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있는 문학개론

제4장 작가의 삶과 작품의 영역

도제조 안형식 2009. 7. 10. 20:44

제4장  작가의 삶과 작품의 영역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작가의 삶은 곧 작품의 영역을 한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었느냐 불행한 삶이었느냐에 따라서 묘사되는 작품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면 작품 속에서는 희극적인 정경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작가가 꿈꾸었던 행복한 삶의 정겨운 풍경이며 늘 가슴에 담아 두었던 동경이며 그림입니다. 행복한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그리고 절망이 교차되는 감정으로 잃어버린 시간 동안 생각 속에서 늘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과 같은 것입니다. 작가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면 작품 속에서라도 타인의 비극에 대하여 글을 쓰게 되면 당장에 자신의 아픔이 되살아납니다. 마땅히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바탕으로 일기 혹은 수기와 같은 형태로 비극에 대하여 정면승부를 거는 작가도 있습니다.


김동길 교수는 고려대 교수시절에 “괴테와 파우스트를 모르는 학생은 대학생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모르면 고대학생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학생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셰익스피어와 햄릿이 어릴 때의 친구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학생도 보았다고 하면서 고전을 모르면서 어찌 학문을 하겠느냐고 개탄을 했습니다. 바르고 정직한 말로 유명한 김동길 교수가 그 학생을 얼마나 혼 구멍을 냈을까요. 


그 생각이 나서 셰익스피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 셰익스피어는 나이가 없는 스승이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문학의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의 연관성을 통해 작가의 삶이 작품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셰익스피어의 삶이 작품에 끼친 영향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이 낳은 국민 시인이며 현재까지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힙니다. 영국문학의 문호이며 자존심으로 추앙받는 작가입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쓰인 그의 희곡은 여러 극단에서 공연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각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넘나들며 넓고 깊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 언어의 연금술사와 같은 풍부한 언어 구사력, 다양한 무대 장치 등의 솜씨는 현재까지도 그를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은 '한 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뜻대로 하세요', '말괄량이 길들이기', '십이야'이지요. '리어왕', '햄릿', '맥베스', '오셀로'의 4대 비극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입니다.


셰익스피어는 1590~1613년 까지 적극적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초기에는 습작적 경향을 보였고  영국사기(英國史記)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일부의 대표작들이 발표된 비극의 시기, 만년에 가서는 화해(和解)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른바 로맨스극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습작적인 작품이라고는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셰익스피어의 창작성은 천재적이라는 칭송과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1) 생애와 반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스트랫퍼드 온 애이번(Stratford-on-Avon) 출생했으며  그래머 스쿨(초등교육기관)에서 수학했습니다. 1582년 8살 연상의 앤 하서웨이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1585~92년 확실한 기록이 없어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연대(the lost years)'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혹자는 글로스터 지방에서 학교 선생을 했으리라는 추측이 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는 1587년 혹은 1588년부터  런던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1594~1600년까지 극단생활을 하면서 가장 화려한 활동 기를 보냅니다. 이때에 ‘5대 희극’이 차례로 발표되었습니다.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망으로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여왕을 잃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시대'가 시작됩니다. 1613년 <헨리8세>의 발표를 끝으로 창작활동은 종결되고 1616년 사망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1600년 이후에 발표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황금기, 즉 1594년부터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든든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탄생된 작품이 5대 희극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난 후에 4대 비극이 발표되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반전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작가의 현실을 작품에 그대로 옮겨 표현했다고 할까요. 이쪽을 취해도 저쪽을 취해도 역시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삶은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2)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  


1)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에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전개하고 있는 반전의 특성이 있습니다. 극중극의 형태로 전개되는 스릴의 묘는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합니다. 네이버 사전을 활용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영혼의 색깔은 각각의 희곡작품에서 같은 색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청포도 색깔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① 한 여름 밤의 꿈

1600년 간행된 작품으로 1594∼1595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아테네의 시슈스 허포리타의 결혼식이 임박했을 때, 마을의 처녀 허미아는 부친이 정해준 디미트리아스가 아닌 사랑하는 라이샌더와 함께 아젠스의 숲에 몸을 숨깁니다. 디미트리아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고, 디미트리아스의 옛 애인 헬레나도 숲으로 들어갔어요. 숲에는 많은 요정(妖精)들이 살고 있으며 이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그리스신화의 아르테미스)가 인간처럼 부부싸움을 합니다. 


때마침 공작의 결혼식을 축하하려는 마을 사람들이 소인극(素人劇)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랑의 비약을 가진 요정 바크가 뛰어들어 갖가지 우스운 일들이 전개됩니다.  결국 디미트리아스와 헬레나, 라이샌더와 허미아가, 시슈스 공작과 히포리타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고 마을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상연되어 모든 일이 즐겁게 끝납니다.  아테네의 귀족과 서민들, 요정이라는 세 세계가 숲에서 한데 모여 서로 친근한 관계를 맺으면서, 낭만적이고 몽환적(夢幻的)인 세계가 전개되는 작품이지요. 


이 희곡에 의한 음악 작품으로는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의 부수음악(附隨音樂)이며 전곡이 13곡으로 되었고, 곡 중의 《결혼 행진곡》은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과 더불어 유명합니다. 영국의 작곡가 B.브리튼의 오페라로 피터 파어즈 대본의 전3막이 있습니다. 또한 이 극을 가극화한 것에 프랑스 작곡가 C.L.A.토마의 동명으로 된 작품(1850)이 있습니다.


② 베니스의 상인


1596년경의 작품으로 5막극입니다. 1600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옛날이야기를 희곡으로 구성한 작품입니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로부터 벨몬트에 사는 포샤에게 구혼하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은 없고  배를 한 척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안토니오는 가지고 있는 배를 담보로 하여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렸습니다. 만약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증서를 써 주고 말이지요. 포샤는 구혼자들에게 금·은·납의 세 가지 상자를 내놓고 자기의 초상이 들어 있는 것을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바사니오는 납으로 된 상자를 골라 그 안에 있는 포샤의 초상을 잡아 구혼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배가 돌아오지 않아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재치 있는 포샤가 남장을 하고 베니스 법정의 재판관이 되어,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이로써 샤일록은 패소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 후 안토니오의 배는 돌아오고 샤일록의 딸 젠카도 애인 로렌조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럴듯하고 로맨틱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감미로운 장면이 풍부한 희극이지요. 하지만 당시 런던 시민이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반 유대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줄거리입니다. 이 극에서 샤일록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요. 안토니오와 바사오니의 우정과 의리가 돋보이는 작품이구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살 1파운드를 저당 잡힌 안토니오의 재판을 슬기로운 처녀 포셔가 지혜롭게 해결한다는 내용이 시원합니다. 또  바사오니와 포셔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감동을 줍니다.


