인점으로 상당히 많이 생겨나면서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기존의 이발소와 미용실이 위축될 만큼 마케팅 기법도 공격적입니다. 이런 체인점을 처음으로 고안하고 전국에 확산시킨 사람은 누굴까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해 내고 전국에 확산을 시킨 이 사람의 지식환경은 남다릅니다. 곧 지식환경을 경제창출로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부를 몰아가는 사람이지요. 엘빈 토플러가 말한 부의 미래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엘빈 토플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 회장을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빌게이츠라는 천재사업가는 미래는 퍼스날컴퓨터(personal-computer)의 시대가 도래 할 것으로 믿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하여 성공신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가 개발한 윈도우 방식의 운영체제는 전 세계에서 공히 사용하고 있고 이를 통해 엄청난 부를 창출할 수 있었지요.


빌게이츠의 개발동력인 창조력은 그의 지식체계에서 기인되었습니다. 미래를 예측해 내는 정확한 예지력과 그 사업이 반드시 될 수 있는 사업이라는 통찰력은 컴퓨터의 회로처럼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컴퓨터로 쌍방 간에 통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견하고 연결방식인 인터넷 결합방식을 윈도우내에 회로화 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신저 방식을 창조하여 통신방식에 결합하는데 성공합니다.


386컴퓨터에서 486컴퓨터로 넘어가는데 단 1년 밖에 안 걸렸습니다. 486에서 펜티엄으로 넘어가는데 역시 1년 밖에 안 걸렸습니다. 이 동안에 빌게이츠는 윈도우 3.1을 출시하고 이어 윈도우 95와 윈도우 98이어서 윈도우XP를 계발해 냅니다. 윈도우 95에서는 컴퓨터 통신이 가능해졌고 윈도우 98에서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메진저 시대를 열었습니다.


빌게이츠의 지식체계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만나니 세계 제1위의 거부가 탄생됩니다.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지요. 아니 가상공간인 인터넷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말이 더 정확한 말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블루클럽이나 빌게이츠의 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의 의미에서는 사회 전분야 심지어 교회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아이디어를 말이지요. 이제 지식환경이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공간의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2) 공간의 개념


모든 생명체는 활동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동영역 안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번식을 하며 생존합니다. 다른 말로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내 영역의 공간이 있어야 하며 더불어 활동하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공간의 개념은 인문학에서 사용할 때에는 아고라(Agora)의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Agora, 정치를 논하는 광장과 시장을 겸한 독특한 장소. 사도바울이 전도했던 곳으로 주로 철학자들과 정치인이 공론화를 위해 사용했다.   아고라는 공론의 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주장을 펼칠 수 있고 내 주장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협의적인 측면이며 내 주장을 들어 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광의적인 측면입니다. 공간의 개념에는  광의적인 면과 협의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광의적인 면에서의 공간은 사회를 말합니다. 회당이나 교회 등 집회 장소는 소통이 가능한 곳으로 말해지며 청중(인적자원)이라는 구성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설교를 하신 것과 사도바울이 시장 통에서 전도를 한 것 등 아고라는 인적자원이 모여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인적자원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면 경제 혹은 생산이 창출 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전도가 개입이 되면 효과적인 전도의 장이 됩니다. 전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청중이 모여들 수 있는 곳은 곧 전도의 효과가 예견될 수 있는 곳입니다. 효율적인 전도는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해야 하고  그것은 듣던지 말든지 전하는 것이지요. 누가 듣던지 듣게 되어 있습니다.


또 여기에 정치개념을 개입시키면 정치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혹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통해 부를 이루었다고 할 때, 부를 이룬 사람이라면 다음 단계로 정치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를 통해 일정부분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나머지 생을 보람 있게 살고 싶다는 열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열망입니다. 누구나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자선사업가나 장학 사업이나 교육사업, 사회사업 혹은 종교  활동을 통해서 삶의 마지막 부분을 보람으로 장식하고 싶어 합니다. 이는 건전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생각입니다.


문제는 조직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정당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치인이 되려고 한다면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정치인 보다 월등한 조직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 정당에 소속되려고 해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조직이 없다면 정당에서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자신의 조직은 정치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명선이지요.


조직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충성도와 책임감이 얼마나 되느냐가 등급의 관건입니다. 돈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라면 돈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와해될 수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돈으로 만들어진 조직은 가장 열등한 조직입니다.


