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극복

열등감 극복

도제조 안형식 2006. 8. 9. 21:18
 

열등감 극복

[열등감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잊고 지낼 뿐이다.]



 인간의 필연적 감정의 존재인 열등감 (inferiority complex)!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잊고 지낼 수는 있다. 생체는 아프면 아픈 곳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고 그래서 더욱 통증을 감각하게 되어 있는 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열등감도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내면 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그 고질적인 병폐를 없애는 방법을 찾다가 지그지글라가 제시하는 "벼룩 훈련"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것은 찾고 있던 목적과 딱 맞아졌다.


 벼룩 훈련이란, 벼룩을 잡아 병 속에 잡아 넣고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즉, 벼룩을 잡아 병 속에 넣으면 벼룩은 병 속에서 뛰쳐나오기 위하여 높이 뛴다. 이 병에 뚜껑을 닫아 놓는다. 그러면 병 안에 들어 있는 벼룩은 높이뛰기를 하다가 병뚜껑에 부딪치게 되어 있는데 골병이 들 즈음이면, 높이뛰기를 해도 뚜껑 높이만큼만 뛰게 된다. 그 뒤부터는 병뚜껑을 열어 놓아도 결코 그 병을 뛰어 나오지 못한다.


 벼룩 훈련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훈련화 시키는 작업이다. 사람을 벼룩에 비유하고 병을 환경에 비유하여 훈련이라는 적응력에 적용시킨 벼룩 훈련은 환경을 극복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라는 결론에 관심이 모아진다. 과연 열등감이라는 높이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서 지그지글라의 벼룩 훈련이 도입되었는데, 열등감을 얼마만한 노력으로 극복해 내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들 자신의 숙제로 남겨진다.


 이제 열등감을 극복하는 문제는 당연하게도 자기 자신의 문제로 남게 됨으로 해서 유리병에서 스스로 뛰쳐나오는 훈련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내면에서 "나는 안 된다", "나는 불가능하다"라는 인식과 사고가 변하여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된다"라는 의식 개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정상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등감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 수 있겠는가? 도대체 열등감이라는 괴물의 정체는 무엇이며 (열등감의 개념), 정확히 어떠한 때에 열등감이 나오게 되는가? 그리고 열등감이 개인 혹은 사회의 저변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본고에서는 신중히 접근하여 고찰하여 보고 결론에 도달하려고 한다. 


제1장 열등감에 대한 진단 


 미국의 심리학자 Dr. Maxwell Maltz는 미국 사회의 95% 정도의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추정하였다. 또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약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무력감에서 약해진 자아가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는 긍정적인 자아 형상 (self-image)을 이룸으로 무력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말츠는 이것을  "더 나은 삶의 열쇠"라고 말한다. 


 열등감은 삶의 전 영역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며 뒤떨어진다는 의식으로 상실감 혹은 무력감으로 나타나며 좀더 진행이 되어지면 자기 학대와 비슷한 성격으로 발전된다. 특히 불신자의 경우에는 열등감이 발전하여 조울증으로 전이되는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흔히 말하는 불만조의 말투에서 잘 드러난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는, 죽겠다는 상투적인 말투. 그러나 이 일로 죽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겠다"라는 자포자기적인 용어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아마도 이 사람들은 죽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빈말이라도 하더라도 “죽겠다” 라는 말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자신감에 대한 상실로 풀이 되어진다. 따라서  용어 사용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열등감은, 폭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양반과 상놈 사회에서 도무지 허물 수 없는 열등감이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옛날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였던 그 시절에는 상놈이 양반을 볼 때에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열등감을 어찌할 수가 없어 양반의 신분을 돈 주고 사서 가짜 양반이 되었다. 반대로 양반은 상놈의 근육질에서 열등감을 느끼니 선비는 근육질이 없고 샌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선비 기준을 세워 놓고 근육질을 야만인으로 몰아 부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로서 조선시대 야사를 보면, 안방  마님은 어떤 것이 정말 양반인지 알아 모셨다는 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근육질이야말로 마님에게 있어서는 진짜 양반이었다. 


 어느 나라이든 인종에 따라 열등의식은 다 있는 모양인데, 특별히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 대하여 느끼고 있던 열등의식은 도가 지나치고 있다. 특히 선조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나, 근대에 있어서 강대국들에 대한 사대주의는 어쩌면 한국인들의 의식의 뿌리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이규태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자신이 훈련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미제 철모와 국산 철모"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인의 열등감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있다. 