③ 뜻대로 하세요


5막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으로 1599년경의 작품입니다. 1623년에 간행되었습니다. 동시대 작가 T.로지의 소설 《로잘린드 Rosalynde》(1590)에서 취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생 프레드릭에 의하여 추방된 공작(公爵)은 소수의 부하를 데리고 아덴의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공작의 딸 로잘린드는 프레드릭의 딸 시리아와 친하기 때문에 궁정에 머무르고 있다가 청년 오란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숙부의 미움을 받고 궁정을 쫓겨나 남장(男裝)을 하고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시리아도 그녀를 따라 나섰습니다. 오란드도 간악한 형 오리바에게 추방되어 아덴의 숲에서 로잘린드와 만나지만 변장하고 있기 때문에 로잘린드를 몰라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작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동생을 살해하려던 오리바는 동생에게 구조되어 개심하고, 프레드릭도 은자(隱者)의 설교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공작은 궁으로 돌아옵니다. 오란드와 로잘린드, 오리바와 시리아는 각각 결혼합니다.


이 연극은 명랑한 로맨스를 다룬 희극이지만, 영지(領地)를 둘러싼 혈육 간의 분쟁과 숲에서 사는 제이크 위즈의 염세적이고 풍자적인 대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암흑면(暗黑面)을 묘사한 점이 특징으로 평해집니다.


④ 말괄량이 길들이기


1594년경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유쾌한 희극입니다.


파듀아의 부호 밥티스타의 큰딸 캐서리나는 성격이 거친 데 비해 동생 비앤카는 온순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랍니다. 그 때문에 언니인 캐서리나의 성격은 더욱더 거칠어지고 난폭한 행동을 거듭하여 접근해오는 남성도 없었지요. 베로나의 한 신사 페트루키오가 그녀에게 구혼하고 그녀보다 더 난폭한 언동으로 그녀를 길들입니다. 한편, 르센시오는 동생인 비앤카를 사랑하여 가정교사로 변장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맙니다.  또한 페트루키오의 친구인 호텐쇼는 미망인과 결혼하는데 세 사람의 신부 중에서 남편에게 가장 잘 순종하는 것은 캐서리나라는 내용입니다.


활달한 남성 페트루키오가 고집 센 여자 카타리나를 뒤 쫓아다니다 결혼에 성공하나 그 즉시 아내를 멋지게 길들여버린다는 본 줄거리에다 루첸티오라는 사나이가 가정교사로 변장하여 카타리나의 여동생 비안카에 접근한 끝에 경쟁자를 물리치고 결혼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전형적 이탈리아식 희극으로서 사랑·계략·결혼으로 이어지는 셰익스피어의 전법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의 상당수 희극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극중극(劇中劇)의 형식이 이 극의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반전 드라마와 같은 형태이지요.  영국의 시골뜨기 땜장이가 길에서 만취된 채 끌려가 자기도 모르게 즉석귀족이 되어 어느 큰 저택에서 연극을 구경하게 됩니다. 그 연극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입니다. 이처럼 극중극의 형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논리를 적용하여 흥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극중에 이해할 수 없는 도입부와 전개과정은 마지막 장면까지 가면 왜 그랬는지에 대한 답이 나오도록 배열되어 있습니다.


뜬금없이 툭 튀어 나오는 장면으로 질문을 던져 놓고 흥미를 유발하여 작품 속에 몰두하도록 배치한 극중극의 형태는 빤한 스토리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나중에 답을 처억 내놓는 형태입니다. 결과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작가나 답을 요구했던 독자나 양쪽이 다 유쾌해지는 옴니버스 형태의 극입니다.


단순한 스토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볼만한 극으로 완성시키는 셰익스피어의 계략은 흥행 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뭐가 있다는 식의 등식이 성립되도록 치밀하게 구성하는 셰익스피어는 독자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셰익스피어의작품의 특징은 극중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⑤ 십이야


셰익스피어의 3막 희극으로 1600년의 작품입니다. 십이야란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에 해당하는 1월 6일을 의미하는데, 이 희극은 1601년 1월 6일 이탈리아의 오시노 공작을 환영하기 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궁정에서 초연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계통의 설화에서 취재한 것을 극화로 재현했습니다.


똑같이 닮은 남녀 쌍둥이인 세바스찬과 바이올라는 배가 난파하여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바이올라는 남장(男裝)을 하고 오시노 공작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사랑의 사자가 되어 올리비아 공주에게 심부름을 가게 되었습니다. 공주는 그녀를 남자로 알고 사모의 정을 보냅니다.


그러나 바이올라는 공작을 은근히 사랑하네요. 이윽고 세바스찬이 나타나자 공주는 그를 바이올라로 잘못 알고 결혼식을 올리는데, 마지막에는 일체가 판명되어 바이올라는 공작의 아내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극 중에는 청교도적 위선자인 말볼리오를 주정뱅이 노기사 토비 벨치 등이 조소를 퍼붓는 멋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들 모두 젊은 남녀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그리고 있고, 연인들은 고난과 역경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 행복한 결말로 맺어진다는 내용은 언제나 상큼한 청포도 맛이 납니다. 그런 사랑을 못해본 사람에게는 부러움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작가는 자신이 원했으나 못해본 일에 대하여는 장밋빛 환상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 장밋빛 환상을 글로 자아내어 한 폭의 비단 필을 직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로멘스 작가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글 내용에 빠져들어 열꽃을 앓고 행복해진답니다.


2)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의 탄생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타계하고 난 뒤에 발표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리어왕', '햄릿', '맥베스'는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했고 오셀로'는 가정의 비극을 담았습니다. 내용은 네이버와 다음, 야후의 백과사전을 참조했습니다. 4개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작가의 색깔은 먹장구름과 같은 색깔로 보입니다.


① 리어왕


5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160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1608년에 간행되었습니다.  리어왕은 영국의 전설적인 국왕으로 16세기의 영국문학에서도 가끔 등장하고 있습니다.


리어왕에게는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라는 3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리어왕이 너무 늙어 딸들에게 국토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고 딸들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물어봅니다. 고네릴과 리건은 그들의 사랑을 과장하여 표현하였으나 성실한 코델리아는 자식으로서 효성(孝誠)을 다할 뿐이라고 덤덤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노한 국왕은 코델리아를 추방하고 국토를 두 딸에게만 나누어 주고 맙니다. 


