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미 FTA 협상 배경
한미 FTA가 타결된 4월1일SBS, KBS, MBC 지상파 방송 3사에서는 1년 2개월을 끌어 온 한미FTA 협상문제 타결이라는 제목으로 뉴스를 보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8개월을 끌어 온 한미FTA 협상문제 타결이라는 제목으로 논평을 내 놓았다. 방송3사에서 1년 2개월 이라는 주장과 한나라당의 8개월 이라는 주장은 4개월의 시차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바로 잡아 보자. 한미 FTA의 본 협상은 2006년 6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3박4일간의 일정으로 개최되었다. 8차 본회담은 만 8개월 동안 개최되었다. 따라서 본 협상부터 따지면 강재섭 대표의 8개월이 맞는 말이다.
1차 본협상 : 2006. 6. 5 ~ 6. 9 (미국 워싱턴), 2차 본협상 : 2006. 7. 10 ~ 7. 14 (한국 서울), 3차 본협상 : 2006. 9. 5 ~ 9. 9 (미국 시애틀), 4차 본협상 : 2006. 10. 23 ~ 10. 27 (한국 제주), 5차 본협상 : 2006. 12. 4 ~ 12. 9 (미국 몬태나주), 6차 본협상 : 2007. 1. 15 ~ 1. 19 (한국 서울), 7차 본협상 : 2007. 2. 11 ~ 2. 14 (미국 워싱턴), 8차 본협상 : 2007. 3. 8 ~ 3. 12 (한국 서울), 최종 통상장관급 회담 : 2007. 3. 26 ~ 4. 2 (한국 서울)
1. 한미 FTA 출발점
한미FTA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어떤 이유로 출발되었는가? 무엇을 위해 출발되었는가?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다른 의미가 복중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한미 FTA문제는 실상 미국측에서 한국시장의 개방을 집요하게 요구해왔던 중대사안이었다. 미국은 한국과의 교역량에서 매년 500백억불을 상회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는 중요교역국인 동시에 미국측에서 보면 8번째로 적자를 보고 있는 무역수지 적자국가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과의 무역수지면에서 적자폭을 줄이기 위해 한미 정상회담시에 주요안건으로 체택을 통해 애를 써왔다. 김대중 정권시절은 IMF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한미FTA보다 높은 강도로 한국의 시장을 열어 재끼는데 성공했고 열린 한국의 증시를 통해 매년 수조원의 수익을 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는 IMF기조가 그대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한미FTA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랬던 것이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중단되면서부터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국은 한국대로 IMF를 통과했다고는 하나 워낙 IMF에 대한 충격이 커서 한미FTA를 거론할 분위기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노 대통령이 한미FTA 회담 문제가 거론되더니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한미 FTA회담이 진행되는줄도 몰랐다.
한미FTA회담이 진행 중이라는 보도는 2006년 월드컵 16강전 진출을 확정짓는 한국 대 스위스전(2006년 6월 24일)이 중계방송 되고 있는 중에 슬며시 자막 으로 처리되었다. 만약 한국이 스위스 전에서 승리하고 16강에 진출했다면 한미FTA회담 문제는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 4대 선결조항 문제는 이슈로 부상하지도 못했을 일이다.
참여정부의 절묘한 타이밍 전법은 한국의 16강 좌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천하에 공개되었다. 그 이면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명분과 실리의 측면에서도 전혀 타당성이 없는 한미 FTA 문제가 왜 월드컵 16강전에 맞추어 기습적으로 발표되었던 것일까. 그 이면에는 김현종이 있다.
김현종 한미FTA 본부장은 외교관(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이다. 중.고교, 대학을 해외에서 다녔고 석.박사도 미국(컬럼비아대)에서 마쳤다. 국내엔 학맥이나 인맥이 없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건너온 김 본부장은 1998년 홍익대 교수에서 외교부 통상전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의 일하는 모습을 본 외교부 동료들은 '일벌레'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호그룹 수석 법률고문인 김미형 부사장이 친동생이다. 김 부사장 역시 항공기 협상 일을 맡고 있다.
김 본부장은 당시 노 대통령에게 한.미 FTA 협상의 필요성과 수순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시장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경쟁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협상에선 이니셔티브(주도권)가 중요하다. 우리가 미국에 FTA를 하자고 먼저 제안하면 주도권이 그쪽으로 넘어간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미국 시장의 문을 열게 할 방법이 뭘까. 캐나다를 먼저 치는 것이다. 우리가 캐나다와 FTA를 한다는 얘기를 흘리면 미국이 달려들 것이다. 협상은 자신있다."
