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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빛낸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

도제조 안형식 2023. 7. 12. 10:27

한강의 기적을 빛낸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

(고속도로가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업적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 이 논문은 한국도로공사 40주년기념 학술논문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논문임. (2009.2.13)

 

 

                      목차

 

서론

    1.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라는 의미

    2.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초석이라는 의미

    3. 본 논문의 연구방향

 

1장.  고속도로의 발전사

  1절. 경부고속도로 프로젝트의 태동

    1. 꿈과 상상으로 만든 설계도

    2. 꿈과 상상력은 미래의 동력

    3. 아우토반을 벤치마킹한 경부고속도로

    4. 독일 방문으로 얻어 낸 소득 

  2절. 경인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의 시험판

  3절.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신화

 

2장. 한국 경제의 동맥인 고속도로

  1절. 천지개벽

    1. 신화창조

    2. 한국적 공사방식

    3. 시간과의 사투

  2절. 국가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초과달성에 기여한 공로

    1. 달라진 경제지도

    2. 높아진 국민적 자긍심

    3. 건설단가의 신기원

 

3장.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

  1절. 문화의 발전

    1.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2.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2절. 교육의 발전

    1. 서울대학과 수도권 대학의 경계를 허문 경부고속도로 

    2. 한국 교육의 발전은 세계적

  3절. 명절문화 탄생

    1. 명절문화 탄생배경

    2. 명절문화는 효 문화로 정착

  4절. 여가 문화의 풍요로움

 

4장.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가는 고속도로

  1절 한강의 기적의 견인차인 고속도로와 포항제철

  2절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한국의 고속도로

 

결론

 

참고문헌  

 

 

 

 

서론

 

영웅 율리어스 시이저는 로마를 통일하고 난 뒤에 세상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총 8만㎞의 도로를 건설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육로 개척에 있어서도 완벽한 승리자였다. 로마가 세계를 재패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육로개척의 완성에 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후에 한국에도 동일한 의미의 어록이 탄생했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로 통한다.는 어록의 탄생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 함의되어 있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선진국 문화권으로의 진입이자 대한민국의 총체적 발전을 뜻한다. 짚어 보자.

 

1.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라는 의미

 

먼저는 선진국형 문화권의 진입이다. 1970년 7월 7일, 칠석날을 상징하는 이 날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까마귀 다리에 비견되는 경부고속도로가 탄생했다. 서울의 견우와 부산의 직녀는 6시간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에서 재회했다. 12시간 동안이나 지린내가 풍기는 열차 여행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여행자에게는 자유의 선언이며 동시에 후진국형 열차문화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천지개벽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식에 참석한 귀빈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기원했다.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는 여기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새롭게 써지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총 공사를 지휘했던 윤영호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축 테이프를 자르면서 벅찬 감동으로 소리쳐 울었다고 고백했다. 윤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역사적인 고속도로 그 현장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책의 제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언급한 것은 윤 장군의 인생에 있어서 경부고속도로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1]

 

실상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대한민국의 경사일 뿐 아니라 세계의 건축, 토목계의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에서 한국의 경부고속도로는 최단 시간에 최장의 고속도로 완공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는 한국의 건축과 토목분야의 기술력이 세계 수준으로 향상되었음을 입증한다.

 

세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기원 전(B.C)의 역사와 기원 후(A.D)의 역사로 나뉘고, 한국의 역사는 고속도로 이전의 역사(근대사)와 이후의 역사(현대사)로 나뉜다. 고속도로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구분 짓는 경계점이며 한국의 현대사는 실상 고속도로의 완공시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경부고속도로가 가지고 있는 위상은 사고의 범위를 초월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인해 경상북도의 대표적 오지마을인 추풍령, 황간, 약목, 신암 등의 오지마을이 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특산품 상권 지역으로 부상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산골 오지마을에 천지가 개벽하는 정도의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산간 오지 마을은 오히려 인기 높은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지역 특산품을 생산하는 생산도시로 거듭나는 동시에 일약 문화도시로 부상 했다. 만약 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2.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초석이라는 의미

 

돌이켜 보자.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한반도를 유린한 육이오 동란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졌다. 전쟁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한반도는 이를 복구하는 데에 만 5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한국이 개발도상국가로 진입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2]

 

전란 후 가장 절박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특히 맨몸으로 월남한 피난민들과 함께 전란을 겪은 폐허 더미에서 한국민 자력으로는 경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향해 눈물로 지원을 호소했다. 세계 각국은 6.25 동란의 참상에 대한 보도와 이승만 대통령의 눈물어린 호소를 타전했다. 세계 각국은 구호품, 의약품, 식료품을 보내왔다.

 

한국이 세계로부터 구호품으로 연명하며 국토재건에 온 힘을 다한 결과 13년이 지난 1966년의 국민총생산은 125달러(1962년 83달러)로 성장했으나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 되고 난 이후부터 한국은 급속한 발전으로 고도의 성장을 이뤄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이듬 해인 1971년 한 해 동안에 무려 10억 6760만 달러가 수출되었다.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치는 7억 달러였다. 이를 무려 50% 이상을 초과 달성한 셈이다. 발전의 속도와 성장의 폭이 워낙 커서 세계는 기적으로 표현했다.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과 필적할 만한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했다. 구체적인 통계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경상가격 기준으로 살펴보면, 1966년 말의 37억 달러에서 1991년 말의 292억 달러로 25년 간 7배 가까이 늘어났다. 같은 기간 국민 1인당 총생산은 125달러에서 6,757달러로 53배나 격증하였다. 수출규모는 1966년 말의 2억 5천만 달러에서 1991년 말의 718억 7천만 달러로 286배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통해 단 하루 만에 고객이 원하는 장소로 배달되었다. 인천항만을 통해 수입된 원목은 수도권의 가구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제작되어 고속도로를 통해 부산 항만에 대기하고 있는 콘테이너에 실려 수출되었다. 서울외곽에 있던 가발공장에서 완성된 가발은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항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기에 수출의 규모가 286배나 폭증할 수 있었다.    