그러나 국토를 물려받은 두 딸의 냉대(冷待)를 참지 못한 리어왕은 충신 켄트와 어릿광대를 데리고 궁전을 나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야를 헤매면서 불효한 두 딸을 저주하며 광란(狂亂)합니다. 이윽고 리어왕은 왕도 한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은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초 끝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코델리아는 부왕(父王)의 참상을 전해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진격하였으나 싸움에 패배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함께 포로가 되어 코델리아는 병사의 손에 교살되고 맙니다. 리어왕은 죽은 딸의 시체를 안고 슬픔에 못 이겨 절명합니다.  


② 햄릿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5막 비극으로 1601년경의 작품입니다. 1603년에 해적판이 나왔으나, 이듬해 정판본이 간행되었습니다. 햄릿 왕자에 대한 원래이야기(原話)는 12세기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의 《덴마크사(史)》(1514)에 보입니다. 이미 1589년에는 런던에서 햄릿극(劇)이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키드로 추정되며, 작품은 보통 《원(原)햄릿》이라 불렀으나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것에 의하여 새로운 희곡을 쓴 것으로 상상됩니다.


덴마크의 햄릿 왕이 급서하자 왕비 거트루드는 곧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와 재혼하고, 클로디어스가 왕이 됩니다. 햄릿 왕자는 서둘러치러진 어머니의 재혼을 한탄하는데, 마침내 선왕(先王)의 망령이 나타나, 동생에 의하여 독살(毒殺)되었다고 말합니다.


햄릿은 복수를 위하여 거짓으로 미친 체했습니다. 지식인인 햄릿은 망령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왕의 본심을 떠보기 위하여 국왕 살해의 연극을 해 보이는데, 왕은 안색이 변하여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그 후 햄릿은 재상 폴로니어스를 왕으로 잘못 알고 죽이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폴로니어스의 딸 오필리아는 미쳐서 죽습니다. 왕은 햄릿을 잉글랜드로 보내어 죽게 하려고 하나 도중에서 되돌아옵니다.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스는 왕의 꾐에 빠져 햄릿을 독을 바른 칼로 죽이려고, 왕과 왕비 앞에서 펜싱 시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의 계획은 틀어져, 왕비는 왕이 햄릿을 독살하려고 준비한 독주(毒酒)를 모르고 마셔서 죽고 맙니다. 레어티스와 햄릿은 독을 바른 같은 칼에 죽는데, 햄릿은 최후의 순간에 그 칼로 왕을 죽인 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왕위는 노르웨이 왕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유행한 복수비극의 형태를 취하면서 부왕의 원수를 갚아 국가질서의 회복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지식인 햄릿 왕자의 고뇌를 주제로 한 비극적 작품입니다. 햄릿의 사색적 성격은 19세기의 낭만주의에 의하여 더욱 높이 평가되어 이 비극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③ 맥베스


5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초연시기(初演時期)와 함께 일반적으로 1605∼160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가 홀린셰드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서 취재된 작품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무장(武將)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에 현혹되어 기승을 부리는 부인과 공모하여 자기의 거성(居城)을 방문한 국왕 던컨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장차 왕자가 된다는 예언을 믿고, 친구 뱅코 부자(父子)의 암살을 계획하지만 그의 아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맥베스의 폭정을 저주하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고 반란이 일어나자 맥베스는 다시 마녀를 찾아가 예언해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마녀는 버넘의 숲이 그의 성을 공격하지 않는 한 안전하며, 여성으로부터 출생한 사람은 결코 그를 패망시킬 수 없다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던컨왕의 유아(遺兒) 맬컴을 추대한 맥더프가 인솔한 군대는 버넘 숲 속의 나뭇가지를 베어 들고 몸을 감추면서 맥베스의 성(城)을 공격해왔습니다. 이때 부인이 미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망하던 맥베스는 최후의 용기를 내어 싸우지만 맥더프가 어머니의 배를 절개하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자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대결 끝에 맥더프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 중에서 가장 짧으며 진행의 템포도 빠릅니다. 이 비극을 소재로 한 오페라로는 베르디 작곡의 4막 가극이 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교향시(작품 23) 등이 있습니다.


④ 오셀로


1604년경의 작품으로 1622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소설에서 취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식 제명은 (베니스의 무어인 오셀로의 비극)입니다.


베니스 공국의 원로 브라반쇼의 딸 데스데모나는 흑인 장군 오셀로를 사랑하게 되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때마침 투르크 함대가 사이프러스섬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자, 오셀로는 이 섬의 수비를 위하여 처와 함께 사이프러스로 떠납니다. 오셀로의 기수(旗手) 이아고는 갈망하던 부관의 자리를 캐시오에게 빼앗긴 데에 앙심을 품고 두 사람에게 복수할 것을 계획합니다. 


사이프러스에 도착한 날 밤 이아고는 주벽이 있는 캐시오에게 일부러 술을 먹이어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오셀로에게 부관의 자리를 파면 당하자 이번에는 데스데모나를 통하여 복직운동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오셀로에게는 캐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밀통(密通)하고 있다고 넌지시 흘립니다. 오셀로가 그녀에게 주었던 귀중한 손수건을 자기 처인 에밀리아에게 명하여 훔쳐내서 캐시오의 방에 떨어뜨려 놓아 가짜 증거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경솔하게도 그를 믿었던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침대 위에서 눌러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모든 것이 폭로되자 오셀로는 슬픔과 회한으로 자살하고 이아고는 가장 잔혹한 처형을 받습니다. 