 훈련소에서 집합이 있을 때에 철모를 쓰고 나가야 하는데, 훈련소 측에서 의도적으로 그러했는지는 모르나 몽땅 미제 철모인데 유독 다섯 개만 국산 철모였다. 결국 다섯 명은 국산 철모를 써야만 했는데 동작이 굼뜬 자신은 항상 국산 철모를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산 철모를 쓰고 나가면 교관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총 개머리 판으로 머리통을 "뻥"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고, 동료들은 국산 철모를 쓰고 있는 자신들을 머저리로 인정했다고 한다. 이어서 씨는 이것은 국산은 나쁘고 미제는 좋다는 사대주의적 잠재의식으로서 열등감의 소산이라고 뼈아프게 지적하였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는 이런 열등감은 없을까? 사회는 질서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질서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일정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데, 여기에서 필연적인 계급이 나오게 되어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서 봉사와 헌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제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직제에 따라 목사는 가르치는 일을, 성도는 그 가르침에 따라 봉사하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 이상의 질서를 요구한다는데 있다. 이렇게 요구되는 질서 의식을 다른 말로는 권위 의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집사는 장로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해야만 한다는 장로들의 권위 의식과, 부목은 담임 목사의 명령에는 토를 달지 말고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는 권위 의식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장로가 되지 못한 집사의 열등감이 당연히 발생할 것이고, 담임 목사가 되지 못한, 부목의 열등감도 자연히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모나게 생긴 열등감은 도대체 어떤 괴물인가? 


제2장 열등감의 정체(개념정리) 


1. 사전적인 개념 


 동아세계대백과 사전에서는 열등감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열등감이란 심신의 결함에서 오는 특유한 감정, 즉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이다." 그리고 뒤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속에 응어리 맺히는 것을 열등감 (inferioriticomplex) 라고 말한다. 


2. 심리학적 개념 


 두란노의 소책자 [열등감]에서 이훈구는 열등감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정신 분석 학자들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열등감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인간의 필연적인 감정이다." 라고 정의하며 심리학자들은 "자기모멸이나 자기 정죄"로 정의하고 있다. 


정신의학자 Alfred Adler는 인간과 열등감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몰아대는 열등감을 소유하는 것을 뜻한다." 아들러는 인간이라면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 불가항력적인 요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열등감을 풀이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특히 심리학에서는 열등감의 문제를 심각하고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세 가지 중요한 용어를 사용하여 열등감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를 좀 짚어 본다면, 자아 개념 (self-concept), 자아 형상 (self-image), 자존감 (self-esteem) 이다. 


 자아 개념과 자아 형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이며 상대에게 자신의 세계 속에 담겨져 있는 생각과 태도와 감정들을 자신의 방법으로 표현하게 되면서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는 것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형상화된 이미지를 발송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형상화된 존재를 알리는 신호를 보내게 되면 상대는 응답하게 되어 있다. 이때에 응답되어진 신호가 우호적이며 자신의 존재에 만족할만한 응답일 때에 자존감이 생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가 되었을 때에는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열등감이 생기는 때는 대략 언제부터일까? 인간은 유년기를 거치면서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점점 선명해지고 사춘기를 경험하면서부터 선과 악에 연루된 타인의 존재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타인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평가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평가하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어떤 대상을 모델로 삼게되고 자신의 성격과 행동은 모델을 중심하여 자신 속에 형상화된다. 


 예를 들어보자. 중, 고교 학생들 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장래 희망을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항상 접하게 되는 학교 선생님은 모델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자라면 0 0 0 선생님 같이 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형상 속에 선생님을 이미지화 시켜 놓는다. 그래서 이들은 그 선생님이 하라는 것이면 힘을 다해 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점점 만나는 대상이 늘어나고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상대가 생기게 되면서 당장에 이룰 수 없는 선생님에 대한 꿈은 접어 두고 모방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 모방할 수 있는 상대는 친구이거나 이성이거나 해서 자신의 세계에 포함시킬 수 있는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상대방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상대를 인정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림으로 상호교감(Communication)이 이루어진다. 상호교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동질성이 확인되었다는 말이며 동시에 자존감은 상승한다. 반대로 상호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등감이 형성된다. 