 

3. 본 논문의 연구방향

 

본 논문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한국이 선진국을 넘볼 수 있는 정도의 문화국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고 기술했다. 한국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발전에 있어서 고속도로는 동맥이자 골격을 이루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척추에 비견된다. 모든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 고속도로가 기여한 공로는 가히 절대적이다. 한강의 기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고속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한국의 현대사 발전에 가장 큰 틀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 정직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겨우 역사학자들에 의해 근, 현대사에 몇 줄 정도의 글로 평가된 것이 전부이다.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로서 경부고속도로가 박정희의 잔재물로 처리된 점과 둘째로는 지정학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고속도로는 특성상 천재지변에 노출되어 있고 대형사고의 위험이 상존한다. 특히 바캉스 계절과 명절 시에 주차장화 되는 한국적 고속도로의 특성은 고속도로의 수많은 공적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인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견인한 고속도로의 현저한 공적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고속철도의 위상은 극대화된 반면, 한반도의 동맥인 고속도로의 위상은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심히 불만스럽다. 고속도로에 대한 평가는 경제적, 역사적,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되어져야 하고 정직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재적 발전은 고속도로가 근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고는 정치적, 지정학적 원인에 의해 저평가 되어 있는 고속도로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하고 고속도로의 이면에 함의되어 있는 문화적 의의를 석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전개될 논지의 방향은 만하임 주의적 석의 방식을 채택했다. 만하임(K.Mannheim, 1893.3.27~1947.1.9)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기와 다른 정치적, 학문적, 사상적 성향에 대한 변증으로 보며 학문적(지식사회학)인 입장으로 접근하며 해석했다. 통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채용하고 있는 해석방식이며 용어상으로는 비평적 양식으로 구분한다.[3]

 

반면, 마르크스(K.Max, 1818.5.5~1883.3.14)는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존재성을 독립적 존재로 인식하면서 현실의 삶에 대한 불만 (그것이 계급적 사회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내재된 불만)을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의 논리로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상으로는 비판적 방식이다.[4]

 

본 논문의 한계는 순수한 학문적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 혹은 평가로 비쳐질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속도로 발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의 개연성은 분리될 수 없도록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박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과 연계되면서 전국의 도로망은 고속도로와 연계 구도로 건설되었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기도 한 고속도로에 대한 평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빼고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 내용에 객관적인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덧붙여 본 연구자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최대 난공사로 불렸던 당재 터널공사의 현장인 옥천이 고향이다. 동이휴게소와 직선거리로 1km도 되지 않는 평산리에 적을 두고 있다. 사촌들은 마의 구간으로 불렸던 당재 터널 공사에서 건설역군으로 일을 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고 사촌들은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인건비를 저축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사촌들은 밭을 한 뙤기씩 장만하여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사촌인 하영이와 영철이는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를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1장.  고속도로의 발전사

 

박정희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2년~1966년)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곧바로 인천항과 영등포(신월동)를 연결하는 총 연장 23.9km에 달하는 경인 고속도로 공사에 착공했다. 재원은 일본정상회담으로 인한 보상금 6억 달러와 월남파병으로 파월장병들이 미국으로부터 지급받은 달러, 독일방문 기간 중에 확보된 차관으로 충당했다. 

 

독일 방문 기간 중 에르하르트 독일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꼭 잡고 통일이 되는 날까지 경제 발전에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한국과 박 대통령에 대해 호의를 품은 에르하르트는 서독의 5대 재벌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이들로 하여금 대한 차관단을 결성토록 도와주었다. 이로 인해 재정 차관 1,350만 달러, 상업 차관 2,625만 달러를 확보했다. 당시 외화 보유고가 1억 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4천만 달러의 독일 차관은 실로 큰 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독일 차관은 그 후 우리나라에 외자 도입의 길을 열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5]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한 경인고속도로는 우여곡절 끝에 2년 만에 완공되었다. 1969년 4월 12일 고속버스 20대가 경인 고속도로 위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1년 동안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얻어진 노하우와 기술력과 안전도에 있어 자신감을 얻은 40대의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2월 1일, 총연장 417.4㎞의 왕복 4차선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착공했다. 착공 후, 2년 5개월인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10년 만에 고속도로 1일 통행료 1억 원을 돌파하는 대 기록을 세웠다. [6]

 

1절. 경부고속도로 프로젝트의 태동

 

1. 꿈과 상상으로 만든 설계도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꿈으로 디자인되고 상상력에 의해 설계되었다. 겨우 125달러에 달하는 국민소득의 규모로서 10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한 고속도로를 거론한다는 것은 비난의 대상을 넘어 죄악시 되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임기 중에 완공하겠다고 공포했다. 당장에 반대여론이 불일 듯 일어났다. 정치적 반대 여론의 중심요제는 국가 재정파탄을 불러들일 공약, 부자를 위한 유람도로였으며 연일 정치공세가 이어졌다.

 

이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가에 대해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은 회고에서 2년 반 동안의 연구를 끝낸 박정희는 67년 5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만 있고, 진행상황은 전혀 없이 5개월여가 흐른 10월 하순 어느 날 대통령은 늦어도 내년 초에는 착공한다.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회고했다.[7]

 

2. 꿈과 상상력은 미래의 동력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은 꿈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행복과 경제를 가져다 준다고 역설했다. 덴마크의 미래학자이자 드림컴퍼니의 최고상상력책임자(CIO)롤프 옌센은 미래는 꿈과 감성이 있는 스토밍의 시대로 정의했다. 스토밍이란 꿈과 감성이 실려 있는 스토리의 연속적인 전개를 뜻한다. 미래는 꿈과 감성을 파는 시대인 스토리 시대이며 스토리가 있어야만 경제가 창출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스토밍이라 했다.

 

옌센은 지난 2일 제주 전국경제인연합회 하계 포럼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정보화시대 이후의 미래사회에는 품질보다는 꿈과 감성을 파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국가와 기업ㆍ개인 모두 경쟁력을 가지려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우러진 이야기(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옌센은 나이키가 다른 상품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은 품질 외에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보화시대 이후는 꿈의 사회가 될 것이며, 꿈의 사회에서는 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GDP) 지수를 대체하게 될 것으로 말했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주거 문화와 음식 등 모든 면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토리로 경제를 창출해 내는 방법으로 브레인 스토밍만으로는 고객을 움직일 수 없으며 소비자들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쓰는 하트 스토밍이 비결이라고 역설했다. [8]

한국의 고속도로는 꿈으로 디자인 되었고 상상력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린 그림대로 완성되어 한국의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의 여력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고속도로는 완공 시까지 숱한 화제를 낳았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기획하고 공사에 참여한 주인공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꿈과 감성이 어우러져 있는 스토리들이며 상상력으로 디자인 되었다는 골자를 담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대한민국 전체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프로젝트였다. 만약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현재로 갈 수밖에 없다는 답답함도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꿈의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무려 2년 반 동안 공부하며 고민한 끝에 경부고속도로를 디자인했다. 