조직의 건전도와 등급에서 최고의 조직은 단연 교수단 조직입니다.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단 조직을 가지고 있다면 최상급의 조직입니다. 교수들의 책임감과 충성도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자부심과 명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여기에 선후배의 인맥은 물론하고 제자들까지 조직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최상급의 조직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교수단의 지지를 받는 조직이라면 성공한 조직입니다. 반면 최악의 조직은 시민단체를 업고 있는 조직입니다. 이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에 표로 결집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조직인 교수단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려면 교수들의 심장을 움직여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 심장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답은 사상과  철학(종교)입니다. 지성은 사상과 철학으로 움직여집니다. 모든 조직의 상층부에는 사상과 종교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들이 곧 국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수단은 상층부의 조직인 사상과 철학 혹은 사상과 종교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상과 철학으로 움직여집니다.  


아고라에 경제개념을 개입시키면 경제력이 창출될 수 있는 장소라는 개념이 설정됩니다. 이 안에는 모든 직업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만약 직원을 구하는 분과 일자리를 구하는 분이 함께 자리를 했다고 합시다. 기도제목을 나누는 중에, 이런 직원을 구하는 중에 있으니 이런 조건을 가진 분이 구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저는 이런 이런 직장을 구하고 있는 중에 있으니 기도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의 제목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자리에서 서로가 원하는 직원과 일자리가 동시에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아고라의 중요함이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위와 연결하여 아고라의 개념을 협의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협의적으로 말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혹은 관계(인간관계)로 말해집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 들어 주는 사람들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느냐로 표현됩니다. 사회 활동의 영역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영역은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영역의 폭이 넓혀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인맥은 자원의 개념에서 이해되며 자원관리에 따라 영역의 진폭을 넓힐 수 있는 가교가 됩니다. 조직이지요. 일을 하려면 그에 걸 맞는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의 근원은 인맥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맥을 적극 활용하여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경제가 창출되기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몇 명의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결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경제력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물론 광의적으로 사용하든 협의적으로 사용하든, 공간의 개념을 사회활동의 영역으로 표시할 때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화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즉 때가 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회를 정화시켜 주어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는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심각한 우려이며 심히 걱정되는 우려입니다. 거룩한 교회가 세속화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 정화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속화 되지 않기 위해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비 콕스는 "세속화 도시"에서 교회와 사회를 하나의 공간으로 보며 교회가 세속화되면 곧장 세속화 도시로 진입된다고 말합니다. 콕스는 먼저 교회를 공간과 비공간으로 구분하며 교회의 문제에 접근합니다. 교회가 교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라는 공간에 가두워 둠으로 해서 저들만의 교회이며 저들만의 사회를 만듦으로 인해 교회도 세속화 되었고 사회도 세속화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물을 내어주어 사회에 강이 흐르게 해 주어야 하는데 저수지에 가두어 둠으로 세상이 갈해지고 저수지의 물은 썩어가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도시가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고 꼬집습니다. 콕스는 세속화 되고 있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콕스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성전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의 몸과 동일시 하려 한 것은 결국 비공간화의 의도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초대교회의 승천신앙은 교회의 주를 고정화 하거나 공간적으로 제한하려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라는 자신만의 공간에 가두지 말고 인류와 사회를 위해 자유롭게 놓아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13) 


콕스의 주장은 선교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충분히 공감되나 교회의 거룩성의 속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비공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끝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마28:18~20) 이 분부는 전 세계를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라는 명령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교회의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에 성례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도시 안에 장소의 개념으로만 소속되어 있을 뿐 도시 안에 흡수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콕스는 교회를 타락한 도시로 비교하며 타락한 도시에서의 탈출을 말하나 교회는 언제나 도시인들에게 문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타락한 도시인이 빛을 볼 수 있는 곳은 교회의 빛이며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빛의 특성은 밝은 곳에서는 빛나지 않으나 어두운 곳에서는 밝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도시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교회 밖에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교회야 말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콕스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제 지식과 공간을 묶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지식환경을 통해 발생된 미래의 에너지는 공간을 통해 잘 활용되어야 합니다. 이 에너지가 동력이 되어 미래를 창출해 낼 수 있도록 강력하게 구동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복되고 잘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혀 줍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방향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불신자와 비교해 보면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지고 있다는 점이 우세합니다. 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신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지고 있다는 우월입니다. 이는 지식적인 환경이 우세하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공간의 활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간의 활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뜻은 기독교의 사회성이 타 종교의 사회성 보다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성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령에 기초되었습니다. 이 강령에 따라 순종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회성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소금은 맛이요 빛은 빛입니다. 직역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맛있게 만들어 주고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령에 따라 살게 되면 전체사회 구성원의 삶에 맛과 빛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질과 양에서 타문화권이나 타 종교인의 삶과 비교해도 우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우월은 보람으로 나타납니다. 주었다는 보람입니다. 기여했다는 보람도 있지요. 기여하는 것과 주는 것의 차원은 얼마나 기여했고 얼마나 주었느냐는 척량에서 "한 알의 심겨진 밀알"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지식과 공간을 묶는 작업은 철학입니다. 모든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가령 재물에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이 생기는 곳이라면 언제나 달려갑니다. 만약 사람에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하면 즉시 달려갑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은 지식의 체계 및 경륜과 경험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느냐에 대한 우선순위가 매겨지고 우선순위에 따라 동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 특히 전도서는 사람관계에 자신을 투자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전 11:1~3) 바로 이 말씀인데요. 이 말씀의 내용은 바로 사람관리를 위해 재물을 투자해야 할 것을 우선순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유 재물을 은행에 예치해 두는 사람은 보통사람입니다.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은 재투자를 해서 재물을 늘리겠지요. 한국의 부동산을 통한 재투자는 온 세계에 악명이 도도합니다. 주식 투자는 위험 인자를 지니고 있는 투자방식입니다.


