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

이론이 없는 국가는 망한다[3]

도제조 안형식 2009. 12. 15. 14:55

이론이 없는 국가는 망한다[3]
박정희 대통령은 최고의 이론가
 
 
1) 독일의 아우토반을 벤치마킹한 한국형 고속도로의 예

“청와대 비서실”의 저자 김진은, “건국 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지칭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내노라하는 건설관계자와 경제학자등이 대역사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朴正熙의 작품이었다. 구상은 64년 말 서독방문길에서 그려졌는데, 朴正熙는 이때 중요한 체험을 했다. 서독의 고속도로(아우토반)와 라인강 운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라고 서술했다.

"朴대통령이 현대식 고속도로를 처음 본 것은 54년 미국의 포병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였어요. 그러나 당시는 한 여행객의 입장이었겠지요. 64년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탁월한 기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합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가 朴대통령에게 '나는 아우토반에 진입하거나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 나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 도로에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한 말을 10여 년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 장면에 대해 백영훈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朴正熙는 국빈용 벤츠승용차에 몸을 싣고 서독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시속 1백60km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의 사물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응시하던 朴正熙는 동승한 서독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두서는 없었지만 계획단계에서 건설 관리에 이르기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朴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20km구간을 왕복하며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 시설 등은 물론이고 앞뒤 선형까지, 아우토반의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했다. 줄곧 곁에 서있었던 나는 朴대통령이 큰 결심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백영훈의 예상대로 朴正熙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호되게 매달렸다. 각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관한 기록을 밤늦도록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연구보고서를 제출받기도 했다. 국토를 개조해서라도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패기만만한 40대 대통령의 야망이었다.

현대건설 사장 鄭周永은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각하께서 밤늦게 불러 들어가 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 가지 안을 제시해 의견을 묻곤 했다."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파독 간호사와 파독 광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해야 했다. 지하 1000m의 지하갱도에서 악전고투를 하는 광부들의 처참함을 보아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의 시골병원에서 시체를 닦고 환자들의 피고름으로 범벅되어 있는 시트와 옷가지를 빨고 피고름을 받아 내던 어린 간호사들의 통곡과 외침은 “우리도 국력을 길러 속히 선진국이 되게 해 달라”는 절규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한국을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시도 그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김충배 전 육사교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우리처럼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 명이나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回生)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戰後)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2)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은 “한강의 기적”을 빛낸 최고의 걸작

1969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60달러에 불과했다. 부족한 재원은 일본원조차관(ECOF) 600여만 달러로 보충했다. 1968년 2월1일부터 70년 7월7일까지 연인원 900만 명과 장비 165만대가 동원됐다. 현대를 비롯한 16개 건설사가 참여했고 육군 건설공병단 3개 대대도 동원됐다. 서울에서 부산 간 4차선 총 428㎞, 총 공사비 430억 원, 공사기간 2년 5개월, 동원 인력 9백 만 명, 희생자 77명. 국가적 역량이 총 집결된 경부고속도로는 힘차게 뛰어오른 경제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박 대통령의 이론에 의해 착공된 경인,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으로 기술적 논리 체계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현장 위주의 기술적 논리 체계는 학문적 토대를 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경인 및 경부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했던 현대건설을 비롯한 16개 건설사들은 여기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건설과 토목 부분에 대해 기술적 학문체계를 세우고 직원교육에 활용하여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적인 건설사의 입지를 굳혔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연설 위주로 끌고 가던 주먹구구식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방향에 대해서 보고서 중심의 전략식 이론을 요구하였다. 보고서에 담긴 전략식 이론은 정책으로 수립되기 전에 박 대통령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일단 정책으로 수립되어 시행되면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보고되어야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오랜 군생활을 통해 몸에 배인 점검 습관 때문이었다. 몸에 밴 점검습관은 빈틈없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 예가 새마을 운동이며 경인,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이다.