 

3. 독일의 아우토반을 벤치마킹한 경부고속도로

 

청와대 비서실의 저자 김진은,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지칭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내노라하는 건설관계자와 경제학자등이 대역사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朴正熙의 작품이었다. 구상은 64년 말 서독방문길에서 그려졌는데, 朴正熙는 이때 중요한 체험을 했다. 서독의 고속도로(아우토반)와 라인강 운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라고 서술했다. [9]

 

"朴대통령이 현대식 고속도로를 처음 본 것은 54년 미국의 포병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였어요. 그러나 당시는 한 여행객의 입장이었겠지요. 64년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탁월한 기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합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가 대통령에게 '나는 아우토반에 진입하거나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 나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 도로에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한 말을 10여 년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어요."[10]

 

이 장면에 대해 백영훈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朴正熙는 국빈용 벤츠승용차에 몸을 싣고 서독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시속 1백60km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의 사물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응시하던 朴正熙는 동승한 서독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두서는 없었지만 계획단계에서 건설 관리에 이르기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20km구간을 왕복하며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 시설 등은 물론이고 앞뒤 선형까지, 아우토반의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했다. 줄곧 곁에 서있었던 나는 대통령이 큰 결심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11]

 

백영훈의 예상대로 朴正熙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호되게 매달렸다. 각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관한 기록을 밤늦도록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연구보고서를 제출받기도 했다. 국토를 개조해서라도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패기만만한 40대 대통령의 야망이었다.

 

현대건설 사장 鄭周永은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각하께서 밤늦게 불러 들어가 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 가지 안을 제시해 의견을 묻곤 했다."[12]

4. 독일 방문으로 얻어 낸 소득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파독 간호사와 파독 광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해야 했다. 지하 1000m의 지하갱도에서 악전고투를 하는 광부들의 처참함을 보아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의 시골병원에서 시체를 닦고 환자들의 피고름으로 범벅되어 있는 시트와 옷가지를 빨고 피고름을 받아 내던 어린 간호사들의 통곡과 외침은 우리도 국력을 길러 속히 선진국이 되게 해 달라는 절규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한국을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시도 그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13]

 

김충배 전 육사교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우리처럼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 명이나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回生)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戰後)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14]

 

2절. 경인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의 시험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경부고속도로에 적용할 실험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반공사와 공기 등에 대한 기술력의 문제와 키로미터 당 얼마의 건설비가 소요되는가의 경비 문제를 산출하기 위해서였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 등이 경부고속도로건설의 기초자료로 사용될 것이었다.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하여 1969년 4월 12일 개통되어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인천 인터체인지)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신월 인터체인지)에 이르는 고속도로로 길이 23.9, 너비 20.4m, 왕복68차선으로 완공되었다. 왕복6차선은 10.39, 왕복8차선은 13.5㎞이다. 경인고속도로는 3개 도를 관통하고 있다. 이중 서울특별시는 0.5, 인천광역시 17.59, 경기도는 5.8㎞를 점하고 있다.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하여 1968년 12월 21일에 가좌 인터체인지까지 23.4km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되었고, 1969년 7월 21일 가좌에서 인천 인터체인지까지 6km 구간이 개통되었다. 1969년 4월 12일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로 지정되었고, 2002년 5월 1일 변경된 새로운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고속국도 제2호에서 제120호로 바뀌었다.[15]

 

이렇게 축적된 고속도로의 건설능력은 곧장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연결되었다. 12월15일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 구성되어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구체화 되었다. 1차 공사구간인 서울~수원은 2만5천분의 1 지도에, 이와는 별도로 서울~부산까지는 5만분의 1과 2만5천분의 1 지도를 여러 장 연결해 등고선별로 색칠을 했다. 5일 만에 등고선 채색작업을 끝낸 이들은 노선작업에 나섰다. 단 하나의 기준, 최소 공사비를 위해 고지는 가급적 피해 이리저리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그리고는 수원까지 발로 답사를 해야 했다. 헬기를 이용한 공중답사는 물론 지프를 타고 현장 확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朴正熙가 이들에게 현장답사를 지시한 것이었다.

 

3절.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신화

 

마침내 68년 2월1일 4백28km 대장정의 첫 삽질이 시작됐다. 공사는 글자 그대로 불도저식이었다.1공구 공사를 하며, 2공구 3공구 설계를 해나가는 식이었다. "빨리, 빨리"는 예정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당기기 위한 구호였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준공되었다. 개통된 뒤에는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이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되었다. 기존의 철도·국도와의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이 마침내 연결되었다.

 

이후 경수지역의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1989년 10월부터 1992년 7월까지 양재수원 간 18.5㎞를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였고, 1991년 5월부터 1993년 7월까지 대전세계박람회를 지원하기 위해 수원천안 간 51.5 구간을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고, 천안남이 간 40.3㎞를 왕복6차선으로, 남이청원 간 8.3㎞를 왕복8차선으로 확장하였다. 또한 1992년 5월부터 1995년까지 반포서초 간 2.2 구간이 왕복6차선으로 확장되었고, 서초양재 간 3 구간도 왕복8차선으로 확장공사를 완료하였다.[16]

 

마침내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의 내용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서울에서 부산 간 4차선 총 428, 총 공사비 430억 원, 공사기간 2년 5개월, 동원 인력 9백 만 명, 희생자 77명. 국가적 역량이 총 집결된 경부고속도로는 힘차게 뛰어오른 경제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17]

 