이 작품은 "햄릿", "리어왕", "맥베스"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로 손꼽히지만, 다른 비극에 비하여 사실적이며 가정비극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질투를 선명하고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콜리지가 ‘무동기의 악’이라고 부른 이아고의 악의 추구는 무시무시할 만큼 박력이 있다는 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위의 내용은 네이버의 두산 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들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통해서 선과 악의 개념을 확실히 정돈하여 권선징악의 형태로의 결말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두뇌가 제 아무리 발달해서 권모와 술수에 능하고 계략의 천재라고 해도 결국에 가서는 징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결말로 끌고 갑니다. 4대 비극 중에 햄릿, 리어왕, 맥베스는 왕궁 속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이 라는 무대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왕관 쟁탈전은 권력가이든 서민이든 간에 관심을 끌어 모으는 엄청난 매력이 있는 소재임은 확실합니다. 여기에 추한 계략과 모략이 깊이 개입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과 그 계략과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판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극을 통해 이런 호기심을 풀어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의혹의 눈길을 독자들의 눈을 가장하여 들여다보고 싶어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이 의도된 계략과 음모의 결과는 아니었는가에 대하여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시선이 유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셀로는 가정적인 비극을 다룸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이 왕가에서 일어난 모종의 비극은 아니었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작가의 추리가 집요하게 죽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에 대해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영역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의 영향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각의 향방에 따라 셰익스피어의 시각이 교차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카톨릭의 시각과 기독교의 시각이 교차하면서 국왕 색깔에서 드러나는 취향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하여 작품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여왕이 생존해 있는 기간에는 로맨스와 사랑의 희곡을 작품화했습니다. 그 작품은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지만 그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에 도달한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사랑하는 감정으로 작품을 썼다고 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품었던 연정은 핑크빛이었을까요? 여왕이 죽고 난 후에 4대 비극을 쓰며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셰익스피어의 삶은 재미없는 삶이었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무미건조한 삶에 불과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마치 극중과 닮은꼴의 삶을 살았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웅에 의하여 역사가 발원되고 그 역사가 가는 향방에 따라 문화가 꽃피워지거나 시들어졌음을 웅변합니다. 곧 문화란 그 시대의 ‘영웅의 발자취’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당장에 역사적 인물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으니 셰익스피어의 문학도 함께 죽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작가의 작품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인하여 후대인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사상이 그러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고 지식이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영향이 다른 사람의 삶의 영역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2. 가정적인 불행과 장애가 작품에 끼치는 영향


작가의 가정적인 불행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작품의 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작가는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가의 일대기를 보면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식과 부인을 잃었다는 가정적인 비극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정적인 불행은, 작가의 필력은 물론하고 생명까지 위협을 줄 수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대체적으로 볼 때, 작가들의 배우자들은 작가에게 상당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세계에 대한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져서일까요. 아니면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일까요. “두 가지가 다”일 것이지요. 그래서 작가들은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극을 노래하고 이야기 하는 작가들의 심간에는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는 슬픔과 슬픔의 원인에 대한 울분이 담겨져 있습니다. 비극은 체험하지 않고는 치밀한 묘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극에 울분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적인 사실에 묻어나는 울분의 기복과 감정의 비례는 경험하지 않고는 묘사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삶이나 환경을 오히려 보람과 행복으로 승화시킨 작가들도 많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치열한 작품 활동으로 비극적인 삶이나 환경을 바꾸어 낼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헬렌 켈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효석 작가와 헬렌켈러 두 작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1) 이효석 작가


1) 이효석의 감성적 특징


이효석 작가(1907~1942)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 동안의 생애를 살며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겨우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국가를 잃은 국민이며 시대의 지성인으로 실향 의식을 지닌 어딘가 있을 같은 이상향을 찾아 헤맨, 일종의 보헤미안 내지 코스모폴리탄적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감성은 섬세하고도 유약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주변에 대한 예민한 대타의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의식하며 살았는데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차려 입고 다녔고, 총독부에 취직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견뎌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이효석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필력은, 사람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정확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해석력이 뛰어나 사람의 심성과 자연 정경을 묘사하는 가히 천재적이라 만합니다


필력은 이효석의 가치관에서 출처되었음이 분명한데, 이효석은 나날의 일상에서 예술과 어우러지는 하루하루의 삶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인간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시와 문학에 가장 가치를 부여 했지요. 그는 평소에 말하기를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이 삶이 전부인 정통작가였습니다.


시대를 걸음 앞서 이효석의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보여 지는 삶의 행태를 보십시오그는 빵과 버터 등의 음식과 커피 그리고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를 즐겼으며 프랑스 영화감상을 즐겼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같습니다. 당시 일제시대라는 특성으로 , 일반인은 엄두 내기에도 어려운 생활이었지요


이효석은 평양에 있는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했는데, 그의 정원에는 서양 화초가 가득 둘렸고, 유럽여행을 꿈꾸었습니다. 그의 서구적 취향은 신학문을 배우고 서양문화에 일찍 눈을 아버지의 영향, 고교와 대학시절 동안 읽은 서양 소설들, 대학에서 전공한 영어영문학, 외국인 교수와 만남, 주을온천일대에서 직접 체험한 백계 러시아인의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되어집니다


2) 생애


이효석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장르는 소설에 중심을 두었고 습작기에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하는 산문과 운문의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품 활동을 것으로 유명합니다. 후에 유명세를 타고 뒤부터 상당히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으며, 문학가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성농업학교 교사(1931 - 1934), 숭실전문학교 교수(1936 - 1938),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1938 - 1942)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직에 있으면서 그는 영어영문학을 가르쳤으며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맨스필드의 시를 낭송해주는가 하면, 입센, 토마스 , 콕도의 작품을 해설해주기도 하며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효석은 봉평과 서울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평창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시기에 그는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하거나 풀밭과 거리에서 놀았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山果), 꿀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경험은 고향과 자연을 그린 작품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효석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졸업 결혼 초기까지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교 시절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며 기숙사에서 체홉과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과, 토마스 , 캐서린 맨스필드 등의 심미주의 소설을 즐겨 읽었습니다.

대학을 다닐 이효석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학교에 자주 출석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그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서울 수송동에서 초라한 하숙생활을 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으나 문인, 연극인, 영화인과 어울려 다니면서 화려하게 보이는 생활을 했습니다. 부인 이경원을 만나 결혼하게 되어 수송동에 신혼방을 마련하였습니다.


이효석은 1932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효석은 가까운 바다, 특히 독진 해변을 자주 찾으면서 바다와 결혼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다에 매료되어 해변을 걷기도 하고 해수욕을 즐기며 가보지 못한 이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시생활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연의 모습을 만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효석은 경성에서 당시 러시아와 가까운 국경도시였던 나남과 백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던 주을온천을 찾으며 이국풍의 풍경을 많이 접했고, 나남의 찻집 '' 찾아 서양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며 서구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효석은 1936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리 일명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생활, 작가로서 유명한 생활을 이어 나가며 「모밀꽃 무렵」과 같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작가는  활발한 사회생활과 함께 주을 온천과 동해안 관북지방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해 1940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지요

작가는 1942 5 3 고열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5 7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한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10일이 지나자 말도 없게 되었습니다. 5 22 의사로부터 단념적 선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5 25일아침 7 30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 그의 아버지는 시신을 화장, 운구하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매장되었습니다


그의 묘는 1973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지가 훼손될 위험이 있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 변으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1998 9 경기도 파주시 경모동화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효석이 세상을 차례(1959 춘조사, 1971 성음사, 1983 창미사) 걸쳐 전집이 발간되었으며 수백여 종에 달하는 작품집이 발간되었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은 서정성이 뛰어나 1948 이후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모밀꽃 무렵", "", "", "()" 등의 소설과 "낙엽을 태우면서", "화초", "청포도 사상" 등의 수필이 여러 차례 수록되었습니다. (자료출처 : 이효석 문학관)


3) 대표작 메밀꽃 무렵’의 특징


이효석 작가의 대표작인 “메밀꽃 무렵”은 일제의 강점기인 1936년에 발표된 토속적인 작품으로 시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의 평민 구조와 문화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엿볼 있는 자료를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삶을 엿볼 있습니다.


