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거친 숨소리 문학 '하악하악' | ||
거친 호흡 속에 담긴 세상을 향한 사랑의 방정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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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형식 논설위원, reverend1@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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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작가의 작품세계에는 독특한 면면이 눈에 뜨인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점은 치열한 전투의식이다. 작가는 자신의 필 끝에서 녹아 나오는 잉크의 색깔만큼이나 짙은 전투의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국내의 몇 안 되는 실험적 실천 작가이다. 특히 작가의 독특한 색채의 언어구사의 정도는 가히 감탄할 정도의 필살기까지 감춰져 있다. 예를 들면 “옵하”가 그것인데, 오빠가 아닌 옵하는 욕정을 가득 담은 육감적인 입술로 닭똥구멍같이 잔뜩 오므렸다가 힘을 주어 찍하고 내갈기는 것 같이 선명하다. 여인이 쾌감의 절정을 예감하고 잔뜩 교태를 부리면서 잠자리로 유혹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여기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러니까 이외수 작가라는 기인과 연결하여 생각을 해 보면 상당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외수의 옵하란 모든 오빠 들 중에 가장 뛰어난 오빠. 즉 오빠 계의 대통령에 비견할 수 있는 “각하”와 동일본질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외수 작가의 독특함 때문이다. 타인과 차별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고집하는 것과 그가 이룬 작품세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묵향 때문이다. 도대체 하악하악은 또 무언가. 하악하악에는 짙은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솟구친다. 그 솟구치는 숨소리에는 용암과 같이 뜨겁고 끈적끈적한 유황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독자에 따라서 클라이막스를 향한 고군분투라고 볼 수도 있겠고, 이외수 작가가 자신의 문학세계를 체계화하기까지의 치열한 내력을 ‘하악하악’이라는 숨소리로 풀어낸 것일 수도 있다. 하악하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털석, 2장 깬다. 3장 대략난감, 4장 캐안습, 5장 즐! 이다. 인터넷 용어가 적절히 구사되어 있는 하악하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살아 온 치열한 전투의식의 시각으로 현실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개성이 강한만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이외수 작가의 작품 속에서 끼쳐지는 작가의 숨소리를 들어보자. 그러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정도가 가늠될 것이다. 먼저 작품의 특징을 분석해 보고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 끼쳐질 수 있는 영향력의 범위를 유추해 보자. 여기까지 가면 이 작품이 한국 문학에 끼칠 가치에 대한 평점의 정도가 대략 나오지 않겠나 싶다. 이외수 작가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칼>, <들개>,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괴물>, <장외인간>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겨울나기>, <장수하늘소>, <훈장>이 있다. 우화집으로 <사부님 싸부님>, 에세이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뼈>, <날다 타조>, <외뿔>,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바보바보>,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를 발표했다. 시집으로는 <풀꽃 술잔 나비>가 있고 시화집으로는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와 <글쓰기의 공중부양>, <하악하악> 이 있다. 1. 특징 분석 이외수 작가는 거친 호흡으로 세상과 만나는 순수작가이다. 자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독특한 작품의 세계와 자신의 문학체계를 세운 한국 문단의 몇 안 되는 자기 세계가 있는 작가이다. 이외수의 문학은 글로 숨을 쉬고 숨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그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짧고 깊고 거칠게 호흡되고 있다. 대략 난감할 정도까지 숨소리의 기복이 심하다. 작가는 하악하악하고 숨을 몰아쉰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마치고 숨쉬기를 하면서 숨을 고르는 양태와 같다. 그만큼 치열하게 달려 왔다는 것인가. 작가는 장편소설 7권과 단편소설 모음집 3권과 에세이집만 10권 등 총 25권의 작품을 발표했다.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근황을 보면 현재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숨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에 몰두 해왔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작가는 평생 동안의 작품 활동을 위해 금연을 실천했고 이로 인해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까지 단호히 끊어냈다. 때문에 이외수의 작품 활동은 일반 작가들의 작품 활동과 차별성을 가진다. 