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작품 내용을 중심으로)
1. 이효석 작가에 대한 이해
작가 이효석의 감성적 특징
이효석 작가(1907~1942)는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 동안의 생애를 살며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겨우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국가를 잃은 국민이며 시대의 지성인으로 실향 의식을 지닌 채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이상향을 찾아 헤맨, 일종의 보헤미안 내지 코스모폴리탄적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
이효석의 감성은 섬세하고도 유약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주변에 대한 예민한 대타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의식하며 살았는데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복장을 잘 차려 입고 다녔고, 총독부에 취직한 후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못 견뎌 괴로워하기도 했다.
이효석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필력은, 사람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정확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해석력이 뛰어나 사람의 심성과 자연 정경을 묘사하는 데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한 정도의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필력은 이효석의 가치관에서 출처되었음이 분명한데, 이효석은 나날의 일상에서 예술과 어우러지는 하루하루의 삶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인간 중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시와 문학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 했다. 그는 평소에 말하기를 “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이 삶이 전부인 정통작가였다.
시대를 한 걸음 앞서 간 이효석의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보여 지는 삶의 행태를 보자. 그는 빵과 버터 등의 음식과 커피 그리고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를 즐겼으며 프랑스 영화감상을 기뻐했다. 마치 오늘 날의 일상을 보는 것 같다. 당시 일제시대라는 특성으로 볼 때 어디 감히 일반인이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생활이었겠는가.
이효석은 평양에 있는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했는데, 그의 정원에는 서양 화초가 가득 둘렸고, 유럽여행을 꿈꾸었다. 그의 서구적 취향은 신학문을 배우고 서양문화에 일찍 눈을 뜬 아버지의 영향, 고교와 대학시절 동안 읽은 서양 소설들, 대학에서 전공한 영어영문학, 외국인 교수와 만남, 주을온천 일대에서 직접 체험한 백계 러시아인의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되어진다.
생애
이효석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장르는 소설에 중심을 두었고 습작기에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하는 등 산문과 운문의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 유명세를 타고 난 뒤부터 상당히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으며, 문학가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경성농업학교 교사(1931 - 1934), 숭실전문학교 교수(1936 - 1938),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1938 - 1942)로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교직에 있으면서 그는 영어영문학을 가르쳤으며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맨스필드의 시를 낭송해주는가 하면, 입센, 토마스 만, 콕도의 작품을 해설해주기도 하며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이효석은 봉평과 서울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평창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하거나 풀밭과 거리에서 놀았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山果), 꿀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경험은 고향과 자연을 그린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이효석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졸업 후 결혼 초기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고교 시절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며 기숙사에서 체홉과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과, 토마스 만, 캐서린 맨스필드 등의 심미주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대학을 다닐 때 이효석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학교에 자주 출석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그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서울 수송동에서 초라한 하숙생활을 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으나 문인, 연극인, 영화인과 어울려 다니면서 화려하게 보이는 생활을 했다. 부인 이경원을 만나 결혼하게 되어 수송동에 신혼방을 마련하였다.
이효석은 1932년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이효석은 가까운 바다, 특히 독진 해변을 자주 찾으면서 바다와 결혼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다에 매료되어 해변을 걷기도 하고 해수욕을 즐기며 가보지 못한 먼 이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그는 도시생활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연의 모습을 만나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효석은 경성에서 당시 러시아와 가까운 국경도시였던 나남과 백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던 주을온천을 찾으며 이국풍의 풍경을 많이 접했고, 나남의 찻집 '동'을 찾아 서양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며 서구의 분위기에 젖기 시작했다.
이효석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리 일명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두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생활, 작가로서 유명한 생활을 이어 나가며 「모밀꽃 필 무렵」과 같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활발한 사회생활과 함께 주을 온천과 동해안 등 관북지방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했다.
그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해 1940년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그는 1942년 5월 3일 고열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5월 7일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한 후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10일이 지나자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5월 22일 의사로부터 단념적 선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5월 25일 아침 7시 30분 짧은 삶을 마감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 그의 아버지는 시신을 화장, 운구하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매장하였다.
그 후 그의 묘는 1973년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지가 훼손될 위험이 있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 변으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1998년 9월 경기도 파주시 경모동화공원으로 옮겨졌다.