박 대통령은 경부 고속도로 착공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적으로 건설하여 여기에서 나온 데이터를 토대로 경부고속도로를 디자인했다. 경인 고속도로에서 나온 데이터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과학적인 시뮬레이션까지 해 보고 난 연후에야 경부 고속도로 착공에 들어갔다. 착공된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을 앞당겼으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순차적 성공을 통해 대한민국은 급성장을 계속했다.

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2년~1976년)은 연평균 9.7%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이는 3차 경제개발 5년을 통해 국가적으로 약 50%대의 성장동력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이 때 발생된 성장 동력은 3년 뒤인 1979년에 와서 100억불 수출 달성과 국민소득 944 달러로 끌어 올렸다. 기대 이상의 성공이었다. 이 기간에는 착수 직전인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에 의한 국제경제 질서의 혼란, 1973년 10월의 석유파동 등으로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었으나, 외자도입의 급증,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동 건설경기 등으로 난국을 극복하여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이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우리나라는 1990년대 전후하여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였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함으로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 정책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정권들이 무능력했음을 입증한다.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제대로 된 경제정책이 나오지 못했다. 이는 디자인 능력의 결핍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대통령 자리만 탐내던 사람들로서 재임 기간 대통령의 권력만 누리다가 임기를 끝낸 사람들이다.

백과사전은 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제4차 경재개발 5개년계획(1977∼1981)은 성장·형평(衡平)·능률의 기조 하에 자력 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77년 100억 달러 수출달성, 1인당 국민총생산(GNP) 944달러가 되었지만, 1978년에는 물가고와 부동산 투기, 생활필수품 부족, 각종 생산애로 등의 누적된 문제점이 나타났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가세하여 한국경제를 더욱 어려운 고비로 몰아넣었고, 1980년에는 사회적 불안과 흉작이 겹쳐 마이너스성장을 겪었으나 다행히 1981년에는 경제가 다시 회복세를 보였다 라고 썼다.

과연 대한민국은 대통령병이 들어 있는 위인들이 권좌에 앉아 권세만 누리다가 끝내도 무탈한 나라인가? 국가와 국민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여한 것도 없고 오히려 망쳐 놓은 전직 대통령들이 기껏 5년 남짓의 임기를 마치고는 평생 동안 대통령 연금을 받아먹어도 좋은 나라인가?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부차원에서의 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전 정권에 대한 평가와 이에 따른 반성도 함께 나와야 한다. 이는 앞 정권이 실패한 정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대통령이 퇴임 후에 받는 연금은 업적과 기여도에 따라 차등 지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김대중, 노무현과 같이 친북사상으로 국가의 재정과 한국인의 사상에 심각한 위해를 끼친 위인들에게는 연금이 지급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민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나 정부는 칼을 쥐고 있다는 현실적인 우월감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정부의 역할마저 소홀히 하고 있다. 정권이라는 칼을 쥐고 해 보고 싶은 대로 다 해 보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칼을 빼앗기고 나자 국민적 심판이 두려운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무능력한 자가 정권을 탐냈던 결과이다.

노태우 정권 이후로 대한민국의 자연환경은 극심할 정도로 훼손되었다. 정권이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판을 벌렸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개발정책들은 땅투기꾼을 양산했으며 건설사와 관련 공무원들의 배만 불리고 전국을 부동산 투기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공사 비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국의 땅값은 등천하고 비리 건설사와 비리 공무원의 야합으로 건설단가가 오름에 따라 돈 없는 서민들만 피해를 입었다. 세를 얻어 자영업을 하는 자영업자의 경우 작년 한해에만 70만개가 폐업을 하고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집이 없는 서민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사교육비 부담의 공포로 인해 자식을 낳지 않아 OECD 국가 중에 최하위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해 저출산 대책위원회까지 꾸려 출산을 유도하고 있으나 근본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될 수 없게 되어 있다. 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정부의 공무원 수준은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국민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율이 80%에 이를 정도로 고학력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결국은 국가의 존망까지도 위태롭다.

이런 이유로 제2의 박정희 대통령이 나와서 부동산 문제와 교육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올려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