그 치열함이 특공대적이며 전투적이다. 당연히 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다. 하악하악은 짧고 깊게 들이쉬는 들숨과 짧고 굵게 내쉬되 숨소리를 최대한 절제된 날숨이 함께 호흡된다. 이 호흡은 이외수 작가의 작품을 통해 토악질의 한 표현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전투적인 치열한 삶의 양식으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외수 작가의 문학은 “실험적 문학”이며 사실성에 지번을 두고 있는 “사실적 문학”으로 평가된다. 작가는 에세이집 “외뿔”에서 물풀을 추적했다. 추적한 내용은 작가의 영혼 주머니 속에서 해체되었고 소화되었다. 소화된 내용을 보자. 해탈의 경지를 알고 싶으면 물풀을 보라. 물풀은 화사한 꽃으로 물벌레들을 유인하지도 않고 달콤한 열매로 물짐승들을 유인하지도 않는다. 봄이면 연둣빛 싹으로 돋아나서 여름이면 암록빛 수풀로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다갈색 아픔으로 흔들리다 겨울이면 조용히 스러지는 목숨. 그러나 물풀은 단지 물살에 자신의 전부를 내맡긴 채 살아가는 방법 하나로 일체의 갈등과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생명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지대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물살과 합일된 상태로만 흔들린다. 진정한 사랑도 합일에 있고 진정한 깨달음도 합일에 있다. 모든 선각자가 이구동성으로 도는 하나라고 설파한 사실을 물풀의 흔들림에 근거해서 한번쯤 깊이 숙고해 보라. (본문 중에서) 책 소개를 통해 제시되어 있는 물풀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깨달음을 뜻하는 “도”로 승화되어 있다. 물풀 하나에서 천지조화를 추적해내는 작가의 치열함은 물풀의 사계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양태를 추적하여 결국 자연을 통해 깨우침을 얻으라는 아포리즘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사랑의 진수는 합일에 있고 자연과 합일되어 소통하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인생다운 인생이 된다고 말한다. 한낱 풀줄기에 불과한 물풀을 대상으로 사계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며 변화되는지를 추적해 내는 작가의 정신은 실험적 문학이며 사실적 문학으로 특정할 수 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실험적 문학은 창작성보다는 비판성에 무게가 실리게 되어 있다. 이외수 작가의 작품들이 비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가는 사물을 비판적이라 할 만큼 근원을 파고들면서 보는 버릇이 있다. 때로는 할퀴고 때로는 발가벗기고 때로는 물어뜯는다. “들개”가 그러하다. 1985년에 발표된 들개는 다시 해냄 출판사에서 이외수의 오감소설 야성편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시 등장했다. 야생에서 자란 들개로 설정된 문학지망생인 여주인공과 들개를 그리고 싶어 목마른 화가지망생인 남자주인공은 길들여진 집개로 설정되었다. 두 주인공은 치열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고된 작업 에 몰두한다. 불감증이었던 여주인공은 들개를 완성한 화가지망생과 몸을 섞으면서 극치감을 맛보며 불감증에서 해방된다. 들개를 완성한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불감증을 치료해주고는 죽는다. 희열을 맛본 대가치고는 엄청난 대가이다. 마치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하와가 자식을 생산하는 고통을 지불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장외인간” 1권에서는 해파리 떼, 메뚜기 떼, 고래의 떼죽음이 나오고 2권에서는 갑자기 달이 없어져 버렸다는 황당한 설정으로 좌충우돌하면서 달맞이꽃을 찾아다닌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외수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서 외면을 받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이외수 작가의 독특한 문학세계와 한국문단의 환경에 있다. 해방과 육이오를 거의 같은 시차 대인 1950년대에 겪은 한국 문단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상적 대립의 이유를 다만 현상적인 것에서 찾았다. 양자의 차이는 근원적으로 생각의 차이이며 생각의 차이는 발상의 차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오랜 시간이 흘러가고 난 뒤에 밝혀진 것이다. 이 동안에 유신과 민주화 운동이 겹쳐지면서 아침이슬같이 투명하고 영롱한 창작의 가치는 무뎌지고 말았다. 과거 동반작가 시절 순수 문학인들까지 동반작가로 넘어갔던 이데올로기의 실상은 1991년 공산주의가 멸망을 하기까지 끈질기게 한국문단과 순수문학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이데올로기적 작품이 민주화 운동의 정신으로 오인되면서 한국 문학은 이데올로기적 작품에 천착하게 되었고 세계 문학계와는 급격히 멀어졌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1970년대부터 2005년까지 무려 35년 동안 외국어로 번역된 한국 작품은 겨우 197종에 그쳤다. 문화관광체육부에 소속된 한국출판번역위원회의 조사결과로 드러난 한국문학의 실상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같은 기간 일본은 무려 10만종에 달하는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세계 문단에 발표했다. 일본 작품은 한국어로만 2만종이나 번역되었다. 