이효석이 세상을 뜬 후 세 차례(1959년 춘조사, 1971년 성음사, 1983년 창미사)에 걸쳐 전집이 발간되었으며 수백여 종에 달하는 작품집이 발간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성이 뛰어나 1948년 이후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모밀꽃 필 무렵", "산", "들", "돈(豚)" 등의 소설과 "낙엽을 태우면서", "화초", "청포도 사상" 등의 수필이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자료출처 : 이효석 문학관)
2. 작품의 특징(작가와 독자의 공감)
이효석 작가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은 일제의 강점기인 1936년에 발표된 토속적인 작품으로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의 평민 구조와 문화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엿볼 수 있는 자료를 공급해 준다. 독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의 무대는 메밀군락지를 따라 봉평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메밀꽃밭 길이며 장터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일탈하여 제천까지 무대를 넓혀 인간 삶의 동적인 문제이며 벗어날 수 없는 주제인 희, 노, 애, 락의 문제를 작품 속에 내재시켜 일정한 시간 동안 잠복시켜 놓고 숙성시킨다. 잠복되어 있던 희, 노, 애, 락 의 주제는 제천까지 넓혀진 무대에서 20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충분히 숙성되어진 맛으로 독자의 미각을 사로잡는다. 이효석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필체는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들에게 싸아하면서도 구수한 통메밀 국수의 감칠맛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사실적인 묘사는 마치 현미경으로 살펴보는 듯 세밀하다.
줄거리의 구성은 전체의 틀이 하나의 문단과 같이 단순하고 통일되어 있어 마치 아는 길을 찾아 가는 것과 같이 전혀 막힘이 없고 단숨에 읽어 내리게 되는데 읽은 후의 뒷맛이 개운하고 시원하다. 드팀전이라 불리는 방물장수 허 생원과 늙은 수나귀는 서로가 한 운명이며 한 몸과 같은 양태로 나타난다. 봉평 장터에서 각다귀들에 의해 발정한 수나귀와 그 장면을 보고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모르는 왼손잡이 허 생원의 한 서림은 작가의 현미경을 통해 해부되어진다. 해부되어진 허 생원의 굴곡진 인생은 구릿하게 표현되어지며 한편으로는 동정되어지는데, 허 생원의 연륜이 쌓여진 인생길의 사연을 동이의 사연과 동반시키며 슬며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의 고리로 묶는다. 작가의 묶는 시도가 진행되는 동안에 독자는 허 생원의 부인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음 장면에 펼쳐질 녹록치 않은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암시받으며 작품에 빠져든다. 작가는 이 장면부터 독자와 고도의 머리싸움을 하게 되는데, 결과는 독자의 케이오 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대단한 작품이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과 이야기의 줄거리에 숨어 있는 뼈대는 이 작품이 유려하면서도 속이 깊은 작품임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것은 마치 정오의 햇빛에 꽁지를 드러낸 물고기의 편린이 반짝하고는 이내 물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과 같아서 대체 호수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고 지금은 물속 어디만큼이나 도망갔을까 하는 흥미를 유발하는 것과 같다.
마치 눈앞에 명화를 놓고 감상하고 있는 듯, 어찌 보면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어 놓는 작품이다. 줄거리 내용 구성의 한 장면 한 장면에 치밀하게 잘 짜인 조직구성과 세련된 표현기법이 단연 돋보인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며 적당히 도전하면서도 독자의 요구사항에 충실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작품의 빼어난 완성도로 인하여 교과서에 실려 단편소설의 기준이 되어 있다.