위의 말씀을 보면 실상 여유자금으로 사람관리에 투자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네가 먹고 있는 것을 나눠 주라고 교훈합니다. 네 식물이라는 말씀에서 현재시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거든요. 해석자에 따라 각각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내용이지요.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기가 먹는 것, 작은 것이지만 늘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절망적일 때, 죽음을 눈앞에 둔 때에 작은 것을 나누었던 그것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뒤 귀절에 어떤 재앙이 임할지 알지 못함이니 라는 말씀이 제가 해석하는 해석을 도와주는군요.


사람을 잘 만나면 죽을 사람도 삽니다. 좋은 약과 좋은 의사를 만나면 죽을 사람도 삽니다. 허준을 만난 돌림병 환자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허준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욥바의 다비다는 자신의 옷을 지어 입을 때마다 과부들의 옷도 함께 지어 입혔습니다. 룻다에 머물고 있던 사도 베드로를 청해 오기 위해 과부의 아들들 중에서 달리기를 잘하는 장정 세명이 자진해서 룻다까지 달려가서 사도 베드로를 청해 모셔옵니다. 사도베드로를 만난 과부들은 자신들의 속옷까지 내보이며 이런 일을 한 사람이라고 울며 살려 줄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감동은 충격이었습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지요. 그래서 감히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도전합니다. 다락방에 모셔둔 시신 앞에서 사람을 다 내보고 난 뒤에 사도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간구하고 난 뒤에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다비다는 일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사도 베드로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도 베드로가 또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나 다비다에게나 단 한 번의 귀한 사건이었지요. 


결국 지식과 공간의 결합은 우선순위에 따른 철학으로 결합되며 여기에 ""라는 시간적 요소가 결합되면 성공이라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부와 명예를 얻은 성공만이 성공은 아닙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난 것은 엄청난 성공이지요. 따라서 성공을 생각하는 사람,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극적이어야 하며 시간을 잘 관리한다면 미래에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교회의 공간관리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3) 앞문과 뒷문


정통기독교는 앞문을 통해 입문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관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나가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안 보이면 나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나가는 것이 아주 쉽습니다. 반면 이단은 들어가는 문은 쉬우나 나가는 길은 아주 어렵습니다. 보복이 두려워 못 나가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로 나가는 뒷문은 꽉 닫혀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정통교회에서 14만 4천명이 빠져 나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숫자를 보면 낯이 무척 익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명 이라는 숫자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기독교에서는 묵시적인 교훈이다. 기독교에 심판이 다가 온 것이 아니냐 라는 말까지 회자될 정도로 파장이 컸습니다. 교역자의 수는 증가하는 반면에 교인수가 감소한다면 이는 어떤 모양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대체 왜 정통교회를 떠났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일로 하나님의 주권이 중심적으로 설교되고 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중심적으로 설교되고 있느냐의 차이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뜻은 아래와 같이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이 중점적으로 설교되고 있다면 이는 보수주의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설교자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중점적으로 설교되고 있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일면 아무 것도 아닌 비교 같으나 교인에게 적용되어질 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이 설교되어지는 교회라면, 구약의 욥이 생각날 것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실 것이라는 욥의 결론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고난의 자리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설교되어지는 교회라면, 용서와 축복이 강조됩니다. 목숨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이시니 무엇을 아까와 하시겠나 다 주신다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은 다 어디로 가고 나만 홀로 외롭게 남아 이 환란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밀물처럼 덮쳐 온다는 것이지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마태복음 13장 21절에서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이라는 말씀으로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뿌리가 얇기 때문에 강한 햇볕에 뿌리가 말라 버리고 터져서 고사한다는 말씀이지요.