2장. 한국 경제의 동맥인 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및 경부고속도로의 기조는 위치상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에 위치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의 기본 골자는 전력·석탄의 에너지원과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을 근간으로 경제개발의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한 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을 극대화 시켜 식량 자급자족에 주력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출 증대와 기술력 향상을 위한 양동작전이 구사되었다. 이 계획은 최고 6%대의 경제성장률을 목표했으나 결과는 7.8%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이로 인해 국민 1인당 총생산(GNP)는 83달러에서 125달러로 증가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초과달성으로 이해 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운송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산업의 지방 분산화 및 단거리 수송의 기동성이 요구됨에 따라 큰 골격의 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제2차 및 3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인 1967~76년의 10년 동안에는 큰 골격의 경인, 경부 고속도로 공사와 진입로, 교차로 국도와의  연결 도로 등의 건설에 집중되었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의 건설을 시발로 경부·울산·호남·영동·남해·동해·구마·88올림픽·중부·중앙·서해안·서울외곽순환 고속도로 등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2002년까지 완공된 고속도로의 현황을 보면 전국 22개 고속도로에 총연장은 2,786km이다. 한국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국도이며, 부산 등 일부 대도시에는 시내 통과를 원활히 하기 위한 도시고속도로가 있다. 보통 왕복 4차선으로 구성되었고 차선의 너비 3.6, 경제속도 80~120km이며, 구간에는 30~50km 간격으로 휴게소·주유소·소규모의 정비소 등을 갖춘 부대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8]

 

1절. 천지개벽

 

1. 신화창조

 

KBS는 다큐물 신화창조의 비밀 84 국토의 대동맥을 건설하라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60년대 후반, 독일의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설립됐다. 수출중심의 공업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수송수단의 개발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우리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최저 비용으로 최단 기간 내에 완공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방식은 '선개통 후보완' 방식이다.

 

기반공사는 최소 공사비를 염두에 두고 갓길의 폭을 줄이고 도로의 하상을 낮췄다. 공사에 투입될 중장비는 폐차 직전의 낡은 미군 장비를 사용했다. 현대의 김영주상무는 기계를 수리하는 대신 개조하는 방법으로 선회했다. 개조 기술을 통해 기술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필요한 장비를 짜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는 장비를 자체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2. 한국적 공사방식

 

하루 18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으로도 공기를 맞출 수가 없었다. 한 겨울에도 얼어버린 땅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고, 각 단계의 공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안정화시키기 위한 시간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폭우와 홍수는 공사현장과 인부들을 덮쳤고, 낙반사고도 이어졌다. 하지만 멈춰 설 시간도,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공사는 강행되어야만 했다.

 

땀과 눈물, 뼈를 묻으며 닦아온 길. 마지막으로 당재 터널만 완공시키면 꿈에 그리던 전 구간 개통이 실현된다. 차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첩첩 산중의 공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험난한 산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개통 예정일을 맞추기 위해선 턱없이 모자란 시간, 특단이 필요했다. 

 

개통 예정일은 점점 다가왔지만 공사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결국 공사기간, 적은 예산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공사 기간에 맞추기 위해 조강시멘트 사용과 시멘트의 육로 수송, 새로운 공사기법까지 더해졌다.

 

드디어 70년 7월 7일, 대한민국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었고 사람들의 생활도 변했다. 자동차 문화가 생겨나고 물류 혁명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희생이 이뤄낸 값진 결실이었다. 대한민국은 공업국가로 가기 위한 출발선을 뒤로 한 채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19]

 

3. 시간과의 사투

 

"10개월 만에 수원까지 뚫어 12월21일 개통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朱源장관이 대통령에게 연말까지는 오산까지 개통하겠다고 보고했다. 오산 인터체인지 공사가 50%밖에 진행이 안 돼 있는 상태인데, 장관이 일종의 충성발언을 한 것이었다. 큰일 났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워가며 포장작업을 하는데 땅이 얼어 도저히 작업이 안됐다. 그래서 볏짚을 깐 뒤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도 보고, 대형 버너 수십 개를 트럭 꽁무니에 매단 뒤 끌고 다녀도 보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녹을 리가 있나. 할 수 없이 그냥 포장을 했다. 개통식이 열리기 3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차선 도색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20]

 

마의 구간으로 불렸던 옥천구간인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지형적인 여건이 워낙 험해 공사 진척이 매우 더뎠다. 지형적인 조건이 워낙 열악하여 노선 선정 당시 최후까지 확정하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로 공중 답사하던 중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정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장비 진입로를 설치하는 데만도 여러 달이 걸렸다. 일부에서는 장비를 공중으로 운반하자는 묘안이 나올 정도였다. 더구나 대형 낙반사고가 발생해 희생자가 늘어나자 현장에서 사람들이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임금을 배 이상 올렸는데도 사람을 구할 수 없었던 최대 난공사였다. [21]

 

2절. 국가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초과달성에 기여한 공로

 

1. 달라진 경제지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자 한국의 경제지도가 달라졌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난 이후인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의 목표는 중화학공업화 추진과 안정적 균형이었다. 이 기간에는 착수 직전인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에 의한 국제경제 질서의 혼란, 1973년 10월의 석유파동 등으로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었으나, 외자도입의 급증,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동 건설경기 등으로 난국을 극복하여 기간 중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높은 성장률은 수출증대와 고용창출효과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한국의 경부고속도로가 단기간 내에 최장의 길이로 개통되고 난 뒤에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경부 고속도로 개통 이후 1억 불 수출을 달성한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해외가 주목했다. 1964년에 힘겹게 1억 달러를 초과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966년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근 2배나 되는 2억 5천만 달러를 수출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필두로 해외자본이 한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공업에 머물렀던 한국의 산업이 중공업으로 전이되면서 1970년에 축적된 기술력과 수출력을 바탕으로 한국은 성장동력이 우수한 국가로 주목을 받았고 1988년 세계 올림픽까지 유치하여 올림픽개최국으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2. 높아진 국민적 자긍심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이를 기반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구호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전국의 군과 구는 각 마을의 성공사례를 수집하고 비교하여 성공양식을 추출하여 비교했다. 비교 평가로 꼴지가 된 시, 도, 군, 구, 동, 면은 불명예를 씻기 위해 성공 사례를 찾아 경부고속도로 위를 누볐다. 땅 끝 마을인 해남으로부터 서울의 천호동까지 전 국토가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전 세계에서 안 된다고 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 한국인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인식이 전 국민에게 박혔다.   

 

국가적 지원은 시멘트를 공급해 주는 것과 지붕개량에 필요한 약간의 지원이 전부였으나 전국은 새마을 운동의 열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새마을 운동에 대해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行政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적 기조로서 근면·자조·협동을 설정하게 되고 그 추진 방법으로서는 우수한 지도자의 헌신적 봉사를 기조로 하고 동시에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지원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22]

 

3. 건설단가의 신기원

 

기네스북에 오른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당시의 건설비용이 1km당 1억 원에 불과한 최저비용으로 건설되었다. 최근 개통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무려 350억 원에 이른다. 2007년 현재 전국 고속도로의 평균 건설단가는 269억 원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며 유가상승과 건설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현실적인 건설단가는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CNB 뉴스의 차영환 기자는,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까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우리 국민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정도이며, 교통사고 비용 절감 등 경제적 편익 또한 연간 13조 5천 5백억 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경제적 가치가 연간 13조 5천 5백억 원에 이른다는 의미는 만약 고속도로 건설이 안 되었거나 늦춰졌을 경우 그만한 가치가 죽어 있었을 것이라는 뜻과 함께 간다.