작가는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제목부터 마치 여름날 밤 멍석 위에 앉아서 더위를 식히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이 그대로 연상되어지지 않는가. 멍석위의 이야기꾼들에게는 시원한 막걸리와 메밀국수가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김치두부라도 있다면 호사가 아니겠던가. 여름날 밤의 이야기. 선녀의 목욕하는 장면이 눈앞에 삼삼하게 펼쳐지는 하늘의 꿈 이야기처럼 구수하면서도 무언가 한 가지 비밀 정도는 담겨져 있을 이야기의 제목으로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목에서부터 곧바로 메밀로 만든 시원한 막국수가 연상되어지는 제목이 만들어졌다. 다음은 국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꿩 한 마리를 통째로 넣고 꿩의 뼈 국물로 국물을 잡았다. 꿩으로 우려낸 최고의 국물 맛은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이어지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길’이다. 이 국물을 얼음물에 식혀 차게 만들어 ‘장터’라는 우유 빛이 감도는 커다란 자기 사발에 담고는 20년 전, 첫사랑이라는 ‘편육’과 감춰져 있던 마눌과 아들이라는 ‘양념장’에 죽도록 얻어터지고 견디다 못해 도망 나와서 장꾼이 되었다는 아들의 고백이라는 ‘고명’을 듬뿍 얹어 상에 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유난히 맛있고 시원하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그 위로 여름밤의 달빛이 비쳐지고 메밀꽃에 반사된 달빛은 교교하게 흐르고 있다. 마치 강물이라도 되는 양 유유히 흐르고 있는 유속이 빠르지 않은 강물로 연상되어지며 독자의 시선과 마음은 고요한 상태로 이완되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음 장면의 전개에 대한 호기심으로 작품의 늪 속에 빠져 들게 만들어 놓고 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독자는 등에 진 방물의 무게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소리가 달라지는 늙은 나귀의 뒤로 허 생원과 조 선달 그리고 장터에서 만나 일행이 되어버린 동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정경은 그대로 수채화가 되어 세밀한 그림이 그려지도록 작품은 전개되어 간다. 드디어 연륜이 쌓여 있는 나귀와 허 생원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며 독자들이 고대하던 비밀스러운 옛 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옛 이야기로 회상되는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 멱을 감기 위해 옷을 벗으려고 들어간 물레방아 간에서 성서방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등장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마른 침을 삼킨다. 어쩌면 구릿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남여의 섹스 문제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작가의 필은, 예리하게 여인의 감성과 눈물을 성 서방네 가정의 위기와 대비시키고 여인의 눈물을 보고 몸과 마음 전체로 덮어 주는 한 남성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서곡을 절묘하게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생명의 씨앗이 되어 여인을 어머니로 만들며 운명이라는 틀 속에 갇히게 된다. 하룻밤의 인연이 결코 속된 것이 아니며 남자의 본능만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작가는 허 생원을 일편단심 민들레로 만들어 놓고 가정형편으로 몰락한 후에 어머니로서 아들을 키우는 옛 연인의 애곡의 시절을 서럽게 구성하여 전개했다.
여기까지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어 놓으며 동이를 허 생원의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시키며 시선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슬픈 기억 속의 여인인 성서방의 딸에게 돌리도록 슬며시 유도한다.
회자정리의 순서만 남겨 놓았을 때에 조 선달은 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안착하겠다는 통보를 함으로 허 생원의 결단을 촉구하게 하고 심적인 동요와 함께 발걸음을 홀로 남아 있는 성서방의 딸이며 동이의 어머니에게 향하도록 동기를 촉발시킨다.
나귀의 흔들거리는 발걸음에 따라 방울소리가 딸랑이는 가운데에 넉넉한 마음과 듬직한 동이의 모습에 안쓰러워하는 아버지와 아들 두 부자는 아내와 어머니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 장면이 다한다. 마지막 책장이 넘어가며 빈공간이 드러날 때, 독자는 다시 책표지로 시선을 가져가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과 지은이 이효석 이라는 글에 시선을 멈춘다. 이윽고 잠시 숨을 고르며 가슴의 감동을 가라앉힌다. 마지막 부분의 여운은 오래도록 독자의 가슴과 뇌리에 남아 저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영혼과 삶에 힘을 불어 넣어 어느덧 자신의 영혼과 삶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된다. 이 작품이 그러하다.
3. 작가의 의도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작가는 시적인 묘사와 함께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작가의 영혼세계가 평화를 염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좀 더 들여다보면, 한 여름 밤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밭의 조붓한 길을 통해 작가는 자유를 구가하며 자그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망하고 있는 속내를 드러낸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조붓한 길, 거기에는 오직 열심히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일상의 대화가 거리낌 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의 삶에 촉매로 등장시키고 있는 수나귀는 어쩌면 일제치하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의도적으로 접근시킨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수나귀를 통해 굴곡진 인생을 살고 있는 그 시대의 한국인의 삶을 암시해 준다. 어쩌면 구릿하고 암울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도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나면 하늘을 보게 되고 허 생원과 성 서방네 딸과 아들 동이가 20년 세월의 아픔과 슬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 주었으면 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소박한 행복에 대한 염원이다. 어쩌면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만한 것도 큰 행복이야 하며 스스로 자위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허 생원과 허 생원의 인생을 동정하게 된다.
