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절망과 딜렘마 극복을 위한 제언>
하나. 5년 주기의 인간한계(권태기)와 딜렘마
19 세기 철학의 귀재로 불린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 말했다. 절망이라는 요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을 했기에 사람이 자신의 생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 도대체 죽음에까지 이르게 동안에 얼마나 절망했으면 자신의 생명을 저주할 수 있었을까. "죽을 결심만큼 살 결심을 하면 여러 사람의 가슴에 못질은 안 할 것 아니냐?"늘 말도 귓등으로 넘길 수 있는 자살에 대한 그 결심의 에너지는 얼마나 모진 것인가. 케골은 "절망이라는 괴물은 먼저 영혼의 쳐서 죽이고 드디어 빈 껍질만 남아 있는 육신의 숨을 멈추게 해야 끝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 이은주 양의 추도식을 보면서 동료 연예인들이 처참한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처음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보여 주었던 싱그럽고 청아한 모습과 다소 우울해 보이는 느낌을 동시에 주었던 한줌의 재로 변해 이 땅을 떠났으나 그 청순한 이미지의 잔영은 그녀를 주목했던 이들의 가슴에 아직 잔잔하게 남아 있다.
인기절정의 한 순간을 구가하며 빛나는 스타로 군림했던 이은주 양이 죽음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나름대로의 수많은 추측들과 억측들이 난무했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다시 이 문제를 조명해 보는 것은 아직 자살 신드롬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문제에 기인한다.
죽음을 불러 오는 절망. 그 절망은 한계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는 급격한 생체리듬의 변화가 있다. 가장 큰 생체변화는 사춘기와 갱년기로 구분되어지며 성장속도에 따라 5년 혹은 10년 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생체리듬의 변화가 있다. 사춘기와 갱년기는 생체의 변화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한계"로 전제된다. 사춘기와 갱년기 사이의 생체(정신 포함)리듬의 변화는 통상 5년의 주기로 반복되어지는데, 이 때는 육체의 변화와 더불어 정신적인 한계가 설정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진다. 이를 한계라고 부르는 것은 데 이 한계의 벽에 부딪쳐 폭발하면 일시적으로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있고 공황의 상태에서 한계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절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곧이어 절망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의 가치에 눈길을 주게 되면 어느덧 자살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곧 절망은 죽음이라는 등식으로 연결되어진다. 절망이 죽음이라는 등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이전, 절망이 죽음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등장하기 전에 [절망=죽음]이라는 등식을 해체해야만 한다. 마치 시한폭탄의 뇌관을 해체해 내는 작업처럼 인간가치의 존엄성을 단숨에 박살내는 절망이라는 뇌관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매달려야 하겠다. 일단 사람부터 살려 놓고 밥도 주고 복음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은주 씨가 1999년 카이스트로 데뷔를 해서 5년이 지나가는 어간에서 벌어진 일이니 이은주 씨의 한계리듬의 주기도 5년이라는 말이다. 우주에 독보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5년 주기의 한계. 그 증상부터 살펴보자.
둘. 5 년 주기 한계의 증상
▶ 자신의 생체리듬이 자신의 한계상황을 경고하고 있는 터이니 우울해지고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 보인다.
▶ 더 이상 아름다워지지도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도 않고 능력은 바닥이 났는데 요구되는 능력은 더욱 지고한 것을 요구받는 것에 대한 부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 극도로 예민해지는 감성과 비례하여 주변인들의 평상적인 대우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며 평상적인 대우에 대하여 조차 예민한 시각으로 뜯어보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 자신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품게 되고 가까운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즉 "나는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들은 평안하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지게 된다. 혹은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내 고통스러움에는 관심도 안 가져 주고 오직 돈만 벌어 오라고 하는구나. 그래 나는 돈이나 벌어다 주는 기계이다." 라는 비참한 생각이 거듭되어지고 깊이 생각되어진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수렁에 빠져 드는 것처럼 끝이 없이 추락하면서 반대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적개심이 발작적으로 나타난다.
▶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상황에 대한 고통과 고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 대한 "복수"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 동안 내 덕에 좋은 것 누렸던 사람들, 내게 실연의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 내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 나 보다 잘난 사람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이라는 대상이 뚜렷해지면서 이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깊어진다.
▶ 유언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신호를 주변에 알리며 자살을 준비한다.
셋, 오직 가치관 극복만이 해결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적인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만 해도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의 백성이 되었고 자녀가 되었다" (습 3:17)는 자신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철학으로 확고해지면 어떤 극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공부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 적당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칭찬을 받고 성장한 사람은 칭찬에 의하여만 움직여진다. 매를 맞고 성장한 사람은 매를 맞으면 움직여진다. 이는 훈련으로 습득된 동물적 본능으로 인하여 스스로의 판단력이 정지되었을 때에 그렇게 되어진다는 말이다.
곱게 자란 사람은 부당한 대우, 실연, 실직 등의 한계에 도달하면 한계를 극복해 나갈 정신력이 부족하다. 이에 대하여 훈련 받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5년 주기로 밀려드는 한계상황의 생체리듬의 파도가 덮치면 어찌되겠는가. 이유 없는 자살자의 분포를 보면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한계극복에 대한 훈련이 없었던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 (잠13:24). 부모의 초달은 자식이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면역력을 키워준다. 적어도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한 결과물에 대가가 따라온다는 정도는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요즘은 가정에서도 초달이 없어졌고 학교에서도 없어졌으며 군대에서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 사이에서도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왕따가 그것이다. 왕따를 당한 이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낫지, 왕따를 당하고서는 못살겠습니다." 어떤 사회구조가 되었던지 왕따를 당하면 못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의 특징이다.
가정에서 가정교육(잔소리)이 없어지고 초달이 없어진 채로 칭찬만 하고 있으니,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 칭찬이 없는 동료사회에서는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사회성을 교육해 주지 못하니 왕따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조용한 집에서 자란 자녀는 큰소리가 나는 환경에서는 움츠려들게 되어 있고 적혀 적응을 못하게 되어 있다.
칭찬이 교육의 왕도라는 일개 학습지 광고에 열광하며 칭찬으로 키워 온 부모가 어느 날 칭찬으로 키운 자식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현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허둥지둥해 보아야 이미 칭찬에 익숙해져 있는 자식의 사회성을 고쳐 줄 수는 없다. 성경대로 초달도 해야 한다.
▶ 교회교육까지 넘나드는 칭찬교육의 결과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자살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담임목사가 먼저 충격을 받게 되어 있다. 구약은 죄에 대한 심판과 징벌이 강조되어 있고 신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 없으면 사생자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사생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교회교육은 엄해져야만 한다.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단단히 가르치겠다"는 담임목사의 확고한 신념만 있으면 되는 이야기이다.
축복만이 성행하고 있는 교회. 죄에 대한 경고는 약에 쓸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는 교회. 오직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걷기 위하여 발해지는 경고 따위를 가지고서야 어찌 교회가 교회교육을 성실하게 행했다 하리요.
하나님께서도 자식을 위하여 부모는 초달하라 하셨거늘,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에 대한 경고가 빠져 있는 현대교회의 교육은 급변하고 있는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하여 향도해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신호등도 되지 못하고 이정표도 되어 주지 못한다. 여기에 구원에 이르는 더욱 더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 되어 줄 수는 없다.
이로보건데 앞으로도 자살자에 대한 슬픈 추도식이 많아질 전망이다. 유명인사에 대한 추도식이야 밖으로 드러나겠지만, 유명인사도 되지 못하여 잡초처럼 스러져 버린 청춘들에 대한 비참한 추도식은 또 얼마나 될 것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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