이와 반하여 민주화를 통해 유신독재를 몰아내고 외세에 의해 한정되는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 서구문명을 몰아내야 한다고 외쳐 댔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는 한국 문단이 나가야 할 방향타를 이데올로기적 문제작으로 국한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한국의 독자들은 세계 문단에 내 놓을만한 한국 작품에 목말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문단의 이단아로 찍힌 이외수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서 외면을 받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천편일률적이며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작품문학은 고등학교 졸업 후 무려 80%가 대학에 진학을 하는 한국의 식자층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이외수의 실험적 문학이 한국 독자층들의 다양한 욕구에 어느 정도 반응하면서 빈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1) 실험적 문학 물풀이 사계에 따라 변화하는 양태를 추적한 이외수 작가의 작품은 두 개의 뼈대를 가지고 있다. 실험과 사실이 그것이다. 실험과 사실은 이외수 작품의 표현양식을 구성하는 기본 양식의 뼈대이다. 일견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실험정신과 사실정신은 이외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기본가치이며 향후 한국 문학이 나가야 할 한 지점을 제시한다. 이는 작가의 창작발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며 이외수 문학의 한 갈래가 파생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이 목적하는 사실적 표현을 위해 기상천외한 실험도 서슴없이 감행했다. 언론에 소개된 이외수 작가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작가는 한겨울 계곡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나와서 사실을 표현했다. “살을 저미는 추위” “살갗을 찢는 것과 같은 냉기”가 그것이다. 살을 찢는 것과 같은 혹독한 추위를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계곡의 얼음을 깨고 얼음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 때문에 이외수가 사용한 어휘는 다른 작가가 표현한 동일한 어휘와 차별된다. 이 차별은 실험을 통해 증명된 어휘구사임으로 실험적 증명 혹은 과학적증명이라는 차원을 갖는다. 혹자는 이외수 작가를 가리켜 고독한 작가, 고통을 즐기는 작가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이외수 작가의 실험정신 때문이다. 고통은 모든 장르의 작품에서 고르게 채용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고통을 어두움으로 정의하고 상대개념인 밝음 혹은 빛으로 승화시킨 작품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냄새로 표현하거나 맛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로 활용한 작품들도 있다. 일예로 이효석 작가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은 인생의 고통을 어두움으로 정의하고 밝음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허 생원은 그의 분신인 수나귀와 함께 암울한 색깔로 표현된다. 갈기는 빛을 잃어 부석부석하고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그 몰골이 할아범과 같다. 작가는 수나귀를 조연으로 채용되어 허 생원의 몰골을 수식했다. 그래도 암 나귀 옆에 가면 발정하는 통에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곤 한다. 이 모습을 보며 허 생원은 속이 상한 나머지 수 나귀를 때리는 것으로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과 아픔을 표현한다. 그래도 수나귀에게는 똘망똘망한 2세가 있다. 허 생원은 자신이 얽은 얼굴만큼이나 얽은 인생을 자조한다. 수나귀보다 못한 인생이라고 자조하고 있는 사이에 훌쩍 성장한 동이가 등장한다. 과거 단 한 차례 성 서방의 딸과 지낸 하룻밤의 인연으로 생겨난 자식이다. 허 생원에게는 모르는 아들이다. 자식의 아들이 있음도 모르는 채로 지나간 세월과 아들이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던 세월이 교차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고통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본질의 고통이다. 허 생원의 고독과 슬픔은 평생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한의 고통이며 동이의 고통은 아비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 고통이다. 아들의 한과 아버지의 한은 각각 동 떨어진 시공간에서 고통하고 작품 속에서 만남의 때가 조율된다. 어두움과 밝음의 교차점은 새벽으로 설정되었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가는 어스름한 시간대. 밤이라고는 하나 달빛이 메밀꽃에 눈처럼 반사되어 밤의 어두움이 희석되었음으로 구태여 밤이냐 낮이냐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단지 여명이 터오는 새벽하늘과 같이 어두운 과거의 한은 물러가고 밝음으로 가득 찬 밝은 미래가 열릴 뿐이다. 허 생원, 성 서방의 딸, 동이. 이 셋은 각각의 시공에서 살아왔던 주인공들로 이제는 하나의 시공으로 합하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삶, 밝음, 빛, 행복, 미래, 채움, 완성의 의미로 부각된다. 