그리고 2005년 9월9일 해외 순방을 위해 멕시코로 날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결심한다. 동석했던 고위 인사는 "몇 수를 미리 읽는 (김 본부장의) 전략적 마인드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전했다. [1]
노 대통령은 9월 12일 멕시코의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 4차 6자 회담9.19 베이징 선언에 대한 보고를 받고 북한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송현정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대북 경제 지원 윤곽은 거칠지만 잡아 놓았다면서, 당장 개성 공단 1,2차 부지 통합 개발 방안을 거론했고, 국무회의에선 6400억원 규모의 내년도 남북협력기금을 늘리는 방안도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북한의 경제발전을 도울 포괄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합리적 대화 체제 마련”도 당부했다. 북미간 줄다리기를 통해 우리 정부의 ‘조정자 역’강조한 노 대통령은 저녁에는 회담 대표단을 격려하는 자리도 마련했다.[2]
2005년 6자회담 뒤 발표된 9.19 공동성명에선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면 남한은 북한에 전력 200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과거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경수로 건설 비용의 분담 비율은 한국 70%, 일본 20%, EU 10%였다. 이 비율을 그대로 적용하면 한국이 부담해야 할 의 전력요금 몫은 연간 4550억~5950억원에 달하며 송전시설 건설비용이 1조850억원이 든다.
그러나 9.19선언은 2006년 10월 17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아 부도가 나고 말았다. 당시 KBS의 조성원 기자의 보도내용을 통해 상기해 보자. “모든 핵무기·핵계획 포기”라는 제목이 선명하다. 내용을 보자.
제 4차 6자 회담이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극적으로 타결됐습니다. 북한의 모든 핵 포기를 담고 있습니다. 10여 초간 이어진 기립박수... 성취감과 안도감이 뒤섞여 보입니다. 공동성명의 핵심은 역시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포기입니다.
북한은 또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 금지조약 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은 핵무기건 재래식 무기로건 북한을 공격할 뜻이 없으며 한국은 한반도비핵화를 재확인했습니다. 북한이 핵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존중하고 적당한 시점에 대북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하는데도 합의했습니다.
<녹취>우다웨이(중국측 수석대표): "6자회담이 한반도 핵문제를 푸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란 것을 시간은 보여줄 것입니다" 북-미간 상호주권 존중과 관계 정상화 조치, 북-일간에도 과거청산의 기초 위에서 관계 정상화 조치를 약속했습니다. 참가국들은 대북 에너지 제공과 경제적 협력 증진을 약속했고, 한국도 2백만 킬로와트 대북 전력 지원을 재확인했습니다. 참가국들은 한반도 평화협정체제를 위한 직접 당사자 협상을 열고, 이번 합의 실현을 위한 실천적 조치를 약속했습니다. 제 5차 6자회담을 11월 초 베이징에서 여는데도 합의했습니다. KBS 뉴스 조성원입니다.[3]
3년 전 불거졌던 2차 북핵위기가 이번 회담 타결로 일단락 되면서 한숨 돌리게 됐습니다. 박주경 기자가 그동안의 북핵사태를 정리해 봤습니다. 극적인 전기는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평양 면담에서 이뤄졌습니다.
<녹취>정동영(통일부장관): "김정일 위원장은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남북 관계 복원에 이어 6자 회담에 다시 나왔고, 오늘까지 두 차례에 걸친 4차 회담을 통해 북한이 전면 핵폐기를 약속하는 등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됐습니다. KBS 뉴스 박주경입니다.[4]
200만KW의 전력은 원자로 2개를 지어야 나올 수 있는 용량이다. 노 대통령은 2005년 초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4월에 중대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 중대제안은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하여 북핵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2008년부터 200KW의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노 대통령 특유의 “직을 걸고 약속한다”는 확언으로 이어졌다.
이제 다시 이 문제를 상기하는 것은, 북한이 노 대통령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2006년 10월 9일에 핵실험을 강행했다는 것으로 기왕의 모든 약속은 의미가 없어졌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언약이란 쌍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게 되어 있고 조건이 붙은 언약은 그 조건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파기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제안된 노 대통령의 제안과 약속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는 순간에 완전히 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200만 KW의 전기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면, 이는 국가 원수로서의 권위는 물론하고 식언자가 된다. 만약 여기에 더하여 200만KW의 전기를 송출한다면 이는 이적행위자이며 역적이다.
2. 경제구조를 정치구조로 푼 노무현 대통령
노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친북에 우선되어 있다. 이를 따지는 국민들에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사상의 정체성은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는, 이중적인 사상의 정체를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이 말은 포장되어 있는 말로 노 대통령과 사상적 라인이 같은 이들에게는 멋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사상의 경계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경악스러운 말이다. 이 말의 정체는 친북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낸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확인해 보자. 좌파라는 말은 친북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며, 신자유주의자라는 말이 따라 붙어 있는 것은 국보법을 피해 가는 말이다. 남한 내에서 투명하지 못한 친북자라는 말은 극단적 친북주의자라는 말과 같이 간다.
