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김수현 작가의 한풀이인가

도제조 안형식 2007. 5. 16. 17:34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김수현 작가의 한풀이인가
애정과 우정 사이에 걸친 고무다리
안형식 논설위원  
 

로미오와 줄리엣
 
한 편의 명화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이 있다. 감동이다. 얼마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명장면과 명대사 그리고 배경음악이 동시에 떠오른다. 마치 그 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듯 명대사에 떨고 음악에 떨고 장면에 몸을 떤다. 명치끝은 스위치가 된 듯 명치끝을 누르면 어김없이 그 장면이 떠오른다.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도 명치끝을 누르면 잔영으로 남아 있던 명장면은 다시 가슴 속에서 영사된다. 어느덧 명대사는 입속으로 옮겨 와 주절거리게 되고 배경음악은 다시 고요히 흐른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명치끝이 아리다. 한 프로 틀어주어야 한다.
명장면, 명대사, 분위기를 주도했던 배경음악
 
3가지 3대 요소는 명화의 원소이며 클라이맥스이다. 역동적인 줄거리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발진한 전투기처럼 빠르게 전개되고 순간적으로 찾아온 클라이맥스는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전혀 의도된 것이 아닌 것처럼 위장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설마 했던 망설임과 그럴 것 같더라니 라는 자포자기와 어쩔 수가 없어 라는 탄식이 한 덩어리가 되어 관객은 충격으로 인해 숨을 멈춘다. 그리고 그 장면과 하나가 된다. 그 찰나의 시간에 관객은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고 마침내 모던적인 윤리를 풀고 도덕을 잠재운다. 숨을 멈춘 그 찰나의 시간은 여자 관객은 여주인공이 되어 치마끈을 풀었고 남자 관객은 말없이 허리띠를 풀며 쓰러진 시간이다.

영화처럼 사랑하고 싶어
 
사고 친 한 남자와 한 여자. 둘이 벌이는 애정행각은 진하다 못해 가슴에 불을 지핀다. 감자요리 하나를 배우고 나서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자랑하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화영과 그걸 대견하다고 맞장구를 쳐주며 씁쓸히 웃어야 하는 준표.

화영은 잃을 것이 없으니 깡다구로 나간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도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막 나간다. 천하에 당할 장사가 없다. 잃을 것이 많은 준표는 벌써 가정을 잃었다. 윤리와 도덕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할 교수라는 직이 요구하고 있는 기준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니가 보고 싶었어..."
 
아니 이게 웬 시츄에이션? 건방까지 떤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 사살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지수의 힐문에 화영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니가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말을 내 놓고는 감정에 몰두한다.

여기에서 애정과 우정 사이의 흔들거리는 고무다리는 더욱 크게 출렁거린다. 애정이라는 이쪽 봉우리와 우정이라는 저쪽 봉우리에 걸쳐진 구름다리는 고무다리이다.

추운 겨울, 개울에 물이 얼면 썰매를 탄다. 그리고 거기에는 썰매 터를 주름잡는 짱과 일당 몇의 악동들이 있다. 이들은 지략가이며 전술가로서 고무다리파로 불린다. 이들은 매일 아침 짱돌로 얼음을 야금야금 쪼실라 놓아 몰캉거리는 고무다리를 만든다. 고무다리를 통과하지 못하면 왕따 당하고 고무다리를 통과하면 반드시 한 녀석은 매기를 잡는다.
 
러시안룰렛(Russian roulette)처럼 피해갈 수 없는 고무다리. 몇 번 통과하면 물렁물렁 한 것이 언제 폭삭 주저앉을지 모르는 고무다리. “니가 보고 싶었어” 하고 눈물을 흘리는 화영의 모습에서 죽지 못해 고무다리를 건너다 매기를 잡았던 그 때의 아찔함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지수의 어눌한 항변과 화영의 눈물 연기. 화영은 이제 간다고 하면서 우산을 꺼내들고, 지수는 키를 찾는다. 키를 찾는 지수에게 화영이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 있어. 내가 그 정도도 생각도 안 하고 온 줄 아니. 너는 그게 모잘라.”