그런데 이외수 작품에서의 고통은 치열한 도전과 전투에서 파생되는 어쩔 수 없는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정으로 묘사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의 고통은 권선징악의 형태로 귀결되어 작가의 의도가 권선징악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대체로 서정적이거나 목가적인 색체를 가진 작가들은 권선징악의 형태로 작품을 마무리하여 독자들에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반면 실험적 작품이나 문제 작품을 선호하는 비판적 시각의 작가들은 여운이 꽤 오래가는 문제의식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이외수의 작품은 양쪽을 다 비켜가면서 이외수적인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맛으로 표현하면 떫은맛이며 냄새로는 구린 냄새가 감각된다. 2) 사실적 문학과 창작과의 함수 이외수 작가의 일화 중에 개집에서 개와 함께 자고 개밥을 빼앗아 먹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있다. 대체적으로 대개의 작가들은 이외수식의 고백을 하지 않는다. 무용담이거나 혹은 자랑 할 내용을 고백의 형태를 빌어 서술하기 마련인데 이외수 작가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무명시절에 고생한 내력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야기 한다. 그만큼 고생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정직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정직과 양심이 작품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사실적 문학과 창작과의 사이에는 함수 관계가 성립된다. 실상 창작은 사실 혹은 역사라는 몸뚱이에 옷을 입히거나 맨얼굴에 화장을 하고 치장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에 허구를 입히든 허구에 사실을 입히든 지어낸 말이 있어야 창작이 되고 작품이 만들어진다. 상상력이 풍부해야 창작을 할 수 있다. 순수한 한국말로 뻥이 있어야 창작이 된다는 뜻이다. 뻥이 없으면 상상력이 나오지 못하고 상상력이 없다면 언어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실적 문학과 창작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괴리가 있다. 이 괴리를 얼마나 좁히느냐에 따라 좋은 작품이 탄생된다. 창작이란 수많은 단어와 어휘를 많이 안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맛깔스럽게 표현해 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똑 같은 기본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요리사에 따라 그 맛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외수 작가가 고백한 개집과 개밥에 관한 고백과 들개 등의 작품 사이에는 함수가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한정되고 제약받고 있다는 함수가 그것이다. 이것은 사실적 문학에 지번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 문학은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실적 문학의 한계는 보고 듣고 맡아 보고 촉수를 해 보아야 창작할 수 있다는 한계이다. 르포작가라면 필수요건이나 소설가의 경우에는 상상력이 우선 한다. 어떤 작가는 사진만 보고도 그 지방의 특성이나 문화를 정확히 끄집어내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더 뛰어난 묘사를 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작가는 반드시 그 지방에 가서 몇 달씩 살아 보고 난 뒤에야 겨우 특징을 잡아내고 묘사를 하는 작가도 있다. 이는 작가가 살아온 배경과 작가의 본질적 상상력의 차이인데 소설가의 경우 살아온 배경보다 본질적인 상상력이 우선한다. 가령 중고등학생 시절에 왈패로 좀 놀아 보았던 작가는 조폭시리즈물에 강하다. 김홍신 작가의 인간시장에 등장하는 장총찬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꽤나 놀아 본 친구이다. 김홍신 작가가 학창시절에 범생이었다면 장총찬과 같은 주인공을 내세워 인간시장을 쓰지 못했을 일이다. 뉴스에 나왔던 모 작가는 조폭시리즈를 쓰기 위해 조폭들에게 생활비까지 제공해 주었으나 불발로 그쳤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을 내세워 주인공을 만들어내야 하는 창작은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특성과 문화적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세밀하고 깊이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다. 사람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가에 따라 작품성의 질과 격조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 면에 있어서 이외수 작가는 폭이 좁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유아독존적인 대목이 대체적으로 많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내용 중에 파브르의 예를 든 점을 봐도 그렇다. 2. "하악하악" 중에서 주제가 선명한 내용 이외수 작가의 하악하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털석, 2장 깬다. 3장 대략난감, 4장 캐안습, 5장 즐! 이다. 이중에 리뷰가 달려 있는 글 몇 편을 골라 일치되고 있는 내용을 임의로 선별해 보았다. 주제는 실패, 비난, 돈, 항상, 인간관계이다. 1)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길을 가던 내가 잘못이냐 거기 있던 돌이 잘못이냐, 넘어진 사실을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신이 길을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히 잘못은 당신에게 있다.(19) 2) 이외수가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라는 산문집을 내자 평소에 이외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내 하나가 자기 블로그에 비난 글을 올렸다. 