이는 국가관이 대단히 잘 못 되어 있다는 뜻인데, 국가관은 북한을 현실로 보느냐 환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갈린다. 북한을 현실로 본다는 뜻은 북한과 남한이 대치 상태에 있는 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환상으로 본다는 뜻은 북한과 남한이 한 핏줄이기 때문에 적이 아닌 형제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북한을 형제로 본다는 의미는 경우에 따라 아군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미국과 대치하거나 일본과 대치하게 되면 여지없이 친북적인 노무현 독트린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지금 북한을 아군으로 보고 있다.
남한과 북한은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주체사상으로 정확히 나눠져 있다. 친북적이라는 말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의 주체사상은 북한의 존립근거이다. 현실상에 있어 김정일 독재체제를 독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경우나 함께 간다. 곧 북한의 김정일 체제를 옹호하는 친북라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일보는 6일자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하기 4개월 전인 2005년 1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5] 그리고 협상 타결까지 18개월간 흔들림 없이 협상을 밀어붙였다. 이런 노 대통령의 뒤를 받친 것은 재정경제부가 아니라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송민순 차관보(2006년1월 이후 청와대 안보실장) 등 외교부 라인이었다. 이는 노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경제적 측면 못지 않게 한미관계, 동북아 안보지형에 대한 전략적 측면을 비중 있게 고려했음을 의미한다.[6]
한미FTA의 본질은 경제의 권역 안에 들어 있다. 경제팀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외교와 안보팀은 배후가 되어야 함이 원칙이다. 그런데 경제팀을 배제하고 외교와 안보팀으로 테이블을 깔았다는 말은 한미FTA를 정치적인 목적과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의미이다. 그 의도는 무엇인가. 돌파구인가? 아니면 노무현의 자폭인가? 자세히 들여다 보자.
3. 개성공단의 문제
MBC를 통해 한미FTA 타결 첫보도가 나오기 전에 연합뉴스는 “한미 FTA협상, 北전역 공단 원산지 인정” 보도를 내보냈다. 이로 인해 막판 진통으로 시달리고 있던 한미FTA 문제가 곧 타결될 것이라는 예측이 뒤를 따랐다. 노 대통령이 쿠웨이트 방문시, 허종 쿠웨이트 북한대사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한다”는 발언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미 FTA협상, 北전역 공단 원산지 인정” 이라는 제하로 타전된 연합뉴스의 보도는, 달랑 한 줄에 불과하나 전달되는 의미는 상당하다. 이는 노 대통령이 쿠웨이트 허중 대사를 통해 “진심으로 한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진심을 전해 달라”는 발언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해 타전된 발표 내용의 중심에는 미국 측의 아킬레스건인 쇠고기 수입문제와 노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개성공단 문제가 맞교환되면서 한미FTA가 체결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막판까지 진통이니 뭐니 하면서 지상파 방송3사와 각종 여론의 설레발은 서로가 띄워주기 위해 경쟁을 하는 듯 보였다. 수평을 잃은 방송과 여론에 의해 국민의 눈과 귀는 틀어 막힌 채 노무현 정권이 국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쏟으며 애를 쓰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아무리 친북정권이라고 해도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협상이니만큼 기본적으로 국민을 위하는 협상을 펼쳐줄 것으로 믿었다. 설마하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한국과 미국 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나 속을 보면 노무현의 친북적 계략의 산물에 불과하다.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한정된 틀에 북한을 무임승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미FTA회담를 악용했다는 말이다. 이로써 미국은 협정내용대로 요구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개성공단제품 문제로 인해 미국과 북한의 눈치를 동시에 봐야 하는 족쇄를 스스로 만들어 찬 꼴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개성공단제품 인정이라는 빌미를 통해 한국 전체를 미국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콘트롤박스를 얻은 셈이다.[7]
4. 평가와 반향
현재 주요 외신들은 세계경제 9위권에 있는 한국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양국 시장이 개방됨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의 경제에 유익을 줄 것이라는 긍정적인 보도를 내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자성적인 보도까지 내 보냈다.
중국은 한술 더 떠 한중 FTA를 의제로 한 정상회담을 진행하자고 나왔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처절한 시장경제의 싸움은 정치로 풀 일이 아니다. 살벌한 시장경제의 싸움을 단순 논리인 정치구도로 풀어 버린 노 대통령에게서 얻어 낼 것이 많이 있다는 중국의 판단은 옳다. 더구나 중국은 6자 회담의 의장국이다.
중국측에서 보면, 6자 회담에 발목이 잡혀 있는 노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는 기간 중에 한중FTA를 체결해야 얻을 것이 많다는 판단은 옳다. 더구나 북한과 정상회담을 복안으로 가지고 있는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중국이 필요하기 때문에 원자바오 총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 분명하다.