작품의 무대는 메밀군락지를 따라 봉평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메밀꽃밭 길이며 장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여기에서 일탈하여 제천까지 무대를 넓혀 인간 삶의 동적인 문제이며 벗어날 없는 주제인 , , , 락의 문제를 작품 속에 내재시켜 일정한 시간 동안 잠복시켜 놓고 숙성시킵니다. 잠복되어 있던 , , , 락의 주제는 제천까지 넓혀진 무대에서 20 전의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충분히 숙성되어진 맛으로 독자의 미각을 사로잡습니다. 이효석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필체는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들에게 싸아하면서도 구수한 통메밀 국수의 감칠맛으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사실적인 묘사는 마치 현미경으로 살펴보는 세밀하기까지 합니다


줄거리의 구성은 전체의 틀이 하나의 문단과 같이 단순하고 통일되어 있어 마치 아는 길을 찾아 가는 것과 같이 전혀 막힘이 없고 단숨에 읽어 내리게 되는데요, 읽은 후의 뒷맛이 개운하고 시원합니다.


드팀전이라 불리는 방물장수 생원과 늙은 수나귀는 서로가 운명이며 몸과 같은 양태로 나타납니다. 봉평 장터에서 각다귀들에 의해 발정한 수나귀와 장면을 보고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모르는 왼손잡이 생원의 서림은 작가의 현미경을 통해 해부되어집니다. 해부되어진 생원의 굴곡진 인생은 구릿하게 표현되어지며 한편으로는 동정되어지는데, 생원의 연륜이 쌓여진 인생길의 사연을 동이의 사연과 동반시키며 슬며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의 고리로 묶습니다. 작가의 묶는 시도가 진행되는 동안에 독자는 생원의 부인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음 장면에 펼쳐질 녹록치 않은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암시받으며 작품에 빠져듭니다. 작가는 장면부터 독자와 고도의 머리싸움을 하게 되는데, 결과는 독자의 케이오 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대단한 작품으로 평하는 것이지요.


“메밀꽃 무렵”이라는 제목과 이야기의 줄거리에 숨어 있는 뼈대는 작품이 유려하면서도 속이 깊은 작품임을 미루어 짐작케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정오의 햇빛에 꽁지를 드러낸 물고기의 편린이 반짝하고는 이내 물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과 같아서 대체 호수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고 지금은 물속 어디만큼이나 도망갔을까 하는 흥미를 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눈앞에 명화를 놓고 감상하고 있는 , 어찌 보면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어 놓는 작품입니다. 줄거리 내용 구성의 장면 장면에 치밀하게 짜인 조직구성과 세련된 표현기법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품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며 적당히 도전하면서도 독자의 요구사항에 충실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작품의 빼어난 완성도로 인하여 교과서에 실려 단편소설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메밀꽃 무렵이라는 제목을 선택했습니다. 제목부터 마치 여름날 멍석 위에 앉아서 더위를 식히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이 그대로 연상되어지지 않는가요. 멍석위의 이야기꾼들에게는 시원한 막걸리와 메밀국수가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김치두부라도 있다면 호사가 아니겠던가요. 여름날 밤의 이야기. 선녀의 목욕하는 장면이 눈앞에 삼삼하게 펼쳐지는 하늘의 이야기처럼 구수하면서도 무언가 가지 비밀 정도는 담겨져 있을 이야기의 제목으로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곧바로 메밀로 만든 시원한 막국수가 연상되어지는 제목이 만들어졌다면 다음은 국물이 있어야겠지요. 작가는 마리를 통째로 넣고 꿩의 국물로 국물을 잡았습니다. 꿩으로 우려낸 최고의 국물 맛은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이어지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길’에 있습니다. 국물을 얼음물에 식혀 차게 만들어 ‘장터’라는 우유 빛이 감도는 커다란 자기 사발에 담고는 20 , 첫사랑이라는 ‘편육’과 감춰져 있던 마눌과 아들이라는 ‘양념장’에 죽도록 얻어터지고 견디다 못해 도망 나와서 장꾼이 되었다는 아들의 고백이라는 ‘고명’을 듬뿍 얹어 상에 내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유난히 맛있고 시원합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위로 여름밤의 달빛이 비쳐지고 메밀꽃에 반사된 달빛은 교교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강물이라도 되는 유유히 흐르고 있는 유속이 빠르지 않은 강물로 연상되어지며 독자의 시선과 마음은 고요한 상태로 이완되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음 장면의 전개에 대한 호기심으로 작품의 속에 빠져 들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독자는 등에 방물의 무게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소리가 달라지는 늙은 나귀의 뒤로 생원과 선달 그리고 장터에서 만나 일행이 되어버린 동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정경은 그대로 수채화가 되어 세밀한 그림이 그려지도록 작품은 전개되어 갑니다. 드디어 연륜이 쌓여 있는 나귀와 생원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며 독자들이 고대하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풀려 나옵니다


이야기로 회상되는 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 멱을 감기 위해 옷을 벗으려고 들어간 물레방아 간에서 성서방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던 등장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어쩔 없이 마른 침을 삼킵니다. 어쩌면 구릿한 이야기가 있는 남여의 섹스 문제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작가의 필은, 예리하게 여인의 감성과 눈물을 불러 옵니다. 서방네 가정의 위기와 대비시키고, 처녀의 눈물을 보니 측은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몸과 마음 전체로 처녀의 아픔을 덮어 주고 싶은 생원은 운명의 서곡에 말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하룻밤의 결과물은 생명의 씨앗이 되어 여인을 어머니로 만들며 운명이라는 속에 가둡니다.