사도 시대에는 물론 환란과 핍박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도들은 고난과 핍박 그리고 환란에 대하여 많이 설교했고 이 문제에 깊은 공을 들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할 것을 주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재림신앙으로 당시의 환란과 핍박 그리고 고난을 이겨냈다는 말입니다. 강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무슨 일을 만나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신앙과 믿음이 강조되었다는 뜻이지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축복이 강조되는 교회는 잠시 동안은 크게 득세를 할 수도 있고 인기도 구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발생하는 교인은 견디어내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해체되면 즉각 떠납니다. 가족 중에 정신병이 생긴 가족이 나오게 되면 떠나갑니다. 고난을 이기도록 훈련되어지지도 교육되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좀 할퀴어 볼까요? 이는 목사와 교인이 타협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교인은 헌금을 열심히 낼 터이니 당신은 나를 알아주고 나를 섬기시요 라는 묵시적인 주문을 했고 목사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타협을 했다는 겁니다. 한번 둘러 보십시오. 아니 목사님 자신부터 살펴보십시오.


죄와 심판에 대해 설교 되어지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까? 지난 주 주보를 가지고 계신 목사님들 한 번 꺼내서 제목과 본문을 살펴보십시오. 실상 설교는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가 설교의 전부입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면 의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일심으로 대망하면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그 외의 내용은 설교가 아니라 가르침이며 교훈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설교가 무엇이냐? 설교의 정의부터 내려놓고 어떤 것이 진정한 설교인지 그리고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느냐의 방법론이 나올 것 아니냐? 정의를 내려 보라 고 하실 분이 많을 줄 압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줄로 말씀하신 내용을 백줄로 번역해 내는 것이 설교라는 이야기이지요.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강대상에 서는 겁니다. 강대상에서 권면하는 것이 아니며 교훈하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실제로 이 부분이 타종교와 기독교의 구분점입니다.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발해지고 있느냐? 가 기독교 설교의 본질입니다. 반면 강단에서 스승 혹은 성현의 교훈이 가르쳐지고 자비와 용서 그리고 덕이 권면되고 있느냐?가 타종교의 설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라 용서하라 축복하라는 명령은 뭐냐? 하고 질문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일이지 설교가 아니라는 말로 답해져야 합니다. 설교와 권면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설교에는 위로의 말씀과 칭찬의 말씀 그리고 축복의 말씀과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한 문장 단위로 다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면서 아버지의 심장을 가지신 분입니다. 질투도 하시고 노여워도 하십니다. 일체의 감정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유머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을 때에 부러 내려 오셔서 인간이 무슨 일에 저렇게 기를 쓰고 열심으로 뭐를 만들고 있는지 살펴보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응징하십니다. 땅 끝까지 번성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때 응징의 벌이 "혼잡"이었습니다. 노여워하시면서 입김으로 불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혼잡케 하셨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위에서 “물 가져와” 하는데 벽돌을 가져다주면서 뭐라고 뭐라고 이상한 말을 하는 데 서로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것으로 바벨탑 공사가 끝장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대충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어 바벨탑을 보고는 고개를 흔들면서 반대쪽으로 흩어졌던 것이지요.


인간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짓고 있던 노역자들에게 물을 먹인 것이지요. 입안이 얼얼하도록 얼음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 판결을 내려 달라는 바리세인들에게 물을 먹이셨습니다. 당시 재판장에게 끌고 가기 전에 장로나 랍비에게 지혜로운 판결을 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로 인정이 되어 있었으니 바리세인들이 시험을 한 것이지요. 아무 판결도 아무 말씀도 없이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셨고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말씀하시네요. 하나 둘 다 떠나고 간음녀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으로 후일을 단속하고 보내 주셨습니다.


대체 땅바닥에 뭐라고 쓰셨는데 서슬이 퍼런 바리세인들이 슬금슬금 내뺐을까요. 수수께끼입니다.