 

3장.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

 

한국의 근, 현대사에서 고속도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인체의 동맥과 비견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화는 고속도로의 발전에 따라 급속히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

 

고속도로는 대한민국 전체를 발전시키는데 충분히 기여했다. 이중 교육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발전은 따로 떼어 살펴보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1절.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

 

1.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비문

 

12월 8일 추풍령 고개에는 하나의 탑이 세워졌다. 준공 기념탑이었다. 그 탑 전면과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울~부산간 고속 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   희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 도로 건설 사상에 있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   림 [24]

 

2.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전국이 일일 생활권 안에 들어가게 되자 전국의 문화도 일일 생활권역 안으로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특정양식의 삶의 모형들과 다양한 삶의 양식들이 전국망으로 소개되면서 각지의 특색 있는 문화권이 비교 발전되었다. 낙후지역은 상대적 우위에 있는 문화권을 벤치마킹하여 발전의 모델로 삼았고 경제적 우위에 있는 문화권은 전통양식의 문화권에 대해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윤명철은 바닷가는 문화의 고속도로였다를 통해 한민족의 해양활동의 역사를 조명했다. 여기에는 자연과학적 자료, 데이터, 해양적 메커니즘,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해양 활동에 대한 역사를 자료사진과 함께 수록했다.  윤명철에 의하면 동아 지중해의 지배권을 어느 나라가 먼저 획득하느냐에 따라 국제관계의 위상이 달라진다.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곧 문화를 지배했다는 논리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고속도로는 발전의 관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윤명철은 바다를 주제로 삼았으나 고속도로를 제목으로 차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고속도로의 업적을 측면 지원해 주는 역할을 했다. 윤명철의 책 제목에서 보듯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고속도로는 근본적인 가치와 위상을 가지고 있다.[25] 

 

역사와 문화는 인류를 수단으로 하고 길을 매개로 하여 전파되게 되어 있다. 길이 없다면 인류는 갈 수 없고 인류가 가지 못한 길에서는 문화가 발생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가 닿는 모든 길에는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그에 걸 맞는 역사와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기대 이상의 발전을 몰고 왔다. 

 

3. 사장위기에 있던 전통문화권의 복원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사장위기에 몰려 있던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래양식들이 차례로 복원되고 계승되었다. 각 시도에 국한되어 전래되고 있던 판소리 12마당, 고 싸움, 경기민요, 정선 아리랑, 전통 칠기, 도자기, 심지어 전통 숯 가마 등이 차례로 복원되었고 대도시 등에 무대가 마련됨에 따라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래양식들은 판로와 활기를 되찾았다. 약 천년동안이나 잠들어 있던 청자비색도 복원되었다.

 

천년 고찰, 초기의 기독교 양식 등이 후대에 의해 연구되었고 세계적 역사 사료인 공룡유적지에 대한 연구도 깊이 진행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뱃길로 최소 3일이 걸리던 제주도 관광도 단 하루면 충분함에 따라 제주를 비롯한 섬 지역들에 산재되어 있던 역사 자료와 문화 자료들도 심층 연구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결과는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전통 뿌리 찾기 운동의 성공으로 나타나 판소리 12마당이 재연되었고 각 지역의 무형문화재와 연수관들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난타의 공연,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김영옥 명창은 자신의 창작판소리인 이순신가를 불러 찬사를 받았다. 이처럼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인해 급 발전한 한국의 위상은 이제 세계를 발판으로 가지게 되었다.

 

2절. 교육,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

 

1. 서울대학과 수도권 대학의 경계를 허문 경부고속도로  

 

경부 고속도로 개통 역사 이후 최대의 수혜자는 대학들이다. 동국대. 경희대. 단국대. 연세대. 고려대, 연세대. 상명대는 경부고속도로를 매개로 하여 중부권에 분교를 세웠다.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후 강원대는 삼척에 강원캠퍼스를 세웠다. 상명대, 공주대, 단국대는 천안에 캠퍼스를 세웠다. 서울에서 천안캠퍼스까지 등교가 가능했던 것은 접근성이 좋은 경부고속도로를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현재 서울에서 천안까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반면, 서울 도심권을 통과하여 외곽지역에서 외곽지역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통상 2시간여가 걸린다. 고속도로를 통해 천안 캠퍼스까지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경부고속도로를 통한 접근성의 편리는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국의 대학들은 양자 간에 빈번한 학술적 교류를 통해 연구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었고 이는 한국 전체 교육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모멘텀(momentum)이 되었다.

 

특히 예술 분야의 발달은 고속도로 문화가 탄생시킨 쾌거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고속도로를 통한 빈번한 교류와 잦아진 연주발표를 통해 세계적인 예술인들을 배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 한국 교육과 예술의 발전은 가히 세계적

 

한국 교육의 발전은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지인환군의 예를 들어 보자. 2004년 당시 지인환군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의 미국 유학 중에 치룬 미국 대학입시 학습능력적성시험(SAT) 1천600점 만점을 받았다. 지인환군은 전체 수험생 가운데 1%도 안 되는 SAT 만점은 물론 미국 하버드대 의학부 예과(Premed)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26]

 

특히 고속도로의 쾌거로 평가될 수 있는 예술분야의 발달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소프라노 조수미, 첼로의 장한나[27], 등을 배출했다. 이들은 세계무대에 떠오른 스타들로서 한국의 위상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민간 외교관들이다. 이들 유명 예술인들은 38년 전에 열린 고속도로 시대의 시공간적인 혜택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흡수하여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인재들이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는 뉴욕타임스의 국제전문기자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글을 인용했다. 세계화 혁명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정보통신망으로 얼마나 잘 엮어져 있는가. 변화를 이끌어 가거나 변화에 잘 적응하는가. 어느 정도 빠른가. 지식을 잘 이용하는가. 외부에 대해 개방돼 있는가. 내부적으로도 개방돼 있는가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할 것이다.[28]

 

프리드먼은 성공의 요인에 대해 몇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는 정보통신망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급변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총체적 가치의 변화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 가이다. 다음으로 가치의 변화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가의 여부이다. 다음으로 가치의 변화를 일으킨 주체들을 환경적 요인으로 흡수하여 소화해 내고 이것들을 응용하여 자신의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로 분류했다.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자가 곧 성공자라는 결론이다.  