자기가 여자도 아니면서 여자에 대해 아는 척 책까지 묶어내는걸 보면 이외수는 분명히 사이비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어본 이외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파브르는 곤충이라서 곤충기를 썼냐" (43) 3)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돈을 욕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 같은 놈의 돈, 원수 놈의 돈, 더러운 놈의 돈,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든 물건이든 욕을 하면 더욱 멀어지기 마련이다. (75) 4) 한 가지 일에 평생을 건 사람에게는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이 무의미하다. 그에게는 오늘이나 내일이 따로 없고 다만 '언제나'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150) 5) 그래 주변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대가 '안심하세요. 제가 있으니까요.' 라고 말해주면 그대를 믿고 안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요. 가족조차도 그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인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256) 3. 이외수 문학의 중심은 “삶의 자리” 이외수 문학의 화두는 “삶의 자리”이다. “실패, 비난, 돈, 항상, 인간관계”를 주제로 삼은 것은 이외수 문학의 화두가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은 미래의 삶으로 나아가는 현재이며 과거의 연장이다. 따라서 삶은 진솔해야 하며 진실 그대로가 되어야 한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계곡물의 차가움을 몸소 겪어보고 나서 “이렇게 차갑다”로 표현하는 경험적 사실 주의는 실상 실존주의 철학에서 찾아지며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비평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궁켈의 “삶의 자리”론에서 찾아진다. 궁켈은 텍스트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평의 새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궁켈은 “그 시대의 삶의 자리”론을 해석의 새로운 양식으로 제시했다. 그 시대의 문화, 언어, 삶의 양식 그대로를 토대로 조명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궁켈의 해석방식인 “삶의 자리”론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더 정확한 해석을 위한 정보는 당대의 역사와 문화에 녹아져 있기 때문에 당대의 삶의 자리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야 한다는 지론은 이후 역사비평, 문화비평으로 분류되면서 문서비평과 차별되었다. 궁켈의 비평양식은 학문과 학문의 경계를 그어주는 지계석이 되어 19세기 이후 다양하게 분화된 학문의 경계를 한정했다. 이외수 작가는 새벽에 일어나 맞이하는 풀잎에 맺힌 진주보다 더 영롱한 아침이슬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 했고 이를 토대로 사색하고 싶어 했다. 그가 호반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춘천을 버리고 강과 계곡의 도시인 화천으로 삶의 자리를 옮긴 것도 새벽이슬의 영롱함을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수는 항상 자신의 주변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보았다. 가끔은 보듬어 보면서 가끔은 할퀴어 보기도 하면서 지구력을 가지고 오랜 시간 사물을 지켜보면서 그의 독특한 해학을 작품 속에 담았다. 그의 시화집인 하악하악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2장에 나열되어 있는 깬다 시리즈에는 다음의 유머가 들어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몽달귀신이 변기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게 물었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내가 대답했다. 닥쳐, 멍청한 놈아. 이건 비데야. 나이 60줄에 들어선 작가가 이런 류의 유머를 말하기는 실상 쉽지 않은 일이다. 콕 집어서 뭐라고 면박을 줄 수도 없다. 썰렁하다는 말이나 혹은 주책이라는 말 따위는 작가에게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외수 작가는 이런 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젊은 층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끼워 주려나 안 끼워 주려나 하고 저울질하며 기웃거리는 성격이 아니다. “너희들 뭐하냐? 그거 재미있냐?”하고 끼어들어 그 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외수는 다음 장면에서 호들갑을 떤다. 호들갑을 떨면서 은근히 자신은 초딩하고도 어울릴 수 있는 꽃노털이라고 자랑한다. “어떤 초딩이 이외수의 사진을 보고 나 이 사람 누군지 알아 라고 말했다. 엄마가 대견하다는 듯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 그러자 초딩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모수야.“ 이렇듯 이외수는 대중과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대중들이 쳐다보면 불쑥하고 나올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의 유머감각은 대체적으로 녹슬지 않았고 1980년에나 쌈박하게 통했을 정도의 유머실력을 가지고도 오만가지 멋을 부리는 꽃노털 옵하이다. “꽃노털 옵하”는 대중과의 소통에서 나온 용어이다. 옵하로 불러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어색했는지 그 앞에 꽃노털을 붙였다. 노털이라고 해도 좋으니 불러만 달라는 요구이며 자신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주문이다. 