설교는 양면이 동시에 존재하며 동시에 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에발산의 저주와 그리심산의 축복이라는 양쪽 산이 동시에 말씀되어진 것이며 대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판결흉패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正 과 不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라 하신 말씀에서 증명됩니다. 아가페 성경사전에는 우림을 "빛"으로 둠밈을 "어두움"으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14)


슬금슬금 떠나간 교인들. 교회와 설교를 떠나 간 것이지 내가 보기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설교되지 못하면 믿음도 약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대변해 주는 말씀의 대언자로서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와 순종하는 자와 믿음으로 이겨내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축복을 제대로 설교해야 하겠습니다. 


떠난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숨을 쉬게 되었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교회나 카톨릭으로 돌아선 교인들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런데 이제야 숨을 쉬게 되었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노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된 내용일까요. 


떠나간 자와 보낸 자의 차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설교 다음으로 원인을 찾으면 그 원인은 소통과 이해의 문제입니다. 

 

4) 소통과 이해


소통과 이해는 문학의 전문용어 중에 가장 기본적인 어휘입니다. 소통은 작가와 독자의 언어적 교감을 말하며 이해란 작가와 독자와의 감정적 교감을 의미합니다. 언어가 소통이 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교류가 되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낯선 시인들의 낯선 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시인의 주변에 있는 분들은 그 시를 이해합니다. 이는 그 시가 탄생된 배경을 알기 때문입니다.


분명 한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언어가 전달하려고 하는 뜻에 대해서는 교감이 되지 않습니다. 이를 소통의 부재로 말합니다.


소통의 부재는 그 시인의 다른 시를 계속해서 읽으면서 접근할 때, 슬며시 열려집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시인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이해와 동시에 소통이 되며 감정의 교류가 생깁니다. 소통하게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설교자나 성경공부의 교수자 와의 언어적 소통과 감정적 이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 사람의 냄새도 향기로 느껴지고 그 목소리를 들을 때에 감미롭게 들려집니다. 그러나 관계가 나빠지면 꼴도 보기 싫게 되어 있답니다. 아무리 좋고 선한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게 되고 가슴에 동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쑥 들어오는 말이 있지요. 빗대어 내말을 하는 것 같은 그런 말이나 느낌은 쑥쑥 들어옵니다.


따라서 교회의 앞문은 활짝 열어 두고 뒷문은 슬며시 잠가 두어야 하는데요. 이 일이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마음이 틀어진 교인을 붙잡아 두려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갑니다. 그래도 나갈 사람은 나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뒷문을 슬며시 빗장 질러 두고 소통과 이해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 소통과 이해는 평소에 해 두어야 할 일입니다. 자주 초대하시고 자주 들러 주시는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지요.


하지만 적당히 친해져야 합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할 때 필경은 들어 주기가 어려운 청을 하게 마련입니다. 안 들어 주면 나갑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안 듣는 것이 최고의 방책입니다. 만약에 듣게 되면 들어주던지 안 들어 주던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뒷문이 슬며시 열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2. 거룩한 습관


이제는 거룩한 습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절대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거룩하십니다. 이 거룩은 인간이 촉수할 수 있거나 혹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거룩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즉시 죽을 만큼 거룩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 뵙기를 소원했을 때, 당신의 뒷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육체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는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그런데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은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 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민12:6~9)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11) 또 야곱이 증언한 내용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과 안식일의 복을 받았다는 두 가지의 구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모든 피조물보다 거룩하다는 명백한 증거 때문입니다.


인간도 구별을 통해 존엄성과 거룩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거룩하다고 구별합니다. 심지어 목사도 "하나님의 종"으로 구별하여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성경책을 일반책과 구별하여 거룩한 책으로 구별합니다. 인류의 언어 중에 구별, 타부는 거룩과 관련이 있는 용어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거룩한 것은 구별을 통해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신께 나아가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의 양식이 아닙니다. 치성을 드리는 사람도 스스로를 부정에서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습관이 거룩한 습관입니다. 거룩한 습관은 십계명을 지키는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매년 자신의 기도 날을 정해 놓는다거나 일정한 날을 바쳐 봉사하는 날로 정해 놓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어도 한 번 이상 계속 되고 있어야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께서 촉수하셨거나, 만났거나, 하나님의 거룩성을 부여해 주셔야만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계시론(은총론도 함께 갑니다)에 따르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영역에서 이는 특별계시(은총)에 해당됩니다. 


자연계시적인 은총의 거룩은 보편적인 거룩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내용에 주어져 있는 거룩인데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누구나 다 접할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이며 보편적이라고 말합니다.


