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문제 덩어리 [1] | ||
민족문제연구소는 무엇하는 곳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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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어 사용의 문제 사물과 대상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오는 해석은 제각각이다. 시각은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른 접근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성향에 따라 학문으로 접근했든 작품으로 접근했든 결과는 성향과 같은 결과물로 나오게 되어 있다. 문제로 보는 시각에서는 무엇이든, 언제나 문제가 나오게 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 간판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간판을 보면 대체적으로 그 업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다. 논문이나 책에서도 제목을 보면 중심주제를 알 수 있고 책장을 들춰 서설을 보면 개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말은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만 봐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집단인지 정체를 갈파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민족문제연구소는 무엇하는 곳인가? 1) 도무지 봐 줄 수 없는 용어 사용의 무지. “민족문제? 연구소” “민족”을 문제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인데, 문제로 보는 시각에는 문제의식이 발아되고 성장하여 문제아가 나온다. 한국의 경우에는 주사파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양쪽으로 갈리게 되어 있다. 더구나 휴전 중인 상태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저쪽은 적군이고 이쪽은 아군이다.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한민족을 말하며 한민족이라는 넓은 틀에서 친일파에 대한 과거사는 척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북한을 동포애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과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동포애를 말하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예수님처럼 북한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어찌하자는 것인가?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실예가 있다. 월남전에서의 일이다. 월남에 파병된 초보일병이 있었다. 전쟁이고 뭐고 아무 것도 적응이 되지 못했다. 사격술 훈련에서 총을 쏜 것 외에 사람을 겨냥한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일병이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적응이 되기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없다. 하여 베테랑 중사가 조장이 되어 초보 훈련을 겸해 정찰을 나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직감에 중사는 각자 흩어져서 정찰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발밑에 매설되어 있을지 모를 크레모어와 함정 그리고 지뢰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았던 초보일병이 발밑에 신경을 쓰며 부자연스럽게 걷다가 커다란 바위 앞에서 그만 나뭇가지를 밟아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리며 사방을 살피는데 바위 뒤에서 베트콩의 얼굴이 보이며 총을 겨눈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소년이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총을 겨누고 있었으나 서로 쏘지 못했다. 그 때 슬며시 나타난 중사의 손이 소년의 목을 꺾으며 단검으로 베트콩 소년의 목을 그었다. 소년이 죽으면서 뿜은 피냄새에 초보일병은 구토를 하며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사실에 온몸을 떨었다. 중사를 향해 극도로 증오의 눈빛을 보내며 울부짖는 초보일병에게 중사는 뺨을 후려갈겼다. 부대로 돌아온 중사는 초보일병에게 만약 베트콩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면 너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조국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운동장을 열바퀴 돌라고 명령했다. 이후 초보일병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몇 명의 전우를 잃고 난 뒤에 중사보다도 더 무서운 증오심으로 베트콩과 전투를 할 수 있었다. 6.25 동란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어른들은 인민군의 나이가 너무 어려 십대소년에 불과한 인민군들이 많이 생포되었다고 했다. 불쌍하여 슬쩍 놓아 주고 난 뒤, 도리어 그 소년의 총에 의해 죽은 국군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면서 인민군을 사람으로 보면 죽는다고 했다. 적과 적으로 만났을 때에는 친형제라고 해도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무슨 동포애 타령인가. 휴전 중이니 전쟁을 쉬고 있을 따름이다. 민족이 문제라? 사상이 문제이지 어떻게 민족이 문제인가. 6.25 전쟁은 사상 전쟁이지 민족과 민족이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다. 김일성의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벌어진 동족상잔이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남쪽과 북쪽의 민족에게 문제가 있었는가? 역사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쟁이 있기 전부터 김일성은 남한으로 송전되는 전기를 잘랐고 인민군을 통해 신의주선의 열차 통행을 막았다. 북한에서 내려오는 자는 전쟁준비를 위해 침투시킨 공작팀이었고 북한의 침략야욕을 몰랐던 남한인은 북한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6.25는 김일성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전쟁이었다. 