하룻밤의 인연이 결코 속된 것이 아니며 남자의 본능만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작가는 생원을 일편단심 민들레로 만들어 놓고 가정형편으로 몰락한 후에 어머니로서 아들을 키우는 연인의 애곡의 시절을 서럽게 구성하여 전개해 갑니다


여기까지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어 놓은 작가는 동이를 생원의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그래 놓고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유도합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슬픈 기억 속의 여인인 성서방의 딸에게 돌리도록 슬며시 잡아끕니다


회자정리의 순서만 남겨 놓았을 때에 선달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안착하겠다는 통보를 함으로 생원의 결단을 촉구하게 합니다. 생원은 심적인 동요를 일으킵니다. 심적인 동요는 동이와 함께 홀로 남아 기다리고 있는 성서방의 딸이며 동이의 어머니를 향하도록 재촉합니다. 정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생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나귀의 흔들거리는 발걸음에 따라 방울소리가 딸랑이는 가운데 넉넉한 아비의 마음은, 그동안 아비 없이 홀로 자라며 서럽게 성장한 아들. 듬직하게 성장한 동이의 모습에 대견해 하면서도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는 아내와 어머니를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 장면이 다합니다. 마지막 책장이 넘어가며 빈공간이 드러날 , 독자는 다시 책표지로 시선을 가져가고 “메밀꽃 무렵”이라는 제목과 지은이 이효석 이라는 글에 시선이 멈춰집니다. 이윽고 잠시 숨을 고르며 가슴의 감동을 가라앉힙니다. 마지막 부분의 여운은 오래도록 독자의 가슴과 뇌리에 남아 저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영혼과 삶에 힘을 불어 넣어 어느덧 자신의 영혼과 삶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작품이 그러합니다


4)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작가는 시적인 묘사와 함께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작가의 영혼세계가 평화를 염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들여다보면, 여름 밤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밭의 조붓한 길을 통해 작가는 자유를 구가하며 자그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망하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누구의 간섭도 없는 조붓한 , 거기에는 오직 열심히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일상의 대화가 거리낌 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의 삶에 촉매로 등장시키고 있는 수나귀는 어쩌면 일제치하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의도적으로 접근시킨 것이 아닌가 정도로 수나귀를 통해 굴곡진 인생을 살고 있는 시대의 한국인의 삶을 암시해 줍니다. 어쩌면 구릿하고 암울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도 “메밀꽃 무렵”을 읽고 나면 하늘을 보게 되고 생원과 서방네 딸과 아들 동이가 20 세월의 아픔과 슬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 주었으면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소박한 행복에 대한 염원입니다. 어쩌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만한 것도 행복이야 하며 스스로 자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생원과 생원의 인생을 동정하게 됩니다.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신에 대한 동정이기도 하지요

통상 소설의 소재는 틀에서 ,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으로 쓰인 허구와 사실에 입각한 작품으로 구분됩니다. 사람의 일대기에서 소설이 만한 내용의 이야기를 유추해 내는 것이 사실에 입각한 소설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나 혹은 어떤 사물(인물, 역사)에서 소설의 뼈대를 인출해 내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화하는 허구로 나눠집니다. 이중에 허구의 소설은 사실보다 사실답게 묘사해 주는 리얼리티 기법이 동원되어져야 하고 작품의 성공여부는 리얼리티 기법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메밀꽃 무렵”에서 도입된 리얼리티의 주요 작업은 주인공 생원이 회상하는 20 전의 물레방아 부분부터 도입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다소 뻔해 보이는 물레방아 간을 선택하여 무대로 삼았고 여기에 가정문제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아무도 없는 물레방아 간에서 울고 있는 성서방의 딸을 투입했습니다. 물레방아간이라는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할 있는 생원과 성서방의 딸은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구미가 맞아 떨어지는 섹스의 장면을 노출하게 됩니다. 하필 물레방아간이냐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는 이만한 공간이 없지 않느냐는 답을 내어 놓고 독자를 설득합니다. 여기에서시대성이라는 문화적 갈등의 요인이 표출되어 일면 충돌하나 공간성의 부재라는 당시의 상황설정에 설득 당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에 벗은 몸을 가려 있는 공간이 어디 쉬웠겠느냐는 작가의 물레방아간의 도입에 대해 현시대의 독자들이 이해하며 설득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몰고 가는 작가의 의도에 대하여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첫날밤을 지낸 대가로 잉태하여 고통스러운 생활이 예견되어 있는 처녀가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도 생원을 찾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생깁니다. 장터에 가면 얼마든지 찾을 있는 생원을 찾지 않고 20 동안이나 굴곡진 삶을 살게 작가의 상황설정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답답해지고 여전히 불만으로 남습니다. 작가의 리얼리티 기법에 다소 무리한 점이 발견되는 대목입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성서방의 딸이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대목에서 생원을 재회하고 생원은 자신의 지체인 나귀를 팔아서 구해 주는 설정의 대목 정도. 정도야 서비스해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구석에 앙금으로 남습니다.


5) 동반작가


이효석 작가는 동반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반작가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학경향을 가진 작가를 말하는데 러시아 혁명 소련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1920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왕성하였을 사용된 용어입니다. 러시아의 작가로는 I.에렌부르크, S.A.에세이닌, V.이바노프 등이 이에 속합니다. 특히 이바노프의 《빨치산 이야기》(1923), B.A.필냐크의 《나년(裸年)(1922), 레오노프의 《굴 속에 사는 곰》(1925) 대표작인데요, 한국의 독자에게도 익숙한 책입니다


이효석은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본격적으로 등단했습니다. "도시와 유령“은 선동성이 짙은 작품으로 현실에 대한 독자들의 각성을 주문하고 있는 이념적 작품입니다. 이어서 1931 창작집인 ”노령근해“를 발간하여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문학적 지향점의 방향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효석은 동반작가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효석 작가가 동반작가의 길로 들어선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효석 작가가 동반문학에 심취한 원인은 실향의식 속에서 보헤미안적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던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집니다. 공산주의사상과 자유민주주의사상이 정립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효석 작가의 사상은 자유민주주의사상이 확고한 작가로 평해질 만한데 당시에는 서양문화 혹은 신문화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신식 혹은 진보로 말해졌지요사상에 대한 정립이 되어있지 못한 시대이기 때문에 사상에 대한 정체성은 모호한 시대였습니다.