특별계시적인 은총의 거룩은 믿는 자에게 부여되는 거룩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성경책은 서점에서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성경책을 사서 읽어 보고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들어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해주고 기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렇게 해서 믿는 자가 된 사람을 가리켜 "선택되어 구별을 받은 사람"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선택적 구원을 받은 자로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함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해진 것입니다. 이것을 선택적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선택적 거룩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복으로 안식일의 복입니다. 안식일의 복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이루신 이후로 구약 전체에서 가장 큰 복으로, 신약 전체에서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복으로 말해집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로서의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 12:1)


영혼에 대한 복은 창세기 3장 1절의 "안식일의 복"에서 찾아집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일주일에 하루를 반드시 쉬었습니다. 인류는 6일 동안은 힘써 일을 하고 7일째 되는 날은 반드시 쉽니다. 이러한 풍습은 누가 만들어서 제공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체리듬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 인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도 안식일은 계속 이어져 현재까지 왔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쉬는 날이 곧 그 사람의 안식일입니다. 이 내용은 뒤에 가서 또 나올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1) 구별과 보존의 의의


1) 구별


이제 거룩이라는 뜻의 개념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거룩은 "구별하여 세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혹은 신약에서 선지자나 사도가 된 경위를 보면 "너를 불러 구별하여 세웠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다 는 뜻입니다. 이렇듯 거룩의 개념은 구별이라는 경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구별이지요. 구별이 되어야 거룩의 단계로 발전됩니다. 거룩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사용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세계가 다 거룩한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촉수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목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거룩한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며 거룩하게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이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일체의 것이 거룩하다는 뜻으로 정돈이 되어지는 것이지요.


이제 거룩에 대한 개념이 정돈되었다면 거룩을 잃은 거룩의 반대개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진 인간의 불순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되어진 것이지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는 즉각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킵니다.


2) 보존


불순종으로 인해 주인공이 추방된 에덴동산은 실상 존재가치를 잃었기 때문에 폐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분명한 뜻은 거룩을 잃은 인간은 더 이상 거룩한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선하신 목적으로 창조된 그것들을 보존하신다는 강력한 뜻입니다.  


보존. 보존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중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단어입니다. 보존이란 폐기처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보존의 개념은 본 TDE 성경연구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보존의 개념에서 구원론이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존에는 일반은총의 개념과 특별은총의 개념 전부가 포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지켜주시고 살펴주신다는 논리는 보존의 개념에 압축되어 있는 하나의 디렉토리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더 설명을 하고 뒤에 가서 세밀하게 설명하도록 하지요. 컴퓨터로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은 한개의 하드 안에 창조, 보존, 심판이라는 각각 독립되어 있는 3Ek 3개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3개의 시스템은 완벽하게 호환되며 구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컴퓨터를 운전하고 계십니다. 창조는 과거이고 보존은 현재이며 심판은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미래까지 끌고 가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이 계획과 운용 안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습니다. 곧 오늘의 나와 하나님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 빠져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다고 합시다. 이대로 망가지고 무너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과연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성경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편 40편 1절부터 3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구원을 받았다는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다윗만 구원해 주실까요? 다윗은 과거의 사람이고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현재의 사람이고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믿던지 안 믿던지 간에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다면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평정을 잃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심정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불안과 초조 그리고 자꾸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하다가 일만 꼬이게 만들어서 그 일에서는 구원을 받아도 또 다른 문제거리를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전들은 창조에 대하여 성경만큼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대개의 경전은 성경을 베껴 멋대로 조합했거나 아니면 후대의 대문장가가 교리를 만들어 체택한 것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경전은 지구와 우주의 창조기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기원조차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막연히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혹은 신의 아들이 인간으로 환생되어 세상에 내려와서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어 자손을 번창시켰다. 혹은 천상의 세계를 유한적인 인간의 세계로 옮겼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인류의 기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보존 그리고 심판이라는 3개의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동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질문에도 시원한 답을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답을 내놓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혹세무민에 불과합니다.


보존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생명체에는 본능적 시스템과 생명보호 및 생체복원적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체적인 방어체제(면역력)와 스스로의 치유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찢어지거나 상처를 입으면 면역체제가 가동되어 상처를 통해 침입하는 균을 억제하고 복원시스템은 재빨리 새살을 만들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밥만 먹으면 낫는 상처는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연치유가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유전입니다. 유전은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보존의 방법으로 참 기가 막힌 보존의 방법입니다. 모든 생물은 암수의 구별이 있고 짝짓기를 통해 탄생된 그 자손은 암수의 유전자를 이어갑니다. 자식은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과 일정한 습성 그리고 유전병까지 이어받습니다.