통상 소설의 소재는 큰 틀에서 볼 때,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으로 쓰인 허구와 사실에 입각한 작품으로 구분된다. 한 사람의 일대기에서 소설이 될 만한 내용의 이야기를 유추해 내는 것이 사실에 입각한 소설이라면, 자신의 꿈 이야기나 혹은 어떤 사물(인물, 역사)에서 소설의 뼈대를 인출해 내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화하는 허구로 나눠진다. 이중에 허구의 소설은 사실보다 더 사실답게 묘사해 주는 리얼리티 기법이 동원되어져야 하고 작품의 성공여부는 이 리얼리티 기법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도입된 리얼리티의 주요 작업은 주인공 허 생원이 회상하는 20년 전의 물레방아 간 부분부터 도입되어 있다. 작가는 다소 뻔해 보이는 물레방아 간을 선택하여 무대로 삼았고 여기에 가정문제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아무도 없는 물레방아 간에서 울고 있는 성서방의 딸을 투입했다. 물레방아간이라는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허 생원과 성서방의 딸은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구미가 맞아 떨어지는 섹스의 장면을 노출하게 된다. 왜 하필 물레방아간이냐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는 이만한 공간이 없지 않느냐는 답을 내어 놓고 독자를 설득한다. 여기에서 시대성이라는 문화적 갈등의 요인이 표출되어 일면 충돌하나 공간성의 부재라는 당시 의 상황설정에 설득 당해질 수밖에 없다. 즉 그 당시에 벗은 몸을 가려 줄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쉬웠겠느냐는 작가의 물레방아간의 도입에 대해 현시대의 독자들이 이해하며 설득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몰고 가는 작가의 의도에 대하여 여전히 불만스럽다. 첫날밤을 지낸 대가로 잉태하여 고통스러운 생활이 예견되어 있는 처녀가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도 허 생원을 왜 찾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생긴다. 장터에 가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허 생원을 찾지 않고 20여 년 동안이나 굴곡진 삶을 살게 한 작가의 상황설정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답답해지고 여전히 불만은 남는다. 작가의 리얼리티 기법에 다소 무리한 점이 발견되는 대목이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성서방의 딸이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대목에서 허 생원을 재회하고 허 생원은 자신의 지체인 나귀를 팔아서 구해 주는 설정의 한 대목 정도야 서비스해 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한 구석에 앙금으로 남는다.
4. 작품의 뼈대(source)
이 작품은 김유정과 같은 고향인 봉평에서 오래 살았다는 황일부 노인의 이야기에서 출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존인물인 허 생원과 충주집이 실제 인물이라는 점이며 이들이 엮어갔던 삶의 이야기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작품의 뼈대가 구성이 되어졌다.
이 작품의 뼈대는 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먼저 ‘삶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도록 설정되었고 다음으로 ‘메밀꽃밭의 길’의 대화 장면 그 다음으로 ‘과거로의 전이’ 마지막으로 ‘회자정리’를 통해 미래의 삶을 추론하도록 기둥을 세웠다. 미래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강한 암시로 글을 맺는 대목에서는 작가가 독자들을 위한 배려의 흔적이 역력하다. 즉 작가가 내릴 결론을 유보하는 대신 독자들이 입맛대로 결론을 내리도록 서비스 되어졌다는 장점이 그것인데 이효석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내어주고 있는 감칠맛이다.
이효석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장돌뱅이들의 들고 나는 삶을 통해 개미같이 부지런히 일하나 가정도 이루지 못한 채로 영혼의 상처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허 생원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리고 허 생원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그 출발점이 봉평장이다.
