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공지영의 “도가니”를 보는 불편

도제조 안형식 2011. 10. 5. 12:17

공지영의 “도가니”를 보는 불편

행복을 주지 못하는 인문학은 “독”

 

 

16세기의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는 과학이 우세한 과학의 시대로 19세기는 철학이 우세한 인문학의 시대로 갈음된다. 19세기 철학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행복”이었다.

 

임마뉴엘 칸트(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최고의 선을 찾기 위해 이성에서 또 그 위의 이성을 추구하여 올라가서 보니 결국 최고의 선은 “행복”에 도달하며 이 행복은 신의 영역에 속한 선물이라고 정의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칸트의 이론을 맞받아치며 “자살이 최고의 선이다”라고 주장하여 반골의 면면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19세기 철학의 귀재로 불렸던 키에르케골(1813~1855)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정체를 절망으로 정의하여 우울증과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행복의 반대개념으로 정립했다.

 

칸트 이후 행복이 지상 최대의 선이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지순한 이성의 결과물로 정의된 이후, 모든 인문학은 행복을 인간의 기본 권리이자 자유자의 조건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는 존재이며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나 행복감을 박탈하는 모든 요소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케골이 정의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지목된 절망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제 와서 19세기 문학의 목적을 새삼스레 뒤적이는 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이어 공지영의 도가니 등의 문제 작품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비틀어진 시각에서는 비틀어진 작품이 나올 뿐

 

1980년대의 문학적 트랜드는 문제작이었다. 모든 작가들의 로망이 문제작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도 내고 돈도 버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에 달성한 작품은 김홍신의 인간시장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 수 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당대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현대판 홍길동인 장총찬이 주인공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과 싸우는 빨치산 박현채가 주인공이었다.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사회의 권력 핵심들과 권력에 부침하여 부조리를 일삼는 악덕기업가들을 청소하는 역할로 대리만족을 주었다. 한국판 현대 무협지로 불리면서 수개월에 1권씩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독자들로 인해 동네 서점까지 호황을 누렸다. 인간시장이 나오는 동안 인간시장의 독자들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지식층들이 읽어야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의 역사물로 인식되면서 고졸이상의 학력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까지 선전되었다. 밀리언셀러로 등극한 태백산맥의 이면에는 좌파 성향자들의 추천서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렸고 언론들마저 앞다투어 칭찬 일변도의 글을 써냈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은 육이오의 참극과 미군정의 악랄한 통치 그리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으로 묘사된  목적있는 빨치산 추앙소설로 인해 절망감과 분노로 가득 차며 불행해졌다. 이러한 분노감은 기성세대를 부르주아로 매도하게 만들었고 희생이 있더라도 개혁적인 차원에서 혁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이어졌다.

 

두 작가는 나이도 엇비슷하며 시대적 환경도 비슷하다. 참고로 김홍신 작가는 1947년생이며 조정래 작가는 1943년생이다. 같은 시기의 문화적 환경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시각은 엄청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조정래 작가는 칼 막스적 비판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고 김홍신 작가는 만하임적 비평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다는 점이 다르다. 그 결과 조정래 작가의 작품에서는 죽창에 찔린 피비린내가 풍겨나고, 김홍신 작가의 글에서는 반성하고 인성을 회복하는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되어 독자에게 행복감을 선사했다.

 

어이없게도 독자들에게 분노감과 불행한 마음을 끼치며 기성세대를 부르주아로 몰아 죽창으로 줴질렀던 조정래는 부자가 되어 부르주아의 반열에 서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글로 돈을 번 부르주아는 존경을 받아야 하고, 사업으로 돈을 번 부르주아는 노동자를 착취한 악덕사업가로 멸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더냐?