지능지수가 본능보다 우월한 동물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자식의 유전자가 일치되어야 아버지로부터 보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컷이 새끼를 부양하는 경우에는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암컷이 새끼를 부양하는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지요.


붕어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의 얼굴이 자식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얼굴을 통해서 더욱 자식을 위해 헌신하게 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에 더욱 애착과 사랑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식의 평생을 책임져 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철저히 보존됩니다. 그 모양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2) 죄의 문제와 구원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세상은 세상의 시작입니다. 타락과 죄가 있는 곳, 추위와 더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잡초와 엉겅퀴가 창궐하는 환경, 인간에게는 생노병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곳. 반쯤은 지옥 같은 환경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자식을 번창시키며 지혜로 만물을 정복하고 땅을 정복합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던 직접적인 교통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제사를 통해 거룩을 회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물과 구별된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상위개념에서 인류의 시조를 구별하셨다는 구별에 대한 출발은 하위 개념으로 가서는 나도 구별함을 받았는가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이는 역으로 과연 내가 구별함을 받은 존재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또 다른 증명의 근거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교통상대자로 구별함을 입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증명이 되는 것이지요.


좀 복잡하게 설명을 했습니다만 구별은 신학의 출발이라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설명을 해야 합니다. 


거룩은 두 가지 면에서 경계점을 갖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구별에 의한 거룩입니다. 다음으로는 거룩함을 입은 내가 구별함으로 거룩성을 부여하는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 경계점이 경건의 시작이며 출발점입니다. 실상의 신학을 말하지요.


부연 설명하면, 존재자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구별되면 구별된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만백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만이 선민으로 구별함을 받았습니다. 즉시 거룩한 백성이며 거룩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나라로 구별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룩성의 유지라는 명제가 따라 붙습니다. 거룩성의 유지는 죄의 문제와 부정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함으로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습니다. 


1) 죄


죄는 피의 제사로 사함 받도록 율법화 되어 있습니다. 죄사함에 대한 제사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국가와 국민의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해에 국민의 죄가 관영하였거나 혹은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국민의 죄를 심판하실 때에는 대제사장부터 심판하셨습니다.


그해에 대제사장으로 선출된 대제사장은 스스로를 구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날까지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일체의 부정과 단절하고 심지어 침묵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혹시라도 입술로 죄를 범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을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스스로를 구별하여 거룩성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일정기간 거룩한 금욕생활을 통해 일체의 죄와 부정에서 단절되어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거룩한 날이 되면 거룩한 곳에서 수소를 잡고 수소의 피를 금양푼에 담아 방울이 달린 밧줄을 발목에 차고 들어가서 지성소에 피를 뿌리고 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예식을 통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피와 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에는 지성소에 모신 법궤에서 불이 나와 대제사장을 살랐고 방울 소리는 멈춥니다.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사장들은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밧줄을 당겨 대제사장의 시신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제사상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들이 스스로의 부정과 죄가 없었는지에 대해 회개와 함께 책임이 물어졌습니다. 만약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에서 책임요소가 발견되지 않으면 다음으로는 왕과 귀족들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때에는 왕을 비롯하여 귀족 그리고 온 국민이 금식하며 회개의 날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식 중에 제비를 뽑아 대제사장을 선출하고 다시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번째 드린 제사를 거절한 역사는 없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단순한 죄에 대하여는 제사를 통해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죄에 악이 더해진 범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심판하셨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밧세바 와의 동침사건은 단순한 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임신이 되고 충신 우리아를 계략으로 죽인 악에 대하여는 심판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범죄의 씨앗으로 잉태했던 아이는 죽고 다윗의 집은 자식이 아비를 치고, 형제와 형제가 칼로 치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다윗의 가문은 칼이 떠나지 않는 불운한 가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 중에 3만 명이 궤질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3만 명, 참 억울한 죽음입니다. 다윗의 죄로 인해 그토록 많은 백성을 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야가 죽었던 그 전투에서 패했다면 3만 명 이상이 적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블레셋과 벌어진 이 전투는 블레셋의 생존이 걸려 있는 전투였습니다. 무려 3차례에 걸쳐 대접전이 있었고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야가 죽임을 당하고 블레셋은 대패하고 블레셋의 역사는 종말을 기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해 주셨던 전투였으며 전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윗과 밧세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심히 미워하십니다.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 대신에 다른 생명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짐승의 생명이 대신 바쳐져야 합니다. 그토록 죄를 미워하십니다.