 열등감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은 타인에 의하여 직, 간접으로 나타난다. 상대방에 대하여 집착할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도 상대방에 의해 거부당한다면 열등감의 무게도 상당하다. 반대로 별로의 비중을 두지 않고 있는 상대라면 비례하여 열등감은 효력을 상실한다. 상호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열등감은 자신에게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믿게 만들며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부모, 형제, 환경 등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조건에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건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여건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골몰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감은 개인이 자신의 가치, 적성, 그리고 자신의 중요성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 개념과 자아 형상이 자기표현 (self-description) 으로 나타나고, 자존감은 자기 평가 (self-evaluation) 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서로 반복하여 나타남으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느끼는지에 대하여 삶의 전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열등감은 골이 깊고 폭 넓게 우리들 인생의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 상상할 수 없는 큰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자괴심으로 발전하게 내버려둔다면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열등감은 주목되고 있다. 


3. 열등감에 대한 성경의 실례 


 열등감에 대한 사례로서 처음 등장시킬 수 있는 성경의 인물로서는 가인을 꼽을 수 있겠다. 창세기 4장에 나오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문제가 화근이 되었다. 여기에서 가인의 제물이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자 가인은 분하여 견디지 못하고 동생인 아벨을 척살 하고야 만다. 가인은 먼저 아벨에게 자신의 분함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책망과 경고를 아벨에게 다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난 뒤에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에는 분명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고 가인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따라서 결과에 초점을 두지 않고 동기에 초점을 둔다면, 그 동안에 가인은 열등감에 시달리며 아벨을 계속 주시하고, 시기하다가 결국에는 들에서 아벨을 만나 죽이고 말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상은 가인이 살의를 품고 아벨을 찾아가서 죽였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겠다. 형으로서 동생보다 못하다는 열등감,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덜 인정받았다는 열등감은, 가인에게 있어서 자신을 상실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을 상실하기보다는 아벨을 상실시켜 버리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성경은 가인과 함께 또 다른 인류의 시작을 말씀하고, 가인은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 속에 던져졌다. 


 또,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은 열등감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울 왕은 떠오르는 별인 다윗에게 대하여 아주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 비하여 신앙이 깊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다윗, 자신에 비하여 용맹하며 전쟁에 능하여 많은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었고 자신 보다 인격 면에서 훌륭하여 온 국민의 신망과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다윗에 대하여, 사울 왕은 심각한 위협과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울 왕의 열등감은 골의 깊이와 폭이 넓어져 감에 따라 자신을 견디지 못하여 했으며 결국에는 악신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말았다. 이를 현대 의학에서 진단을 내린다면 아마도 중증의 조울증 (심각한 열등감) 으로 진단을 내릴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사울 왕도 가인처럼 다윗을 척살 하려고 계획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사울 왕은 길보아 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삼상 18장 - 31장). 


결국 열등감이란 남 보다 못하다는 자아의식이다. 그렇다면 이 열등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는가? 이를 구체적 사례별로 구분하여 본다. 


제3장 열등감의 원인 분석 


 열등감은 유년기에 잘못된 교육을 받았거나, 경험해야 할 것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강한 욕구불만을 느꼈거나,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열등감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기형이나 병에 의한 장애의 경우와 절름발이, 대머리, 언챙이, 안면 상처, 말더듬이 등의 신체적인 것과 학교 성적이 나쁘다 혹은 운동을 못한다. 미인이 못 된다 등의 정신적인 경우, 그리고 학력이나 인종, 성별, 신분에 의한 차별로 나타나는 열등감과 문화, 빈곤 등의 사회적인 경우가 살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더 근원적인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좀 더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후에 효과적인 예방 치유책에 기여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몇 가지로 그 원인을 지적할 수 있겠는데, 


