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썩을 놈의 비

도제조 안형식 2009. 8. 17. 10:40

썩을 놈의 비


불이 지나가면 재는 남는다 했다. 물이 지나가면 남는 게 없다 했다. 온통 물바다에 방안 가득 찬 모래와 진흙으로 뒤덮인 세간 살이를 보는 눈에는 절망감이 가득하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인지 개울은 벌건 진흙탕이요. 사람 머리에서는 비린내가 꼴꼴 올라온다.


이리 가도 물, 저리 가도 물. 진흙투배기가 되어 버린 논밭이며 지붕 위에 올라간 강아지까지... 눈이 팽팽 돈다 돌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고향에 잠시 인사를 드리러 옥천에 내려가 있던 일주일 동안에 친구 녀석들 셋이서 군용텐트를 빌려서 청평으로 피서를 갔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청평 안전유원지에 텐트를 쳤던 녀석들이 허둥거리며 텐트를 거두는 동안에 식량을 챙기지 못해 다 잃어 버렸다. 워낙 먹성들이 좋은 때인데 먹을 것이 없으니 고달픈 인생이 되고 말았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을 파자니 땅을 판다고 누가 먹을 것을 주겠나. 두 끼를 쫄쫄 굶고 난 뒤에 철수를 할 것이냐 어쩔 것이냐 의논을 한 끝에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저녁까지 굶게 되니 하루 종일 굶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극성스런 장대비가 멈추니 텐트에서 슬글슬금 기어 나와서 처량 맞은 몰골로 유원지 물가를 서성거렸다. 검붉은 흙탕물이 넘실거리는데 피서고 뭐고 다 귀찮다.


"아니 저게 뭐냐 참외같이 생겼다."


한 녀석이 소리치니 배고픈 영혼 셋의 눈길이 흙탕물에 둥실 떠내려 오는 참외 몇 개에 몰렸다. 그 뒤를 따라 수박까지 떠내려 오는 거다. 이게 웬 횡재냐 할 틈도 없이 저걸 어떻게 건져내서 먹느냐는 당혹감이 뒤를 이었다. 한 녀석이 떠내려가는 참외 뒤를 따라 개울가를 뛴다. 나머지 두 녀석도 덩달아 뛰었다.


뛰다 보니 나뭇가지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볼 것인데 하는 생각이 난다. 눈을 돌려 개울가를 보니 나뭇가지들이 개울 주변에 걸쳐 있더라. 세 영혼이 나뭇가지를 하나씩 뽑아 들고 이왕이면 수박 쪽으로 마음을 정했는데 수박은 물 한 가운데 거친 물결 속에서 떠내려가고 있는 중이니 어찌 해 볼 수도 없다. 하여 꿩 대신 닭이라고 참외라도 건질 요량으로 뛰고 또 뛰었다. 철길 아래까지 뛰었는데 못 꺼냈다. 낙심하여 강 너머 둑을 보니 어라 참외밭이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녀석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옷을 벗어 머리에 감고 빤쓰 바람으로 강 건너를 향하여 헤엄치기로 했다. 두 녀석은 중간까지 왔다가 "어머나 뜨거라" 내 빼고 이철이 녀석만 치기로 물살에 밀려가면서도 헤엄쳤다. 이 친구가 바둑으로 50년 우정을 비틀걸음치게 만드는 영혼이다.


물살에 밀리면서 물살과 싸우며 방향을 잡으려 하나 힘이 부쳤다.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격랑이 콧속으로 물을 밀어 넣으니 코가 매워 숨도 못 쉬겠다.


"사람 살류우~~", "사아람 살려요"


녀석의 머릿속으로 저승사자가 나타났는지 어쩐지 '아아 사람이 다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어지간히 숨도 급하지만 워낙 다급해지니 소리가 질러지더란다.


"사아람 살려요".


강 이쪽에 남은 두 녀석도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는데, 철교를 지키던 간수가 이 꼴을 보고 달려 왔다가 소리 질렀다.


"일어서 봐"


두 다리가 닿았다. 두 다리가...


간수는 소리 질렀다.


"무듭꾸더"


녀석은 숨도 돌릴 틈도 없이 발딱 일어나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게 다 교련훈련을 착실히 받은 덕이다. 무릎을 꿇려 놓고서 몇 대 쥐어박은 간수는 하루 종일 굶었다는 말을 듣고 참외밭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 따 가라고 했다. 의리의 사나이 이철이는 웃옷 가득 참외를 따서 머리에 이고 철교위의 철길을 벌벌 기며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두 녀석에게 참외를 실컷 먹여 주었다. 이철이는 두 녀석에게 영웅이 되어 있었다.


다 먹고 난 뒤에 시뻘건 흙탕물이 정이 떨어졌고 어지간히 망신당한 얼굴들이 되어서 더 있을 래야 있을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간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철수하기로 했다. 철교위의 철길을 벌벌 떨면서 건너간다. 침목 틈으로 보이는 강물은 워낙 기세 좋은 급류라 겁이 덜컥 난다. 발이라도 빠질까 침목을 하나 둘 헤며 가는데 어지간히 어지럽다. 저쪽을 보니 초소에서 간수가 나와 손을 흔들며 뭐라고 큰 소리로 부르는데 뛰어갈 수도 없는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벌벌 거리고 걷고 있었다. 빠앙 하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리더니 건너온 철교 저편의 터널 속에서 열차가 들이 닥쳤다.


녀석들은 뒤지게 뛰었다고 했고 나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뒤로 넘어가게 생겼다. 목이 잘릴 뻔 했던 두 간수 중에 한 간수에게 늑사코가 되도록 얻어터지고 화풀이를 당할 대로 당하고 난 뒤에 라면을 얻어먹었다. 냄비에 해 놓았던 밥까지 몽땅 말아 먹었단다.


그리고 발발거리며 기어왔던 철교위의 철길을 다시 벌벌 거리며 걸어서 텐트에 돌아왔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 왔단다. 피곤하기도 했지 피곤하기도.


"물 앞에는 장사가 없어"


녀석은 짧고 굵게 말했다.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옥천암 옆에 있는 벼랑 미끄럼틀에 넓죽한 돌맹이를 엉덩이에 깔고 미끄럼을 탔던 깡다구 있는 녀석이다. 세 번 째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다가 고만 중심을 못 잡고 거꾸로 쑤셔 박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머리에 이만한 땜통이 생기고 말았다. 녀석은 훈장처럼 생긴 땜통을 머리로 교묘하게 가리고 마치 땜통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