이외수 문학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 어울리는 문학이며 그의 삶의 자리는 언제나 자랑스럽게 공개되고 있다. 방송국의 PD는 이렇듯 현실과 소통하고 있는 꽃노털 옵하를 찾아 카메라를 들이댄다. 카메라를 의식한 이외수는 맨발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열거한다. 가끔 자신이 도를 닦고 있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바른 자세에서 청명한 정신이 나오고 청명한 정신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고 싶은 욕망이 가부좌 자세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니 종아리 보다 커다란 발바닥만 보인다. 비리비리한 몸매에 길게 늘인 꽁지머리와 수염. 요래요래한 종아리는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을 받쳐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화천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고 난 뒤에는 유여해졌는지 손님을 초대하여 이리저리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인상을 당겨준다. 이외수는 카메라 앞에서 담배를 끊고 난 뒤에 해야 할 일로 행복한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삶의 자리가 행복해지고 유여해지니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눈빛에는 행복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이외수 작가는 쌈닭과 같은 투계소설에서 벗어나 행복소설을 씀으로 순수작가로서의 전원적인 행복론을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가치는 실상 에세이나 산문집은 비평을 가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소설의 경우 플롯과 반전의 구조가 완벽한지, 주인공들에 대한 스펙트럼의 배치 그리고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들의 아포리즘의 배열, 통일성, 감동의 정도를 따지게 된다. 객관적인 점수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비평가의 입장은 자신의 취향과 시각에 따라 가치를 품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에세이나 산문집은 형태 자체가 아포리즘이기 때문에 비평을 가할 요소가 없다. 자신이 체험하여 체득한 지혜를 농축해 놓은 것이며 옳은 말만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세이나 산문집은 비평할 수가 없다. 다만 가치는 평할 수 있다. “꽃노털 옵하”, “하악하악”이 가지고 있는 아포리즘의 가치는 상상 외로 크다. 먼저 이 두 개의 단어는 각각의 개체로서 독립적이나 생각과 생각을 서로 연결하여 소통을 구동시킨다. 늙은 소설가, 늙은 시인이라는 뒷방 신세의 노털들을 안방으로 끌고 나오는 견인력이 있다. 세월과 함께 늙어가면서도 하악하악 된 숨소리를 내면서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노털들에게 박수를 쳐 달라는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흡인력이 있다. 대체 뭐를 하는데 저리 된 숨소리를 내나 하는 흡인력이다. 독자는 작가와 책으로 만난다. 책으로 만나기만 할 뿐 작가가 늙어가는지 해구신이라도 먹고 회춘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외수는 꽃노털 옵하로서 젊은 미녀들과 소통하고 있다. 고달픈 삶에 지치고 마음까지 쩌 들어서 불감증에 걸려 있는 부인들을 향하여 하악하악 하고 된 숨소리를 들려준다. 그리하여 한 번 쯤은 다시 된 숨소리를 내면서 자지러지고 싶다는 꽃불을 담고 남편의 눈짓에 따라 침대로 따라간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이만하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얀센은 “감성과 꿈이 있는 스토리가 경제를 창출해 낼 것이며 미래의 성장 동력”이라고 했다. 스토리가 있다면 돈과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되는 스토리는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때문에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스토리는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만들어진 스토리를 써먹기 위해서는 형상화시키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스토리에 꿈과 감성을 입히는 작업을 말한다.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시키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꽃노털 옵하, 하악하악은 이외수 작가의 등록상표이자 이외수 작가를 설명하는 등식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 어휘가 냉전 상태에 있는 부부들을 침실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외수 작가의 작품의 가치는 이혼을 앞둔 부부에게 있어서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왕이면 꽃노털 옵하가 하악하악하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노라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아쉬움이다. 30년 세월을 문학에 몸 바친 이외수 작가라면 수많은 작가지망생과 현역 후배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에 기여해 달라는 당부쯤이야 못하겠나. 꽃노털 옵하라는 어휘 하나에 뒷방 신세가 된 노털들이 안방으로 나오고 있는 중인데 이 노털들에게 죽을 때 죽더라도 노벨문학상을 타서 조국에 바치고 죽으라고 일갈한다면 후배작가들도 기를 쓸 것이 아니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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