1. 잘못된 신학의 영향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이며, 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켜서 결국 죄인들은 지옥이나 메우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고 했을 때에, 인간은 심각한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 영역은 인간의 한계 저 너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말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삼는 것은, 그러면 기독교는 의인들만을 위한 종교인가? 라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복음은 인간의 영역밖에 있던 죄의 문제의 해결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내게 임하여 온 것으로 확인(체험)거 될 때에 비로소 복음의 효력과 가치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하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을 때에 이미 그것은 복음이요, 하나님의 나라였다. 로마 치하에 있던 유대 민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의 극치였다. 죄인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데 더 이상의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보수 교단들은 예수께서 하지도 않았던 일을 복음을 빌어 하고 있다. 한 번 보라! 교회에서 집사 이상의 직분자들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를, 이들은 새신자들에 대하여 아주 고압적인 텃세를 일삼고 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젖 좀 더 먹고 오라"는 식으로 새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 시어머니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니 말이 새신자이지 세상 경력으로 보나 지위나 입장으로 볼 때 꿀릴 것 없는 새신자들이 그 꼴을 참아 낼 수 있겠는가? 이들이 곧 바로 뛰쳐나가서는 하는 말이 "자기들만의 교회" , "죄인은 필요 없다는 식의 거만한 교인들" 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다. 무슨, 교회의 교자도 모르는 사람이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잘 모르기는 해도 지금 전도가 되어 새신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미 어린 시절에 교회에 나왔다가 텃세에 의한 열등감을 경험하고 교회를 방학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우리는 세인들이 지적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우리들은 오히려 복음을 위한 핍박 정도로 몰아부쳤고, 더욱 더 높은 담장을 쌓아 반격하였다. 물론 이러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는 마치 덕수궁 담장 같은 높이로 적벽돌로 쌓아져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회가 개인의 은사를 계발하여 주고 개인의 능력이나 성격 그리고 창조성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하겠다. 복음은 듣는 자가 들어주어야만 복음이 된다. 들을 자는 그만큼 귀가 열려지지 못했는데, 마치 갓난아이에게 귀찮다고 화장실 가서 볼일을 보라고 하는 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왜냐면 이런 경우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열등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설교 강단은 죄인을 위하여 설교가 준비되어야 하고, 의인들을 위하여는 성경 공부나 제자 훈련 등으로 계획되어 있어야 바람직하겠다. 


2. 죄의식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와 더불어 우리들에게 옳고 그름의 표준으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행복과 사랑과 평안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일들을 범할 때, 죄를 짓는 것이며 그 결과로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자신에 대하여 실망함으로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더불어 자존감은 상실하게 된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랜 문제요, 인간의 숙명적인 문제이다. 


3. 과거의 경험 


 이 사회는 성공을 중요시하는 사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거부와 비판을 경험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될 때에 "나는 하찮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나는 실수투성이 이다." 라는 자포자기적인 자기 딜렘마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강조를 하여도 자신의 실수가 거듭될 때,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많이 있는 사람이 과거의 쓰라린 실패의 경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4. 부모 - 자녀 관계 


 대체로 이 경우에서 열등감과 열등한 자존감이 생겨진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자존감은 어릴 때 이미 형성된다. 아동 심리학자들은 보통, 3살 이전 혹은 6살 이전에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특히 부모가 자녀들이 어릴 경우에는 저들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아직도 형성되지 못한 자기들의 세계가 있음을 부모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Ciecil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며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1) 부모가 자녀에게 비현실적인 기준과 목표를 설정해 줄 경우 


2) 자녀가 아마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부모가 표현할 경우 


3) 칭찬하고 격려하고 정서적으로 지지해 주는 일이 드문 경우 


4) 계속적으로 가혹한 벌을 줄 경우 


5)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바보이고, 무능력하다고 인정해 버릴 경우 


6) 귀여워해 주거나 안아 주거나 애정이 담긴 신체적 접촉을 해 주지 않을 경우 


7) 후에 아이들이 자립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지배하거나 과잉보호할 경우 


 이러한 경우에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열등감이 유발되어 열등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 특히 부모의 이혼은 자녀들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심어 주게 된다. 


5. 사회적 영향


 사회에는 대중매체에 의하여 사람의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가정, 학교, 정부, 사회 환경 등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가치관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 외모, 교육, 재력, 권력, 명예 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존감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열등감은 스물 스물 고개를 쳐들고 나오게 된다. 


 이외에도 우리의 주변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자신이 세운 기준에 현저히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에, 자신을 무가치하게 평가하며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열등한 자존감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고 Guest는 지적하였다. 