과거 김대중씨가 중국산 마늘과 양파를 의무수입해 주었던 선이 있기 때문에 그 보다 더 많은 선물을 줄 것이 자명하다. 당시 협상팀 책임자는 한덕수 재경부총리였다. 이런 전력이 있는 한덕수총리서리가 총리가 되었으니 어쩌면 한미FTA에서 내 준 것 보다 더 많은 선물을 안겨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에는 어떤 FTA도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경제구도를 정치구도로 푸는 어리석은 대통령이라면, 국가의 장래에 치명적인 독을 끼치고 국민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어주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을 이헌재 사단의 결과물로 규정한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한미FTA에 대하여 극히 우려했다. 노 정권을 “생각이 없는 정권”으로 단정하면서 경제구조를 정치구조로 풀려고 하는 노 대통령의 비상식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로 보았다. 민중의 소리 임은경 기자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인터뷰 한 기사 내용에 의하면, "FTA는 김현종과 노 대통령간의 직거래"라고 말했다. 인터뷰 기사 내용을 보자.
정태인 전 비서관은 이제 청와대 바깥에서 한미FTA가 착착 추진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한미FTA가 김현종 통상본부장이 미국에 매달려 성사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겠다는 발상은 독일에서 기민당과 사민당이 연대했던 것을 본따 '옆으로의 개혁'을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딱 잡아떼 거절하는 바람에 이것도 실패. 결국 또다른 돌파구로 찾아나선 것이 한미FTA 추진이라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지난해 5월 청와대를 나왔다. 청와대 재직시절 '선진 통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거대경제권과의 FTA를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으면서 웃기는 소리라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당시 그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작년 11월 미 의회가 부시 행정부로 보낸 공문을 통해 밝혀진 것처럼 김 본부장은 지난해 8월과 10월 두차례 방미를 통해 소위 '4대 선결조건'을 열어줄 것을 약속하는 등 한미FTA를 '따내기' 위해 뛰어다녔고, 결국 성공했다.
"한미FTA는 김현종의 단독 플레이였고, 김현종 - 노 대통령간의 직거래였죠. 11월까지도 재경부는 전혀 몰랐어요. 이헌재 부총리 시절에는 김현종 본부장이 제압당하는 쪽이었지만, 한덕수 부총리 때가 되자 대통령의 보호와 관심이 김현종 쪽으로 기울었죠. 물론 한덕수 부총리도 한미FTA를 적극 찬성하지만, 과정을 놓고서는 상당히 불편했을 거예요."
김 본부장을 비롯해, 한 부총리, 정문수 청와대 경제보좌관, 재경부 차관을 지낸 권태신 주OECD대표부 대사 등이 현 정부 내에서 '문제있는' 극단적 개방주의자들이라고 정 연구위원은 지적했다.[8]
경제통인 정태인 전 비서관이 한미FTA회담의 진척상황을 보면서 착잡한 심경이 들었다는 고백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담은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느냐 이고 협상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느냐는 흥정이다. 이 말은 회담은 정치적인 이유를 가지고 한미FTA를 제안하고 그것에 대하여 회담을 벌일 수 있으나, 협상에 들어가면 회담의 주체자들은 빠지고 경제전문가들만 참여하여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회담의 주체자들이 협상까지 참여하게 된다면 이는 정치적인 다른 목적이 있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회담이 협상부문까지 작용하여 결국에 가서는 회담도 아니고 협상도 아닌 묘한 꼴이 될 수 있음이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어 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한미FTA는, 북한을 포괄적으로 지원해 주기 위한 노 대통령의 구상과 입신출세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 김현종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서둘러 진행시킨 일이다. 경제라고는 전혀 모르는 변호사 출신 둘이서 한미 FTA를 서둘러 진행했기 때문에 묘한 협상결과가 나왔다.
당장에 개성공단에 대한 협상결과 하나를 놓고도 청와대의 해석과 김종훈 수석대표의 해석과 김현종 단장의 해석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독소조항으로 거론되는 문제에 들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협상된 결과의 문구는 하나인데 제각각의 해석이 나온다면 대체 퀴즈냐 아니면 방정식을 푸는 것이냐.
[1] (/중앙일보, 2007.4.6. 06:48)
[2] (/KBS 뉴스, 2005.9.20. 22:20)
[3] (/KBS, 조성원 기자, 2005.09.19.22:16)
[4] (/KBS, 박주경 기자, 2005.09.19.22:16)
[5] 중앙일보의 9월9일 멕시코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다는 보도와는 2개월의 차이점이 발생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한미FTA를 결심하고, 테이블에 내 놓기까지 걸린 시간을 말한다.
[6] (/한국일보, 2007.4.6.17:30)
[7]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임으로 뒤에 자세히 언급하도록 한다.
[8] (/민중의 소리, 임은경 기자, 200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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