 

위에 소개한 세계적인 예술인들은 프리드먼이 지적한 성공의 요인을 다 가지고 있다. 고속도로를 통한 시혜적 요인인 시공간과 지식, 그리고 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소화해 내고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낸 성공자들이다.

 

만약 고속도로를 통한 시혜적 요인이 없었다면 한국은 낙후된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세계적인 명성까지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3절. 명절문화 탄생

 

1. 명절문화 탄생배경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되었고 대전에서 전주를 잇는 호남고속도로는 이보다 6개월 뒤인 1970년 12월 30일에 개통되었다.[29]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인 1971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자가용  붐이 일어났다. 그 동안 열차 편으로 명절에 고향을 찾았던 국민들은 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고속버스와 열차 편으로 분산하여 고향을 찾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귀향길 귀성길이라는 신종용어가 등장했다. 승용차로 자신의 일가족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려 고향을 찾는 자가용 족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자가용 보유에 따라 성공의 척도가 달라졌다. 이에 따라 국민은 앞을 다투어 승용차를 구입했다. 고속도로 개통 이후 5년 만에 현대에서 포니를 국산화시켜 내놨다.

 

포니는 이탈리아 디자인이 디자인하였고 국내최초 국산 고유모델이 되었다. 1975년 12월에 출시하여 1976년에 10,726대를 판매해 국내 승용차 시장 판매의 43.6% 를 점유하는 실적을 거두었다. 엔진은 미쓰비시의 1,238cc 직렬 4기통 새턴엔진을 얹었고, 구동방식은 후륜구동(FR)이었다. 포니는 3도어, 4도어 해치백, 왜건, 픽업의 라인업을 가지고 있다. 포니II가 시판되기 전인 1982년까지 생산되었다.[30]

 

국산차인 포니가 전격 출시되자 고속도로는 본격적인 명절문화권에 돌입했다. 1997년 7월 자동차 등록대수는 1,000만대를 돌파했으며  2000년에는 1206만대, 2007년에는 무려 1643만대가 등록되어 있다. [31]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동차로 인해 전국의 고속도로는 평일에도 러시아워 시간에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고 있는 실정이며 명절에는 도착시간이 평상시의 3배에서 4배까지 소요되고 있는 실정이다.

 

2. 명절문화는 효 문화로 정착

 

시간이 흐를수록 명절문화는 효 문화로 안착되었다. 고향의 어르신들과 일가친척들과 조상들께 제례를 드리는 효 문화로 정착되었다. 이는 개인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의 어르신들께 인정을 받는다는 측면과 가문과 가세의 번창과 번영을 기원한다는 뜻을 포함하게 되면서 명절문화로 대변되는 효 문화는 국민적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조상의 덕을 기리고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고향을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절문화가 오고 가는 길에 불편함도 감수해야 할 가치 있는 문화권으로서 뿌리를 내렸다.

 

4절. 여가 문화의 풍요로움

 

로랑스 타르디의 작품인 영원한 것은 없기에에서 주인공 뱅상은 주느비에브가 15년 만에 보낸 편지를 받고 미친 듯이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난 죽어가고 있어 뱅상 난 죽어가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당신을 보고 만지고 당신 목소릴 듣고 싶어 보고 싶어. 뱅상 난 죽어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했던 주느비에브, 그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뱅상을 불렀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행복했던 두 남녀는 결혼을 했고, '클라라'라는 예쁜 딸아이까지 낳았다. 그들은 매 순간 기쁨과 행복을 경험했다. 하지만, 불행의 그림자는 어느 날,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그들을 덮쳤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딸, 경찰에 신고, 그리고 매 순간 피 말리는 기다림으로 인해 둘은 결별하게 되었다. 결별한 15년 동안 두 연인은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보고 싶은 한을 풀기로 작정한 주느비에브는 뱅상을 불렀다. 부름을 받은 뱅상은 고속도로를 내달려 마침내 주느비에브를 만났다. 주느비에브는 뱅상의 품안에서 뱅상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을 남긴다. 

 

"의사가 나한테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야. 난 마치 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자신에게 물었지. 이제 나한테 남은 게 무얼까 하고. 그것은 당신이었어.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것. 뱅상. 우리 두 사람의 사랑, 그리고 클라라, 그애의 실종…… 이게 내 삶이야. 이 삶이 누린 기쁨과 상처. 나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왜 삶의 밝은 면만 기억해야 하는 걸까? 빛을 눈부시게 만드는 건 어둠인데 말이야. 만일 우리가 클라라를 잃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난 순간의 가치를 몰랐을 거야. 슬퍼하지 마, 뱅상. 영원은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이 속에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주는 현기증 속에 있어."

 

주느비에브는 뱅상의 품 안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만약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이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속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뱅상은 주느비에브가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었고 15년 동안이나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한을 풀게 되었다. 타르디는 이 소설로 알랭 푸르니에 상과 르 프랭스 모리스 로맨스소설 상을 수상했다.[32]

 

타르디의 작품에서 보듯 고속도로는 모든 작품에서 사랑의 메신저가 된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재회하게 하는 가교가 되기도 하며 낯선 남녀가 서로 만나게 되는 운명의 끈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삶의 활력을 충전시켜주는 여가 문화의 풍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고속도로는 문화인의 삶을 보장해준다.

 

 

4장.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가는 고속도로

 

1절. 한강의 기적의 견인차인 고속도로와 포항제철

 

한강의 기적(漢江- 奇蹟)은 대한민국에서 한국 전쟁 이후부터 아시아 금융 위기까지 급격한 경제 성장을 나타내는 캐치프레이즈이다. 특히, 전쟁의 폐허로부터 세계적 경제 중심지로 탈바꿈한 서울 또는 대한민국의 급격한 성장을 서울 중심부을 흐르는 한강을 통해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한강의 기적은 원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간 서독의 경제적 발전을 이르는 말인 라인강의 기적에서 온 말이다.[33]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원동력은 고속도로를 통한 기동성 확보와 함께 포항제철소를 꼽을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포항제철이 세워짐으로 철강을 원료로 하는 자동차 산업과 건축 산업 등의 중공업산업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포항제철은  대일 청구권 자금 7,370만 달러를 포함하여 외자 총액 16,453만 달러와 내자 총액 453억 원을 들여 1973년에는 역사적인 준공식을 올릴 수 있었다. 1998년 11월 20일자 서울경제신문은 다음과 같이 세계 10대 철강회사들의 순위와 생산량을 발표했다.