이 문제는 인류가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로 결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려 주신 피의 공로로 신약 이후의 인류는 다시는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구약만 믿고 있는 유대인은 본토인이 아니라도 어디에서든지 유월절 제사만큼은 반드시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단번의 제사로 사함을 받지 못할 죄는 없으나, 성령을 모독하거나 훼방하거나 성령을 거스린 죄 만큼은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을 모독하거나 성령을 훼방하거나 거스린 죄에 대하여 심각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범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범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뜻을 변개하는 행위자.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으로 오심과 부활 승천과 보혈의 공로를 부정하는 자.


세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자.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부흥 혹은 기적으로 나타난 역사를 부정하고 귀신의 힘 혹은 다른 힘의 역사로 대치시켜 폄하시키는 사악한 시도.


네째는, 교회의 고유한 사역에 대한 부정과 훼방 그리고 목사의 고유사역에 대한 훼방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현재 여러 가지 의견과 논쟁이 많이 있는데요. 근본적으로 교회와 목사는 누가 세웠는가?에 대한 답만 나오면 논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성령께서 불러 세우신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비록 불법을 범한 목회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셨음이 확실함으로 불법을 행한 목회자가 베푼 세례와 성례는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이어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베푼 것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카르타고 공의회(411년)를 확정되었고 도나투스파는  정죄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성령의 훼방죄가 가장 두려운 죄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예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는 모든 것에 촉수를 금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이나 목사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다만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살펴봅니다.


창세기서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지요. 여기에 안식일의 복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을 창조하여 세우신 일 보다 인간을 구별하여 세우신 일이 더 특별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한 목적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요. 안식일의 복은 영혼을 위해 주신 복이며 영원까지 이어지는 복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 주셨으면 합니다.  


2) 부정


不淨은 깨끗한 물로 씻으면 淨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죄도 씻는 것이며 부정도 씻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는 내가 하는 일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준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죄는 피로 씻으면 거룩해 집니다. 부정은 물로 씻으면 거룩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법으로 그리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교인이 되겠다는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인은 6일 동안 죄를 있는대로 져놓고 주일에 교회에 가서 회개기도를 하고 다시 6일 동안 죄를 지는 행위를 하는데 나는 그게 싫어서 교회에 안 간다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는 그렇지요. 그렇지만 교인은 죄를 지으면 회개기도를 하면 된다는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대책도 없이 사는 분은 대체 어쩝니까?


칼빈은 거룩에 대하여 말하기를 임종시에 최종적인 거룩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은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실상 죄와 연결되어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죄와 연결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마치 사자를 잠시 잠재운 것과 같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는 여전히 백수의 제왕으로 흉폭성을 드러낸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의 죄나 다 사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율법의 제도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죄나 허물로 인하여 거룩성을 훼손했을 때에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법을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구별과 거룩은 함께 가며 거룩함을 보존해 주시기 위해 죄의 문제와 부정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제사법을 제정해 주신 것이지요. 여기에 단번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전 인류에게 내려주신 가장 강력한 복음이며, 미완의 제사법이 완성된 제사법으로 온전해졌음을 의미합니다.


1) 네이버 백과사전, 테오그니스 항목.


2) 위 사전, 니힐리즘 항목.


3)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3권",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6쇄), P.475.


4) 위의 책, P.476.  


5)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


6) 홀로코스트란 학살을 뜻하나 고유명사로 쓸 때에는 유대인의 학살을 가리킨다.


7) 안병무, "전환기의 신앙" (서울:태극출판사, 1974), 현대인의 사상 11권, P.27.


8) 윤성범 [尹聖範, 1916~1980] 호 해천(海天). 경상북도 울진 출생. 1934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를 나와, 1941년 일본에 유학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學校] 신학부를 졸업하고 1945년에 목사가 되었다. 8·15광복 후인 1946년 감리교신학교 교수가 되어 6·25전쟁을 겪고 나서, 1953년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칼학원을 거쳐, 1954년 바젤대학교에 입학, K.바르트에게서 사사하고, 1960년 졸업과 동시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제종교사학회 실행위원에 피선되었다. 귀국 후, 신학의 토착화(土着化) 내지 한국적 신학을 주창하며 바르트의 제자답게, 삼위일체론적·존재론적인 신학방법론을 구사하였다.


9) 네이버 백과사전, 해방신학 항목.


10) 네이버 백과 사전, 민중신학 항목.


11) 한국일보, 2000년1월28일 자.


12) 김상복, 리더십 강의 , 1993년 봄학기,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13) 하비 콕스,  "세속도시"구덕관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3), p.68.


14) 아가페 성경사전, "우림과 둠밈" (서울:아가페 출판사, 1991), p.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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