장터에는 삶의 질펀한 흔적이 마치 장터에 내어 놓은 장물과 같이 놓여 있다. 그것들 속에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삶의 주인공들의 삶의 고뇌와 땀 그리고 약간의 소망이 베틀의 씨줄과 날줄처럼 들고 나며 서로가 엮어져 있다. 몇 날 밤을 꼬박 새우며 실처럼 얇게 쪼갠 대나무로 엮어 만든 대, 중, 소의 대바구니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가 하면 반지고리처럼 잔손질이 많이 가 있는 장물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들이 밤을 새우며 호롱불 아래에서 장날에 맞추어 간신히 만들어 놓은 대바구니 하나에 담겨져 있는 장꾼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 그래서 장터로부터 이야기를 출발한다.
허 생원이 펼쳐 놓은 봉물에는 비단 필과 무명, 삼베 필 등 아녀자들의 손 땀이 묻어 있는 손의 흔적이 담겨져 있고 혼이 배어 있을 터이다. 허 생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장사에 보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중개역할로 합력된 선을 도출해 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이 동이와의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지...’ 이 대목에서 탐탁하게라는 말은 요행수를 부리거나 술수를 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양심껏 이라는 뜻이겠다. 이 시대나 저 시대나 요행수나 술수를 부리는 장사꾼들이 심심찮게 관찰되는데 이효석 작가 역시 이 작품에서 허 생원의 입을 빌어 양심껏 장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효석 작가의 철학이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베어 먹는 행태나 양심으로는 조국의 장래가 없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비록 얼굴은 얽었고 왼손잡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선한 양심 하나로 배겨온 허 생원의 시절을 추적하는 작가는 권선징악의 형태를 빌어 작품 전체에 혼을 불어 넣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따라 달빛이 훤하게 비추어 주고 있는 길모퉁이에 두 번째 기둥이 보인다. 20년 전의 사건이 회자되면서 과거로의 전이가 이루어지고 과거 속에서 허 생원의 구부러진 삶에 성서방의 딸을 부각시켜 동이라는 아들의 실체를 서서히 구체화한다. 여전히 달빛은 교교하게 세 주인공 위에 떠 있고 메밀꽃의 향기는 은은하다. 이 정도의 분위기라면 동이를 등장시켜 크라이막스로 끌고 갈 준비가 되었다.
두 번째 기둥을 지나면서 성 서방네 딸이 등장하는 세 번째 기둥의 과거로의 전이가 흥미진진할 때에 충주댁과 농탕을 치던 동이와 대화장까지 동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이윽고 동이의 입을 통하여 동이의 지난날이 메밀꽃 향기의 싸아한 것처럼 콧속 점막을 자극하는 동이의 구불구불한 과거의 행적이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이미 허 생원은 동이의 등에 업혔던 따사로운 감촉으로 마음이 촉촉할 대로 촉촉해진 상태이다. 이런 아들이 하나 있으면 평생의 소원이 없겠다 하는 허 생원의 속내가 그대로 연상되어진다. 동이의 넓은 등은 촉매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여운을 남기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작가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놓고는 독자들이 성 서방네 딸이 어머니가 되어 가는 과정과 격하게 살아온 삶의 정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손에 들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의 고리를 살며시 끼워 놓았다. 독자는 야바위꾼의 손놀림 같은 작가의 손길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그것이 네 번째 기둥이다.
네 번째 기둥이 언뜻 보이는 순간에 작가는 조 선달을 등장시켜 장돌뱅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안착하겠다는 결언으로 허 생원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미 허 생원의 뇌리에는 세상에서 첫 번째이자 평생을 사랑했던 성 서방네 딸과 아들 동이와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있던 중이다. 가정에 대한 동경과 가정을 이룸으로 이어질 행복의 순간들을 가슴으로 그려 보고 있던 허 생원에게 남은 일은 그려진 밑그림에 현실이라는 채색을 입혀 주는 일만 남았다. 이제 무대는 대화장에서 제천으로 가는 꿈길로 이어진다. 이제 독자는 야바위꾼과 같은 작가의 손으로 무슨 짓을 해 놓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평생을 정직과 성실로 살아온 허 생원을 동정한다. 그 동정심은 동이의 어머니이자 허 생원의 인생에 첫 번째 여인인 성 서방네 딸과 함께 번듯한 가정을 이루며 노년의 생활을 보상해 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확고히 세워주었다. 비록 남루한 생을 살았으나 바르고 착하게 산 인생의 뒤는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독자들의 뼈골에 각인시켰다. 마지막 장까지 시종일관 눈을 못 떼게 만든 이효석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 속에서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휴머니티와 유토피아가 동시에 추구되고 있음을 본다.