너는 그게 모잘라
 
재수 없었던 날, 고무다리에서 매기 잡았다. 매기를 잡고 나서 벌벌 떨며 놈들이 피워 놓은 불을 쬐며 양말부터 말렸다. 두툼한 나이롱 양말에서 김이 나더니 잠시 후에 누린내가 나며 양말에 불이 붙었다.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구멍이 뚫렸다. 영화에서 러시안 룰렛의 장면이 나오면 고무다리가 생각이 나고 매기 잡고 벌벌 떨고 양말 잡아먹고 찔끔거렸던 바보 같았던 그 때 그 장면이 떠오른다.

작가의 한풀이인가, “니가 보고 싶었어. 어디가서 목놓아 펑펑 울기라도 하면 시원하겠는데... 니가 보고 싶었어.” 김수현 작가의 지략인가?

애정 전선이 틀어지면 친구가 생각난다. 내 말을 들어 줄 편한 친구가 생각이 난다. 그래서 우정이다. 좋은 친구는 보석과 같다. 우정이 틀어지면 애정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대발이가 나오는 대가족의 알콩달콩한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 감동을 선사했던 김수현 작가의 인식이 변했나. 세상이 변했으니 나도 변했다. 대 작가의 필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영화처럼 살고 싶었는데 그리 못살아 봤으니 작품 속에서라도 한 번 해보고 말게다.

불륜도 대작가의 필로 나오면 사랑이 되나? TV리포트를 쓴 어떤 기자는 코끝이 찡하는 명대사로 꼽아 주었다. 친절하게도 이날 시청률은 시청률조사회사인 AGB닐슨 미디어 리서치 결과 26 %를 기록했다고도 적었다.

“파리의 연인” 강은정 작가의 한풀이론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강은정 작가는 한겨레신문 2006년 8월 23일자 판에서 <한국인들은 ‘연애질’만 하고 사나?> 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정신과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드라마를 보면 방향타를 잃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착잡하다는 심경으로 자신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원고를 쓰던 시절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과연 드라마가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느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고민을 말한다.

처음 작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했다고 했다. 죄와 벌, 폭력, 종교, 이혼, 죽음 같은 무거운 문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소재로 선택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그 사건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순히 차용했다고 했다.

두 번째 작품에는 무조건 재미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야기 유희의 기본 속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경제도 힘든 때에 무엇이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드라마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을 할 땐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단다. 강 작가는 그것이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드라마는 창작자로서 나만의 배설의 통로도 아니고, 무조건 웃자고 만들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반성이 된다고 고백했다.

과연 작가 개인의 한풀이나 해보고 싶었던 사랑타령을 풀어보자고 몇 십억 원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하는 중심에 서 있는 작가의 책임영역에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다고 반성한다 했다.

강 작가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에 한풀이적인 사랑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작가라는 직업은 천성이며 예술이지만 방송작가에게는 거기에 더해 서비스 마인드를 가지고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성한다 했다. 자성의 계기는 작가의 시대적인 정신을 이끌어 가는 지성으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한풀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의 특성상 자신이 작품을 통해서 한풀이를 하고 싶은 욕망은 반드시 가지고 있다. 왜냐면 작가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과거의 시간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현재의 시간을 빌어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욕망은, 참을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이겨 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약속을 지켜 낸 일이다.
강 작가는 가지지 못한 시절,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쏟아내는 건 일기장이면 족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그런 한풀이적 사랑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강 작가의 지적에 대해 김수현 작가는 어떤 답을 내 놓을까. 다음은 강 작가가 작가들 특히 드라마작가들에게 발하는 일갈이다.

“사랑을 통해, 가족을 통해, 일을 통해, 친구를 통해 우리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는 주객이 바뀌었다. 모두들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 같다. 사랑을 통해 이루어야 할 개인의 성찰과 성장, 인생의 철학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냥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끝이 난다. 수단이 목적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왜 더 깊게 가지 못할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연애질로만 돌아가거나 시청자들이 그 정도로 얄팍하진 않을 것인데 정작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얄팍하다. 그래서 트렌디드라마가 끝을 보게 되었다. “너를 갖고야 말겠어”, 혹은 “이 여자가 내 여자야”라고 소리치는 주인공들 말고,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주인공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강은정, 드라마 〈파리의 연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