 이렇게 생성된 열등감은 그 후유증이 아주 심각한 정도로 그 영향을 개인과 사회에 미치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열등감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제4장 열등감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1. 긍정적인 측면 


 때로는 열등감 때문에 자기 계발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 성공한 유형의 사람들에게서 열등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실례로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결과, 훌륭한 웅변가가 된 데모스테네스나 헬렌 켈러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실연을 당하여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에 젖어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있다. 단테는 훌륭한 인물이 되어서 그녀를 후회하게 만든다는 복수심으로 열심히 시를 썼는데, 그것이 신곡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단테의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열등감은 오히려 인간에게 성공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 주고, 그 동기를 유발해 주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아들러는 "인간이 본래 남 보다 더 우월하게 태어나면 오히려 자기 계발 욕구가 저하되어 열등감을 가진 사람보다 더 뒤쳐 진다"고 말함으로 열등감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2. 부정적인 측면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건대,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극복에 성공하여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열등감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떤 부류의 열등감 소유자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시키거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거나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이상한 복장이나 행동, 혹은 환상적인 영웅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도 있다. 우리들 주위의 과대망상증 환자들은 대부분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로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의 정신질환자 (귀신들린 자) 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두가 열등감의 진행으로 말미암아 정신 질환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점에 대하여 Ellison은 많은 연구보고 등으로 정신 의학계에 널리 알려진 학자로서 다음과 같이 열등감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에 대하여 사례별로 분류하고 있다. 


" 그것은 고립감, 자신감의 결여, 사회적 격리, 비사교성, 의존적 성격, 자포자기,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불안정, 질투(비난 의식), 대인 관계의 결여, 자기비판, 권위 의식에 기댐, 의기소침, 용서를 못함, 수용성의 부족,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투덜거리는 행위 등이다." 


3. 열등감의 결과 


 열등감의 결과는 우리의 생활을 패배와 실패로 이끌어 간다. 사탄은 열등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달려들어서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도록, 그리고 사물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 절하하게 하여 동기 유발의 근원을 차단한다. 따라서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사장시키고 하나님께서 개인과 집단에게 비춰 주시는 비젼과 꿈을 보지 못하게 된다. 더 깊어지면 자신을 쓸데없는 존재로 비하시키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철저한 패배자로 남게 되어 버리고 만다. 이는 곧 자신과 자신의 가정이 패배 혹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열등감은 인간의 창의력을 누르고 비틀어서 결국은 열등감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몹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처럼 열등감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더 나아가 사회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인격을 부수어 버리는 엄청난 피해를 남긴다. 이것이야말로 열등감의 심각한 파괴력이다. 


카스터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폐쇄성과 그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성공할 수 없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서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에게서는 리더쉽을 발견할 수 없고 중요한 업적과는 담을 쌓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남이 전진하는 것에도 걸림돌이 되기 일쑤고 결국은 자신을 증오함으로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자비하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는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문제를 5장에서 다루어 보도록 하자. 


제5장 열등감 극복을 위한 해결책 


1. 예방책 


1) 말씀을 통한 예방 주사 


 먼저 우리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예방주사 적인 방법을 제시하도록 한다. 교회 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 견디게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배우고 또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셨음을 믿도록 가르치고 또 우리들 자신이 이를 굳게 믿는다. 


따라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이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인 열등감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는다. 이것은 우리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 출발한다. 


 감은 감으로 잡아야 제대로 잡힌다. 열등감은 자신감으로 때려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고 하는 짓누르는 설교나 교육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려 주어야 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토록 존귀한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이제는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들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움직일 수 없는 보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고후 4:7) 열등감에서 벗어나도록 철저히 말씀으로 무장시켜야 하겠다. 실상 이보다 더 나은 예방책은 해 아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2) 교회 공동체 훈련을 통한 자기 존재 확인 


 사실 우리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무조건 공동체 훈련이나 혹은 공동체를 무슨 만병 통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에 대하여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공동체 훈련이나 참여가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은 또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체 훈련의 효과는 열등감 해소에 상당한 효과를 준다. 이것은 예방의 차원과 함께 치료의 효과도 동시에 거두게 되는데, 그 원인은 공동체 안에 들어 온 열등 인들이 서로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저들과 똑같은 정도의 사람이지, 무슨 괴물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동질성 확인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루어진 동질성 확인은 다음 단계로 전이되게 되는데, 이 단계는 "그렇다면 나도 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는 가능성으로 발전되고 결국 열등감은 해소되고 만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하여 열등감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해방감을 맛보게 되며 "변화 받은 새 삶"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 훈련이란 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고 기도로 준비되어야 가장 강력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사료된다. 