역사는 삶의 수레바퀴가 굴러간 자국의 기록을 남기고 문학은 기록 속에 담겨져 있는 삶을 추적하여 삶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효석은 삶을 추적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5. 동반작가 이효석 작가의 정신세계와 메밀꽃 필 무렵
동반작가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학경향을 가진 작가를 말하는데 러시아 혁명 후 소련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1920∼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왕성하였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 러시아의 작가로는 I.에렌부르크, S.A.에세이닌, V.이바노프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바노프의 《빨치산 이야기》(1923), B.A.필냐크의 《나년(裸年)》(1922), 레오노프의 《굴 속에 사는 곰》(1925) 등이 대표작이다.
이효석은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본격적으로 등단했다. "도시와 유령“은 선동성이 짙은 작품으로 현실에 대한 독자들의 각성을 주문하고 있는 이념적 작품이다. 이어서 1931년 첫 창작집인 ”노령근해“를 발간하여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문학적 지향점의 방향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이효석은 동반작가로 분류되었다.
그렇다면 이효석 작가가 동반작가의 길로 들어선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효석 작가가 동반문학에 심취한 원인은 실향의식 속에서 보헤미안적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던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진다. 공산주의사상과 자유민주주의사상이 정립되어 있는 현실에서 볼 때 이효석 작가의 사상은 자유민주주의사상이 확고한 작가로 평해질 만한데 당시에는 서양문화 혹은 신문화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신식 혹은 진보로 말해졌다. 사상에 대한 정립이 되어있지 못한 시대이기 때문에 사상에 대한 정체성은 모호한 시대였다. 조선말기의 봉건적 왕정통치가 힘을 잃는 동안에 전통적인 가치관도 힘을 잃었다.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의 앞서있는 과학의 발전과 저들의 가치관은 시대를 앞서가는 지성인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고 왕정통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다른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도기였다. 서양의 문화권과 가치관을 흠모하던 이효석의 열린 사고는 노동자와 민중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을 민주 혹은 자유주의로 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노선을 지지 선동하던 입장에서 순수문학으로 선명하게 선회하였음이 그 증거이다.
이효석 작가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1860~1904)와 투르게네프 (1818~1883)의 작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투르게네프의 행동철학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농노들을 해방시켜 준 행동과 농노제에 대한 증오에 찬 단편 “무무 Mumu”와 “사냥꾼의 수기”와 “아버지와 아들”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여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당대의 와 현실과 맞물려 이효석 작가가 염원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지핀 동력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춘원 이광수와 같은 친일문학파들의 식민지사관에 대한 염려와 증오심으로 친일파의 작품 활동에 대한 반발로 이효석(李孝石)을 위시하여 유진오(兪鎭午)·이무영(李無影) ·채만식(蔡萬植) ·조벽암(趙碧巖) ·유치진(柳致眞) ·엄흥섭(嚴興燮) ·홍효민(洪曉民) ·박화성(朴花城) ·안덕근(安德根) 등과 함께 동반작가의 군을 형성하여 친일파계와 맞서게 되었다.