 

(도표) [34]

 

 순위   업체명 (1997년 기준) 생산량 (만톤)
  1   신일본제철 (일본)        2,693
  2    포항제철 (한국)        2,643
  3   티센크루프(독일)        1,750
  4   브리티시스틸(영국)       1,700
  5   유지노(프랑스)       1,610
  6   신보강집단(중국)       1,500
  7   리바(이탈리아)      1,480
  8   아르베드(룩셈브르그)      1,250
  9   사일(인도)        1,200
  10   US스틸(미국)       1,120

 

 

포철은 그 후 1983년까지 2기, 3기, 4기 공사를 준공시켜 910만 톤 급의 대규모 제철소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88년에 꿈의 제철소라는 270만 톤급의 광양제철소 설비를, 92년에 또 330만 톤급의 추가 설비까지 완비함으로써 열간 압연은 물론 냉간 압연의 후판과 선재 및 강판을 생산하는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연산 총 2,600만 톤을 생산하는 초대형 공장으로 성장했다. 포철의 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민족의 앞날을 준비한 박 대통령의 위업이었고, 그 성장은 곧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척도였다.[35]

 

2절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한국의 고속도로

 

세계 10대 강국의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고속도로가 수행한 위대한 임무는 실로 엄청났다.

 

동아일보는 동아건설이 세계의 건설 역사에 위대한 공헌을 기록했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작전 명 GREAT MAN MADE RIVER PROJECT 의 성공으로 세계 건설의 역사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는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지하 460M에 저장되어 있는 태고의 암반수를 퍼 올려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에 식수로 공급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말한다. 지름 4M의 거대 송수관을 통해 650Km 떨어진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공급하는  GREAT MAN MADE RIVER PROJECT의 성공은 전 세계를 흥분시켰다. 1996년 당시 공사비만 200억 달러였다. 천문학적인 공사비가 투입된 대공사였다. 송수관 하나의 길이는 7.5m, 무게는 75t이나 나가는 관을 25만개를 7m의 깊이로 균등하게 매설한 뒤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대한민국의 동아건설은 해냈다. 당시의 보도 자료는 그 감동의 장면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1996년 9월1일 오후 4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카다피 리비아 국가지도자가 수도꼭지를 틀자 콸콸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시원한 물이었다. 트리폴리 남쪽 650 떨어진 자발 하소나의 지하 480m에서 퍼 올린 암반수이다. 이날 통수식에 참석한 카다피 등 세계 30여 개의 국가원수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통신장교 출신인 카다피가 1969년 녹색혁명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쿠데타로 집권한 지 27년 만에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는 순간이었다. 참석한 정상들은 GREAT MAN MADE RIVER PROJECT(거인의 인공강 프로젝트)로 명명된 대수로 공사를 성공시킨 한국인에 대해 존경심을 표했다. 이 공사는 총 5단계 공사로 진행되었다. 200억 달러 규모의 대수로 공사는 104조 톤의 지하수가 묻힌 리비아 남부 취수원 4곳에서부터 지름 4m 관을 7m 깊이로 묻어 5524㎞를 연결하는 공사이다. 1993년 세계 최대의 공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일부에서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까지 거론할 정도다. 이 공사가 끝나면 한반도의 6배 면적의 불모지였던 리비아가 옥토로 바뀐다는 내용이다.[36]

 

한국이 위에 소개한 동아건설의 성공에 대해 세계 건설업계가 주목할 만한 두각을 드러낸 이면과 세계에서 알아주는 선진건축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던 내면에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한 기술적 노하우 축적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삼성물산이 두바이에 올린 세계최고의 버즈두바이(810m)와 쿠알라름프르에 올린 쌍둥이 빌딩, 세계 1위의 조선업 등으로 한국은 세계 최고의 건축물을 연이어 성공시켰다. 세계 최대의 건축회사에서도 해내지 못한 최신의 공법은 과거 경부고속도로를 건축할 때에 현대에서 만들어 사용했던 중장비 개조에 대한 노하우가 30년 동안의 신예공법과 함께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

 

6.25 동란은 대한민국의 존망을 뒤흔들 만큼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경부고속도로를 염두에 둔 경인고속도로 착공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조기에 고속도로를 개통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재원을 끌어 모으기 위한 필사적인 박 대통령의 노력은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독일의 뤼브게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를 감동시켰고 독일로부터 차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월남파병 장병의 월급을 달러로 받아 원화로 환산하여 월급을 지급했다. 확보된 달러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에 투자하여 조국의 근대화를 이룬 공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국민을 믿고 꿈과 상상력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킨 리더십은 한국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만약 경부고속도로가 10년 뒤에 개통되었다면 대한민국은 현재와 같이 발전하지 못했을 일이며 세계의 전문가들이 예언했던 대로 50년 혹은 100년 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 조국의 근대화는 요원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과 건설 후의 역사로 나뉜다. 그것은 경부고속도로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역사의 분기점을 이룰 만큼의 공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현 정부에서 경부운하건설론을 내놓았을 때에 경부운하건설을 반대한 80%의 국민들은 가장 먼저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고속도로의 공적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제 아무리 경부운하가 최고의 걸작품으로 완성된다고 해도 고속도로의 편의성과 접근성 그리고 경제성과 비교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 근본이유였다. 그만큼 국민의 대다수는 고속도로를 지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도로공사에서도 할 일은 있다. 대형사고율을 줄이는 것과 정체구간 해소와 휴게소 식사의 질 등을 개선시키는 노력을 병행해 줌으로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다.

 

매일경제 2006.12.18자 보도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1년 전인 지난해 12월 23일 "길을 열어 행복한 세상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시민기업 선포식과 함께 사회봉사단 발대식을 열었다는 소식과 함께 좀 더 체계적인 형태로 시민기업 역할을 수행하고자 '첫 발'을 힘차게 내디딘 것이라는 훈훈한 소식을 실었다. 