당시대는 조선말기의 봉건적 왕정통치가 힘을 잃는 동안에 전통적인 가치관도 힘을 잃었던 시기입니다.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의 앞서있는 과학의 발전과 저들의 가치관은 시대를 앞서가는 지성인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고 왕정통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다른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서양의 문화권과 가치관을 흠모하던 이효석의 열린 사고는 노동자와 민중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을 민주 혹은 자유주의로 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노선을 지지 선동하던 입장에서 순수문학으로 선명하게 선회하였음이 증거입니다. 자유주의자는 공산주의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효석 작가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1860~1904) 투르게네프 (1818~1883) 작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투르게네프의 행동철학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투르게네프의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농노들을 해방시켜 행동과 농노제에 대한 증오에 단편 “무무 Mumu”와 “사냥꾼의 수기”와 “아버지와 아들”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여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당대의 현실과 맞물려 이효석 작가가 염원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지핀 동력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춘원 이광수와 같은 친일문학파들의 식민지사관에 대한 염려와 증오심으로 친일파의 작품 활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효석(李孝石) 위시하여 유진오(兪鎭午), 이무영(李無影), 채만식(蔡萬植), 조벽암(趙碧巖), 유치진(柳致眞), 엄흥섭(嚴興燮), 홍효민(洪曉民), 박화성(朴花城), 안덕근(安德根) 등과 함께 동반작가의 군을 형성하여 친일파계와 맞섰습니다


동반작가의 작품 뚜렷한 동반문학의 성격을 드러낸 작가 작품으로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 “한귀(早鬼), “홍수 전후(洪水前後), 이효석의 “노령근해(露領近海), 유진오의“여직공”, “오월의 구직자(求職者) 등이 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동반작가의 의미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기의 수년 동안만 가능했을 뿐입니다. 프로 문학이 객관적 정세악화에 부딪친 1931 이후부터 동반작가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로 작가조차도 전향(轉向)하기에 이르렀으며, 1934 박영희(朴英熙) 전향선언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新展開) 경향”에서 절정을 이루었지요


이들 동반작가 중에서 전향하여 가장 선명하게 순수문학에 귀환한 작가로는 이효석을 있습니다. 1933 이효석은 자연묘사와 인간의 () 주제로 “돈()”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화분(花粉)”이라는 장편으로 순수문학으로 귀의하였습니다. 화분을 발표하고 1936년에 드디어 “메밀꽃 무렵”이 발표되면서 이효석은 동반작가라는 별칭을 떼어내게 되었으며 이효석의 작품세계는 순수와 서정적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습니다. (인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순수문학으로 귀의하고 뒤에 발표되는 이효석의 작품은 소설과 , 수필 등의 영역을 망라하면서 인간심리의 내면을 유려하게 묘사해 내며 불후의 명작을 쏟아 놓습니다.  1936 한해에만 『중앙 1·2월호』에 발표된 '분녀' 필두로 ‘산’/삼천리 3월호, ‘들’/신동아 3월호, ‘메밀꽃 무렵’/조광10월호, ‘석류’/여성8월호, ‘천사와 산문시’/사해공론, ‘제작과 시절’/신동아 6월호, ‘내가 꾸미는 여인’/조광2월호, ‘영서의 기억’/조광3월호, 6월에야 봄이 오는 북경성의 춘정/조광4월호, '그때 항구의 '/조광 8월호, ' 작상에 나타난 가을풍경'/조광 9월호, '생활의 기억'/조광 10월호, ‘고요한 동의 '/조광 12월호, '발발이'/중앙 4월호, '모기장'/중앙 7월호, '동해의 여인'/신동아 7월호, '전원교향곡의 '/여성 11월호, '처녀해변의 결혼' '사랑하는 까닭에'/여성 9월호, '뛰어들 없는 거울 세상'/조선일보 710, '작가 노트에서'/조선문학 5월호, '수필록'/조선문학 8월호, '내가 꾸미는 여인'/조광 2월호, '인간산문'/조광 7월호, '고사리'/사해공론 9월호, '청포도의 사상'/조선일보 9월호에 각각 발표되었습니다. 작품들은 이효석 작가의 순수문학의 세계가 체계화 되어 있음을 방증합니다.


이효석은 1942 36세로 별세하기까지 수백여의 주옥같은 작품을 내어 놓을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문단을 빛냈습니다. 작가의 뛰어난 감수성과 천재적인 표현기법은 완벽한 서정성을 구현해냈지요. 작가는 잦은 여행을 통해 접해지는 자연과 사람을 그의 작품세계에 절묘하게 접목시켰습니다. 꽃을 사랑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은 그의 필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묘사하는 미려한 필로 나타났습니다.


(2) ‘파랑새’ 헬렌켈러  


앨라배마주(州)의 터스컴비아 출생.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고 불립니다. 19개월 되던 때 열병을 앓은 후, 소경·귀머거리·벙어리가 되었습니다. 7세 때부터 가정교사 A.M.설리번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교육의 결실로 1900년에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세계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가 되었습니다. 헬렌은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브릭스 총장으로부터 졸업장과 우등상을 받았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녀의 노력과 정신력은 전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다양한 활동으로 ‘빛의 천사’로도 불렸습니다.


1906년 매사추세츠주 맹인구제과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부터는 미국맹인협회에도 기여했습니다. 헬렌은 움직였습니다. 미국 전역과 해외까지 다니면서 신의 사랑· 섭리와 인간의 숭고한 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맹농아자의 교육,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한 기금을 모아 맹농아자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37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저서로는 《나의 생애 The Story of My Life》(1902), 《암흑 속에서 벗어나 Out of the Dark》(1913), 《나의 종교 My Religion》(1927), 《신앙의권유 Let Us Have Faith》(1940) 등이 있습니다.


1900년 20세가 된 헬렌은 하버드대학의 레드크리프 컬리지에 입학했습니다. 그때에 그녀는 "나는 이제 농아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화법이나 점자, 발성을 배워 정상인 이상의 지식을 얻어서 대학에 입학한 그녀의 그것이 제일 첫마디였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세계 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로서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합니다. 이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탄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해 센트 힐 박람회에서 <헬렌 켈러의 날 >이 제정되어 헬렌은 처음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본토는 물론 해외에서도 강연 여행에 나서 맹인 및 신체장애자에 대한 세상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복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설리반 선생에게 배웠던 헌신적 사랑이 헬렌을 움직인 중심 사상입니다.  헬렌은 설리번 선생으로 부터 배운 헌신적 사랑을 자신의 영혼에 간직하고 온 몸과 힘을 다해 맹인 및 신체장애자를 일으켜 주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헌신 자에게서 나오는 희생정신은 사회복지 운동의 이론이 되었고 장애우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빛의 천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헬렌 켈러는 3중 불구자이면서도 절망하지도,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왕성한 의욕과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스스로 피눈물 나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로서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되었고, 인문학 및 법학 박사의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헬렌 켈러는 한평생 맹인 복지 사업에 헌신했는데 가는 곳마다 장애자들로부터 '파랑새의 방문'이라고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헬렌을 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헬렌을 가리켜 '세 가지의 고통을 이긴 성녀'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헬렌은 11살 때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장님이고 벙어리인, 네 살 난 토미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토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까지 직장을 잃게 되어 누구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헬렌은 설리번 선생님에게 "참 불쌍합니다. 토미도 저와 같이 책을 읽고 말을 할 수 있게 교육 을 시켜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곤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렌은 그 날로 용돈을 모두 털어 토미를 돕자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 이 토미 돕기 운동에 성금을 보내 주었습니다. 헬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토미는 유치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불과 열 한 살의 어린 나이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여 결국은 세계의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1)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