남한의 국민들은 앉아 있다가 침략을 당했다. 그런데 전쟁의 참화를 입은 남한 민족이 문제가 되는가? 아니면 침략을 일으킨 북한 민족이 문제가 되는가? 단언하건데 민족문제연구소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것에 불과하다. 임헌영은 북한식 인민재판을 벌이기 위해 “친일파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친일파인명사전이 발간되자 충격에 빠진 인사들이 상당하다. 친일파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유명 인사들 중에는 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독립유공자들과 6.25 동란에서 찬란한 무공을 세웠던 인사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이분들을 치고 나온 임헌영은 부친과 부친의 4형제가 모두 좌익 활동으로 총살을 당한 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임헌영은 부자가 대를 이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임헌영의 가족사는 국민행동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되었다. 2)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사상적 좌소 “친일파 인명사전”을 발간하여 배포한 민족 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답은 “국민행동본부”에서 기자회견시에 발표한 내용에서 밝혀진다. 국민행동본부 등 自由애국진영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31일 서울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親日인명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북성향을 비판하며 연구소의 해체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한상범, 강만길, 강정구 등 소위 親北인사들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했거나, 현재 활동하면서 친일청산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이영민 대변인은 “임헌영씨의 부친과 부친의 4형제는 6.25사변 당시 모두 좌익 활동을 해 사변 직후 총살당했었다”며 “이는 임씨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 거주하는 친척들을 통해 직접 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임헌영은 남민전 사건으로 10년을 복역했다. 남민전은 80년대 주사파의 산파 역할을 한 김일성의 중간숙주였다. 임헌영이 연루되었던 남민전 사건은 다음과 같다. 3) 남민전 사건 “남민전, 金日成에 보고문 작성*혁명시 北지원 요청모의”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씨는 1979년 적발된 共産혁명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南民戰) 사건’ 등 두 차례의 공안사건 연루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남민전은 안용웅(安龍雄) 등이 월북해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통제를 받아왔고, 공산혁명이 이뤄지면 북한군에 지원 요청할 것을 모의했었다.이들은 공산혁명 성공시 중앙청에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를 준비했는데, 이 깃발은 74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등 8명이 입던 옷으로 만든 것이었다. 남민전은 자금마련을 위해 무장조직인 ‘혜성대(彗星隊)’를 조직한 뒤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 등에 들어가 강도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좌익사상범에서 전향한 소설가 김정익씨는 교도소內 남민전 연루자들과 겪었던 경험을 기반으로 1989년 ‘囚人번호 3179’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 책에서 김씨는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 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며 남민전이 교도소內에서 조직을 강화시켜 80년대 국내 좌익세력의 토대가 됐다고 주장했다. 실제 남민전 잔당들은 80년대 들어 主思派를 비롯한 좌익세력 형성의 산파역할을 했다는 것이 당시 운동권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反美’라는 반제국주의투쟁이 중요하다는 남민전의 투쟁노선 역시 80년대 좌익세력에 그대로 수용됐다. 당시 운동권에게 남민전 공소장은 인기 있는 교재였고, 검찰에서 만든 남민전 공소장의 핵심적 내용은 추려져 대학가서점에서 판매됐다. 1983년까지 복역한 후 대통령 특사(特赦)로 출소한 임헌영씨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직 이외에도 ‘사월혁명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사월혁명회는 1988년 사월혁명연구소로 설립된 단체이다. 사월혁명회의 前身인 사월혁명연구소 소장을 지낸 윤성식은 1998년 10월 越北, 현재 북한 조선로동당 외곽조직인 ‘在北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在北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49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투옥됐다 50년 6*25사변 직전 월북한 최태규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만든 대남혁명조직이다. 윤씨 역시 ‘한국민족민주전선’ 등 對南 선전자료에 자주 이름이 오르는 인물이다. 그가 지난 해 8월26일 노동신문에 기고한 글을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위대한 장군님의 그 뜨거운 로고(노고)와 심혈 헌신의 자욱마다 내 조국의 번영의 길이 열리고 인민의 행복이 꽃피는 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통일성업에 여생을 깡그리 바치리라” 윤씨는 지난 1월1일 평양방송에 출연해 “민족자주*반전평화*통일애국 공조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바칠 것”을 선동하기도 했다. 윤씨가 역설한 3대 공조는 같은 달 말 국내 친북운동권의 통일구호로 일제히 채택됐다. (미래한국, 2005-09-03 23:4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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