 

현재 도로공사에는 본사 통합사회봉사단이 있고 직할기관 18개, 지역본부 6개, 지사 42개, 영업소ㆍ휴게소 124개 등 총 191개 봉사단이 전국에서 활동 중이며  사회공헌 활동으로 2005년에는 6071건, 연인원 4만3017명이 참여했다.

 

금액으로는 고속도로 장학금, 불우이웃돕기 기부금 등에 18억8000만원, 건수로는 올 10월 말 현재 5000여 건, 15억5000여 만 원에 달하는 도움의 손길을 나눠줬다.

 

여기에 도로공사는 이웃사랑에 대한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전략을 수립하고 조직을 체계화 시키는 작업으로 구체적인 사회공헌을 기획하고 있다.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격려를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해피펀드 제도와 매칭그랜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 임직원의 자발적인 자원봉사와 헌혈 등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회공헌 활동 마일리지제, 인증제도 실시하고 있다.

 

고속도로와 관련된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하다.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불의의 사고로 고통을 받고 있는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해 고속도로 장학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1996년 고속도로 쉼터 장학재단으로 설립된 이후 1998년 고속도로 장학재단으로 명칭을 바꿔 매년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2005년까지 1733명의 학생들에게 총 10억213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고 올해는 고등학생 140명과 대학생 155명에게 3억80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의 뒤안길에는 77명의 아까운 희생자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재원은 일제침략에 대한 보상비로 받은 6억 달러와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월급으로 받은 달러가 중장비를 비롯한 공사자재를 구입하는데 투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조성된 경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지출 요인은 제로였고 더 이상 줄일 방법은 없었다. 오직 공사기간을 단축시키는 일만이 경비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와 공사현장을 헬기로 이동하면서 진두지휘하여 공사기간을 단축하여 세계 건축, 토목사에 신기원을 수립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난 후 탄생된 정권 가운데에서 박정희 정권과 같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대통령은 단연코 없었다. 

 

한국의 모든 문학과 소설작품에는 고속도로가 등장한다. 고속도로는 고향으로 가는 고운 길로 묘사되고 있고 사랑의 통로로 표현되고 있다. 그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며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1. 사전류

 

세계철학대사전, 만하임 항목, 서울:교육출판공사, 1980.

두산백과, 경인고속도로 항목,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고속도로의 역사 항목, 네이버.

두산백과, 새마을 운동 항목, 네이버.

위키백과,  장한나 항목.

위키백과, 한강의 기적 항목.

 

2. 단행본

 

윤영호, 역사적인 고속도로 그 현장에 서다 서울:대양미디어, 2006.

강기원, 교양경제 서울:제일출판사, 1997.

김정렴,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김진, 청와대비서실 서울:중앙일보사, 1992.

윤명철,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서울:사계절, 2000.

이상돈, 세계의 트랜드를 읽는 100권의 책 서울:기파랑, 2006.

로랑스 타르디, 영원한 것은 없기에 이창실 옮김, 서울:문학동네, 2008.

 

3. 보도자료 및 연설문

 

김충배, 육사교장의 연설문.

국토해양부, 자동차등록 자료.

한국도로공사, 추풍령 휴게소 준공비문.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 고속도로의 역사.

 

4. 신문 및 방송

서울경제, 오철수 기자,  2008/08/03 16:49:46.

CNB뉴스, 차영환 기자, 2008-07-05 03:03:20.

연합뉴스, 2004-08-01 13:07:52.

KBS, 2005년 8월 5일 (금) 저녁 7시 30분  8시 25분.

서울경제신문,  1998년 11월 20일자.

동아일보, 1996년 9월1일 자.

 


[1] 윤영호, 역사적인 고속도로 그 현장에 서다 (서울:대양미디어, 2006), 서문

[2] 두산백과, 육이오 사변(1950.6.25~1953.7.27)으로 남북한 450만 명의 인명손실, 1000만 명의 이산가족 발생.

[3] 세계철학대사전, 만하임 항목, (서울:교육출판공사, 1980, 중판), pp.296.

[4] ibid, pp. 286.

[5] 강기원, 교양경제,  (서울:제일출판사, 1997), pp. 662,663.

[6] 도로공사, 1979. 9.16,1억 2,758만 3,000원.

[7] 김정렴,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pp. 362.

[8] 서울경제, 오철수 기자,  2008.08.03 16:49:46.

[9] 김진, 청와대비서실 (서울:중앙일보사, 1992.8.10 8판), 책소개.

[10] ibid, 金正濂 前청와대 비서실장의 회고.

[11] ibid, 白永勳의 회고.

[12] ibid, 鄭周永의 회고.

[13] 김충배, 육사교장의 연설문, 네이버 검색.

[14] ibid, 위 연설문.

[15] 두산백과, 경인고속도로 항목, 네이버.

[16] ibid, "경부고속도로 항목,

[17] KBS, 2005년 8월 5일 (금) 저녁 7시 30분  8시 25분.

[18] 두산백과사전, 고속도로의 역사 항목, 네이버.

[19] KBS, 2005년 8월 5일 (금) 저녁 7시 30분  8시 25분, PD: 최우철  작가: 박민경.

[20] ibid,  朴鍾生의 증언.

[21] CNB뉴스, 차영환 기자, 2008-07-05 03:03:20.

[22] 두산백과, 새마을 운동 항목, 네이버.

[23] CNB뉴스, 차영환 기자, 2008-07-05 03:03:20.

[24] 한국도로공사, 추풍령 휴게소.

[25] 윤명철,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서울:사계절, 2000), 책소개.

[26] 연합뉴스, 2004-08-01 13:07:52.

[27] 위키백과, 수원 출신으로 1993년 2월 한미 뉴욕 줄리어드 예비음대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도미.

[28] 이상돈, 세계의 트랜드를 읽는 100권의 책 (서울:기파랑, 2006), pp. 258.

[29]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 고속도로의 역사.

[30] 위키백과, 포니 항목, 네이버.

[31] 국토해양부, 자동차등록 자료.

[32] 로랑스 타르디, 영원한 것은 없기에 이창실 옮김, (서울:문학동네, 2008) 서평.

[33] 위키백과, 한강의 기적 항목.

[34] 서울경제신문,  1998년 11월 20일자.

[35] 강기원, 위의 책, pp. 668.

[36] 동아일보, 1996년 9월1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