 

2. 유려하고 화려한 문장은 독버섯의 화려함

 

민망하게도 조정래의 영향을 받은 분단문학가들에게서 조정래를 본 딴 작품들을  보게 되는데 공지영 작가도 그러하다. 민망하다는 말은 과거 조용기 목사의 억양과 어조를 그대로 흉내 낸 1980년대의 순복음교회 목사들의 민망함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어서는 누가 조용기 목사인지 도무지 구별을 할 수 없었던 그 민망함이 조 작가의 글과 공 작가의 글에서 볼 수 있으니 민망하다.

 

이들은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를 건드려서 독자에게는 불행한 마음이 들게 하는 一團이다. 끼리끼리의 평론을 통해서 문제작이니 뭐니 하는 도배로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돈을 챙기는 전혀 순수하지 못한 문제 작가들이다.  

 

독사의 무늬가 호화스럽고 독버섯의 색깔이 화려한 것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경고이다. 마찬가지로 현란한 글재주와 화려한 문장력을 인정받은 작가라면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뜻과 같다. 작가가 자신의 비상한 재주를 한풀이나 이데올로기 전파에 쓴다면 독자들은 그 독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게 되어 있다. 

 

공 작가를 아끼는 독자들은 공 작가의 화려하고 유려한 문장력을 아끼고 있다. 공 작가가 문단에 등장하면서 내놓은 자신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심금을 울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냈다는 점도 그렇고 자신의 치부를 과감히 공개했다는 점에서도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냈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변했다. 아니면 원래가 그러한 사람인데, 그의 현란한 글재주와 화려한 문장력에 가려 못 보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전의 겸손하고 지적이며 아까웠던 공지영이라는 이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도 붙고 불러주는 곳이 많아져서 그런지 자신을 대단히 중요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는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도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 모습이 과거 지리산의 빨치산들에게 먹을 것을 실어 날랐던 아녀자의 모습과 일반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김일성의 놀이터였고 금강산은 독립운동을 구상한 영산으로 선전되었고 지리산은 빨치산의 발원지이며 한라산은 제주사태의 저항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영산이라는 별명은 김일성 부자와 추종세력들이 붙인 별명일 뿐이다. 어찌 영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부모와 친척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가.

 

독사는 사람을 봐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똬리를 틀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똬리를 트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용수철처럼 만들어 순간적으로 높거나 길게 공격하기 위함이다.

 

작가가 손을 대면 안 되는 몇 가지가 있다. 역사의 치부, 종교의 치부, 장애인과 노인의 성 문제가 그것이다.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에 손을 대는 자는 반골이요 장애인이나 노인의 성 문제에 손을 대는 자는 추한 자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도 없고 파면 팔수록 불행의 냄새와 구린 냄새를 풍기는 주제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작가는 사실만을 취급하는 기자가 아니다. 르포 작가라고 해도 사실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필을 들었을 때에는 감동을 주고 행복감을 끼치는 명작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글을 써야 한다. 

 

독사가 똬리를 틀며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이웃이나 민족을 향해 죽창을 꼬나쥘 수 있는 반골들이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를 건드려 그것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함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이 반골들은 자신의 친공성향을 감추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들먹인다. 레닌 광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레닌의 부러진 목이 공산주의의 멸망을 증명한다. 레닌의 종말은 곧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다.

 

죽은 레닌의 사상을 붙잡고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 박노자나 김일성을 아리랑의 김산으로 둔갑시킨 한홍구나 육이오를 남침으로 주장한 강정구나 조정래 등이 교수로  대접을 받으며 살아 갈 수 있는 배경은 잘 못된 헌법에 있다. 정치꾼들의 입맛에 따라 재단된 대한민국의 헌법이 이들을 종교의 자유, 사상과 집회의 자유라는 보호막을 제공하며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반골들은 자신이 반골임을 감추기 위해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를 말하며 사상의 자유를 방패막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약자를 대변하는 정의자로 변장을 하고 약자의 죽음을 들춰내며 정의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위로를 하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명성과 스포트라이트를 추구하며 부자를 꿈꾼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빨치산이니 빨갱이니 하는 반골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