3) 자녀 지도를 통한 예방책 


자존감의 문제는 대개 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예방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부모님에게서 사랑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는 법과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자녀는 견실하여 지고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점에 있어서 김상복 교수는 지난 학기 초에 있었던 리더십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 점이 인상 깊다. 리더십에 있어서 지도자의 자격 중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지도자 항목이다. "가정에서의 부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부모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아끼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고 역설한 점이 상당히 가슴에 남는다. 


부모님이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가르치고 대화할 때,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겨 주시고 아끼셨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지게 됨으로 자녀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 가치와 함께 타인들의 존재 가치에 크게 가치를 두게 될 것이다. 결국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자존감과 함께 열등감이라는 괴물을 쫓아내고야 만다. 


2. 치료책 


 만약 예방이 없는 상태에서 열등감에 빠져든 경우 - 참으로 목회자들은 이러한 교인들을 많이도 만나게 된다 - 에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괴심으로 장래가 멍든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찾아 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우리는 열등감이 인간들 내부의 문제가 될 수 있을망정,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디모데후서 1:7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들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앞에서도 살펴 본 바 있는데 "두려워하는 마음은" 열등감의 대표적 감정이다. 따라서 치료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점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겠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쫓아 내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패배 의식을 점점 고질화시키는 열등감은 실상 사탄이 우리들에게 주는 치명적인 독화살이다. 사탄은 욥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욥기1장, 2장 참고) 그러나 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견디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심으로 이전보다 갑절의 삶을 살았다 (욥기 43장 이하).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스스로 자신을 높이다가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사탄은 이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걸작인 인간들에게 내려 와서 불순종하도록 호기심을 유발시키며 꾀었고 죄인의 첫 아들인 가인은 열등감으로 인하여 동생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후 인간은 계속하여 열등감에 시달려 왔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오성춘 교수는 상담학적 차원에서 환영받을 만한 치유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도록 한다. 


1) 오래 참는 사랑으로 계속적으로 신실하게 대하여 주고 용납하여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게 해 준다. 


2) 인간의 가치와 겸손에 대하여 성서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며, 이해시켜 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살펴 볼 수 있는 훈련을 시킨다. 


4) 기대와 목표 그리고 우선순위를 재검토 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고무해 준다. 고 주장하였다. 


 특히 우리는 치유책에 대하여 8주 동안의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집중 연구하였다. 투입되는 성경 공부는 열등감에 대한 성경적 치유책이기 때문에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이를 권한다. 


결론 


 열등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보면 그 처방도 단숨에 고치겠다고 덤비는 것은 금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가치가 지극히 소중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되,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화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비록 나의 모습이 약하고 허물투성이라고 해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납되어진 존재임에 대한 확신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자요,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놀라운 현실들, 나 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엄청난 현실이 그 증거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분명함이 확증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열등감에 시달리는 이들을 그 열등감으로부터 구출해 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다시금 헬렌 켈러나 단테의 일어섬과 옥중에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만 요셉을 본보기로 삼아야겠다. 벼룩 훈련은 상징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 보겠다고 목발에 의지하여 자신의 전 체중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일어서는 재활자들의 용트림이요, 단발마적인 외침이다. 


 자기 자신도 포기한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람을 위하여 도울 수 있겠으며 대신 훈련을 받아 줄 수 있겠는가? 현 시대는 너무나 조급하고 포기가 빠르다. 젊은이들을 보아도 그렇고, 연조가 꽤 깊은 분들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또 쉽사리 포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아주 위대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귀한 선물들을 아끼지 않고 선사해 주었던 발명가 에디슨처럼 그렇게 일어서는 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본고는 살펴 졌고 열등감에 접근되었으며 마침내 벼룩 훈련을 찾아내었다. 


 환경의 병을, 재물의 병을, 가정의 불운이라는 장애의 병을 뛰쳐나오기 위하여 외로운 벼룩 훈련가가 되어 뛰고, 또 뛰고 있노라면 능력 주시는 분께서 마침내 운명이라는 뚜껑을 열어 재껴 버리실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위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힘껏 나팔을 불 것이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 12)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