헬렌켈러(1880~1968)와 앤 멘스필드 설리반(1886~1936). 헬렌켈러를 말할 때 설리반 선생을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헬렌켈러가 역사를 움직일 수 있었던 근본이 설리반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헬렌은 설리반 선생과 만나게 된 기적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의 사회복지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헬렌켈러. 전설적인 인물이며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헬렌은 생후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하는 3중의 고통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리반 선생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재가 되었습니다. 헬렌의 전 생애는 맹, 농아를 위해서 헌신, 희망과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적의 사람. 눈도 귀도 말도 하지 못하는 세 가지 장애를 기적적으로 극복하고 사회복지를 위해서 생애를 바친 헬렌 켈러. 그녀는 기적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는 생후 1년 반 동안은 발육이 좋은 아기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생후 19개월 때 중병에 걸려서 시력, 청력과 언어 발생력을 상실했습니다. 장애인이 되었지요.


설리반도 또한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여성입니다. 10살 때 남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보내어져 학대와 고통의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성장했습니다. 불결하고 빈약한 환경 가운데서 남동생은 죽었습니다. 그녀도 또한 눈병에 걸려 실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설리반 선생과 헬렌켈러와 만나게 되었던 때는 설리반 선생이 파킨스 맹아학교 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무렵입니다. 거기에서 헬렌켈러을 가르칠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겨우 20세가 된 설리반은 인내심이 강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신앙심이 두터웠습니다. 설리반 선생이 처음으로 본 헬렌켈러는 이미 6세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 그 자체였지요. 


그날부터 설리반과 삼중고의 소녀와의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얼굴을 씻는 것도 머리카락을 빗는 것도, 나이프와 포오크로 식사를 하는 것도 헬렌과 격투를 하면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단지 울어대는 것과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해왔던 헬렌은 엄격한 교육에 전신으로 반항했습니다.


설리반은 신중하고 끈기 있게 접근했습니다. 촉각을 통해서 사물을 보고 구별할 수 있도록 촉각을 인식의 창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지화법이라고 하지요. 손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지화법이라고 합니다. 손으로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이제 헬렌의 촉각은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영혼의 떨리는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에 헬렌은 인형이라는 말에 반응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점점 영혼을 빛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다행히 헬렌의 기억력과 상상력은 무척 강했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한 것 같았지만 반복해서 가르치는 중에 인형이라는 단어를 터득한 헬렌은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헬렌은 암흑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칠게 반항했던 대로 거칠게 탈출했습니다. 헬렌의 잠자고 있던 마음은 촉각을 통하여 감등되었고 눈을 떴습니다.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헬렌의 놀람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쇠약하게 할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1900년 20세가 된 헬렌은 하버드대학의 레드크리프 컬리지에 입학합니다. 그때에 그녀는 "나는 이제 농아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화법이나 점자, 발성을 배워 정상인 이상의 지식을 얻어서 대학에 입학한 헬렌은 그녀의 말대로 농아가 아니었습니다. 4년 후 세계 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아이며 농아로서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탄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해 센트 힐 박람회에서 <헬렌 켈러의 날 >이 제정되어 헬렌은 처음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후 그녀는 미국 본토는 물론 해외에서도 강연 여행에 나서 맹인 장애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구하고 장애인들에게는 행복을 전하는 파랑새로 정상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도전을 심어 주었습니다.


2)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일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지요. 너무나 유명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헬렌은 정원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서 설리번 선생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설리번은 헬렌의 손바닥에 글을 썼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헬렌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설리번은 헬렌의 손을 잡아 헬렌의 가슴에 대고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글을 썼습니다. 선생은 헬렌의 말을 마음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꽃의 향기와 같습니까?"


헬렌의 물음에 설리번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며칠 후, 헬렌의 집에는 아침부터 먹구름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태양은 가려져 어두운데다가, 바람이 불어 오후까지 내내 음울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습니다. 헬렌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헬렌은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까?"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한참동안 써 내려 갔습니다.


"헬렌, 사랑이란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란다. 구름은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지. 너도 비를 맞아 보았지? 햇볕을 쬐고 난 뒤 비가 내리면 땅위의 나무들과 꽃, 풀들은 너무나 기뻐한단다. 비를 맞아야 쑥쑥 자라거든.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예 선생님."


"사랑이란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부어져 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란다.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단다."


헬렌의 시작은 촉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손바닥에 쓰는 글의 감촉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게 되었지요. 헬렌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은 불구를 딛고 일어났다는 것 외에 인류의 숭고한 가치를 밝혀 주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촉각으로 공부를 하고 그 결실로 평생을 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에 헌신했다는 것. 이것이 인류의 가슴에 불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 불꽃은 역사를 두고 찬란하게 불타올랐고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강조합니다.


장애와 불행은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력 앞에서는 무용입니다. 


작가는 상상력으로 글을 씁니다. 사실은 작품의 초기 작업의 기초가 될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환경의 열악함이나 장애 등은 작가에게 아무 것도 아니나, 그것으로 인해 작가의 생명인 마음의 눈이 멀었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작가는 그가 접하는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사명은 남을 잘 되게 해 주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교훈을 주며 사랑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한국 문단에서 시대의 조류에 따라 반항적이며 의식적이며 항거적인 이념서적이 많이 팔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사멸되고 난 뒤에는 시들해졌습니다.


저는 이념서적이나 공산주의 서적 따위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필을 꺾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못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을 잘 되게 만들어 주었고 공산주의는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결과로 공산주의는 사멸하고 실패한 사악한 논리임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필을 꺾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작가의 양심으로 말입니다.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멸된 공상주의 서적을 서재에 꽂아 두고 있다면 내다 버려야 합니다.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을 보면 주인의 양식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연구할 가치도 없고 볼 가치도 없는 책을 끼고 있는 주인이라면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이지요.


명심하십시오. 작가의 사명은 남을 잘 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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