동반작가의 작품 중 뚜렷한 동반문학의 성격을 드러낸 작가 및 작품으로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 “한귀(早鬼)”, “홍수 전후(洪水前後)”, 이효석의 “노령근해(露領近海)”, 유진오의 “여직공”, “오월의 구직자(求職者)” 등이 있다.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동반작가의 의미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기의 수년 동안만 가능했을 뿐이다. 프로 문학이 객관적 정세악화에 부딪친 1931년 이후부터 동반작가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프로 작가조차도 전향(轉向)하기에 이르렀으며, 1934년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新展開)와 경향”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 동반작가 중에서 전향하여 가장 선명하게 순수문학에 귀환한 작가로는 이효석을 들 수 있다. 1933년 이효석은 자연묘사와 인간의 성(性)을 주제로 한 “돈(豚)”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화분(花粉)”이라는 장편으로 순수문학으로 귀의하였다. 화분을 발표하고 난 후 1936년에 드디어 “메밀꽃 필 무렵”이 발표되면서 이효석은 동반작가라는 별칭을 떼어내게 되었으며 이효석의 작품세계는 순수와 서정적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인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순수문학으로 귀의하고 난 뒤에 발표되는 이효석의 작품은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영역을 망라하면서 인간심리의 내면을 유려하게 묘사해 내며 불후의 명작을 쏟아 놓았다. 1936년 한해에만 『중앙 1·2월호』에 발표된 '분녀'를 필두로 ‘산’/삼천리 3월호, ‘들’/신동아 3월호, ‘메밀꽃 필 무렵’/조광10월호, ‘석류’/여성8월호, ‘천사와 산문시’/사해공론, ‘제작과 시절’/신동아 6월호, ‘내가 꾸미는 여인’/조광2월호, ‘영서의 기억’/조광3월호, ‘6월에야 봄이 오는 북경성의 춘정/조광4월호, '그때 그 항구의 밤'/조광 8월호, '각 작상에 나타난 가을풍경'/조광 9월호, '생활의 기억'/조광 10월호, ‘고요한 동의 밤'/조광 12월호, '발발이'/중앙 4월호, '모기장'/중앙 7월호, '동해의 여인'/신동아 7월호, '전원교향곡의 밤'/여성 11월호, '처녀해변의 결혼' '사랑하는 까닭에'/여성 9월호, '뛰어들 수 없는 거울 속 세상'/조선일보 7월10일, '작가 노트에서'/조선문학 5월호, '수필록'/조선문학 8월호, '내가 꾸미는 여인'/조광 2월호, '인간산문'/조광 7월호, '고사리'/사해공론 9월호, '청포도의 사상'/조선일보 9월호에 각각 발표하여 이효석 작가의 순수문학의 세계를 체계화 하고 있다.
이효석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1942년 36세로 별세하기까지 수백여의 작품을 내어 놓았고 그의 뛰어난 감수성과 천재적인 표현기법은 완벽한 서정성을 구현해냈다. 이효석은 여행을 통해 접해지는 자연과 사람을 그의 작품세계에 절묘하게 접목시켰고 꽃을 사랑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은 그의 필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묘사하는 미려한 필로 나타났다.
맺는 말
이효석 작가는 삼라만상을 가슴에 담았고 그것을 자신의 밀어로 표현해 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밀어는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은 독자들의 가슴에 희망을 담아 주었다. 1936년 말에 발표된 수필 ‘청포도 사상’을 통해 이효석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모르는 청포도에 주제를 두어 청포도처럼 변화가 없고 신비가 없는 생활은 의미가 없는 죽어 있는 것과 같은 삶으로 묘사하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 불만 속에서 유추되어 드러나는 작가의 독백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푸르른 색깔을 띠고 잘 익어 있는 새콤하면서도 단맛이 나는 실존적 사상을 추구하나 아직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성찰에 대한 여전한 불만의 표출이다.
겉을 봐서는 익어있는지 안 익었는지도 모를 청포도. 이효석은 거기에 사상이라는 단어를 접목시켰다. 잘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입에 넣어 맛을 보아야 익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느냐는 여운을 남기며 이효석은 자조적인 불만의 어투로 자신의 사상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언제 되찾을지 모를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면서 실향의식을 지닌 채 보헤미안처럼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어 했던 심약한 젊은 지성의 고민은 한 때는 총독부의 직원이었다는 것과 한 때는 동반작가라는 모순을 끌어안고 몸부림쳤다. 사상의 늪 위에 떠다니는 수련처럼 시대의 조류와 삶의 현실에 떠다니듯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자조와 한탄은 결국 이효석에게 병마로 다가 왔고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2년 3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이효석과 윤동주시인(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의 공통점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며 조국의 해방을 누구보다도 열망했던 젊은 지성이었다는 점이 참으로 애석하다.
한국문학의 큰 별들이 떨어졌으나 별들이 남긴 작품세계는 중. 고등학교의 교과서를 통해 오히려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며 문학을 사랑하게 하고 문학을 통해서 조국과 사랑 그리고 우주를 끌어안게 만드는 위대한 스승이 되어 후학들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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