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작품의 소재들
작품의 소재는 작가의 시각과 사상에 따라 좌우됩니다. 작가의 성별, 성품과 성격, 성장배경, 학력의 정도, 습관, 생각의 틀, 사상, 종교, 가치관, 철학 등의 성향에 따라 감수성과 감정 그리고 시각의 우선순위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작가의 시각과 자신의 성향이 반영된 작품이 나오게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많은 작가에게서는 온유한 문장의 글이 나올 것이며 반면 한이 많이 있는 작가는 한이 서린 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이 많이 있는 작가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글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비판적인 시각의 작가에게서 온유하고 감성적인 문장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많이 있는 작가의 글에서 좌우에 날이 선 듯 한 비판적인 글을 기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작가는 비판적인 글에 대한 소재를 선호하게 되어 있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작가는 긍정적인 글의 소재를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 작가의 고유한 지번(地番)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특유한 영역과 고유한 묵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의 삶의 양식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작가의 삶의 양태에서 조형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호롱불” 이라는 주제를 하나 내어 걸어 보지요. 호롱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세대에서는 별반 의미가 없는 주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호롱불에 대한 추억이 있는 이들에게는 첫 번째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추억이든지 안 좋은 추억이든지 간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이나 추억이 있기 마련입니다.
호롱불 아래에서 춥고 시린 방에서 얼은 손을 호호 불면서 고시공부 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롱불하면 고시공부 하던 때의 춥던 시절이 생각나겠지요. 고3 수험생으로 공부했던 이라면 호롱불과 더불어 어머니가 감자나 고구마를 들이 밀어 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하늘거리는 호롱불 아래에서 첫날밤을 맞은 새색시라면 어떨까요. 두근두근하고 겁도 나고 조마조마하고 가슴 조렸던 핑크빛 추억이 생각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린 나이에 기생으로 팔려서 호롱불 아래에서 낮 모르는 남자와 첫날밤을 맞은 사람의 추억도 핑크빛일까요? 싸아한 아픔이 있는 호롱불의 추억이 생각 날 것이겠습니다. 이래서 작가가 남성이냐 여성이냐 그리고 어느 시대를 살았고 그 성장배경이 어떠했느냐가 말해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귀천(歸天)] -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를 보면 일면 팔자 좋은 사람이 팔자 늘어지게 살다가 평안히 하늘나라로 가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 시인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분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으나 고문에 대한 후유증과 과도한 음주로 인하여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던 아픈 과거가 있는 분입니다. 이후 얼마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행방불명이 된 때에 행려병자로 처리되어 행려병자병동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그리 아름답게만 보고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간단하게 사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구구절절 인생길의 회한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비애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즐겁게 가는 길이 아니라 마지못해 가는 길이라면 차라리 즐겁게 가자는 천시인의 철학이 묻어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천 시인의 부인은 천 시인을 하늘같이 생각해 주었고 받들었던 분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마지막 종장 부분의 여운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글 속에서 부인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과 고마워하는 마음이 실려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위의 소절에서 추론해 볼 때, 천 시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라고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차방정식을 풀듯 천시인의 부인을 대입시켜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귀천에는 험난한 한 시대를 살아온 자신의 생애가 얼마 후면 스러지듯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는 시점이 예견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은 심히 슬프고 기가 막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통제하면서 ‘그대가 있어서 이 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는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부인에게 심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늘에 대고 한 고백이리라 믿어집니다.
이런 배경을 배제하고 단지 위의 시 귀천을 놓고 평한다고 가정해 본다면, ‘참 팔자 좋은 분이 팔자 좋은 말만 하셨구나’ 하는 평과 ‘참 멋진 시로다. 무소무유의 해탈이로다’ 하는 평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멋지다는 평가 뒤에는 자신에게 적용되는 순서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곧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그런 적용 말이지요. 적용에 대한 주제는 유유자적하는 멋진 생활에 있다는 것인데 현실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전업 작가를 꿈꾸는 분이라면, 천 시인과 같이 유유자적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는 부인이 있는지, 그만한 경제여건이 되는지가 당장에 떠오르는 현실의 문제로 부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고민이 되는 것이지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락가락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세상을 이렇게 보았다 하는 자신의 글을 남겼는데, 그 글을 보고 평가하고 뒤이어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그 시도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단초가 된다면 시인이나 독자나 고민의 무게는 더욱 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글이나 책을 통해 저자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는데, 그 책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면, 적어도 공산주의의 동조자가 되었다면 저자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자의 책임이 크다고 할까요?
그저 단순 이상주의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유토피아를 꿈꾸다가 정권을 얻어 대통령이 되어 자신의 이상주의를 정부라는 수단을 통해 구현한다면, 그 국민들은 어찌 될까요.
단순 이상주의자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은 이상주의를 구현했을 때에 결과로 나타나는 참담한 결과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주의의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어설픈 철학을 말합니다. 그래서 작가정신이 중요합니다. 작품의 모든 소재보다 작가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1. 사상
사상이란 생각의 틀이며 성향이라는 핵이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 사상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공산주의자가 나오게 되고 자유주의의 성향이 있다면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자유주의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이 성향은 타고 나는 것인데, 가문의 내력이나 부모의 영향, 교육의 정도, 사변의 수준, 선과 악의 경계, 종교, 철학, 문화적인 요소 등이 사춘기 시절을 거치는 동안에 정립되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사춘기를 거치면서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한 경계점을 갖게 되고 자신의 존재가치 확인, 국가관, 애정관, 종교관이 결정되어지는 이때에 성향과 가치관이 결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때에는 지식에 대한 갈망의 시점이며 이때에 자신의 성향이나 사유에 따라 공산주의적인 서적이나 자유주의적인 서적을 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에 대한 이론을 세우게 되는 시점이라는 것이지요.
역사를 움직인 몇 분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레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로 작정하고 평생을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자신의 혁명론을 더하여 프롤레타리아혁명 (proletarian revolution) 이론으로 발전시켜 러시아를 중심한 공산주의체제 이론을 세웠습니다.
함석헌 옹은 사상에 대하여 “사상의 필은 꺾을 수 없고 감옥에 보내면 알을 까고 나온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상을 꺾기 위하여 감옥에 보내면 오히려 그 사상을 발전시킬 이론을 만들어 나온다는 말이지요.
역사는 문학을 통해 말해 왔습니다. 역사의 교훈이나 역사를 뒤흔든 사상의 폭발력에 대하여 문학이 증거 해 주었습니다. 근대사를 보면 군주주의사회에서 민주사회로의 이양과정에 대하여 역사가 고통하며 일갈했는데, 문학은 고통과 일갈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내며 해석해 주었습니다. 왜 민주주의 사회로 가야 하는지를 말이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군주주의는 안 되고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당위성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내며 해석해 주었기에 민주주의사회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갈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대 사상은 서로가 양립하되 그 간극의 차이가 너무 커서 도무지 화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도 인류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양각시켜 주고 있음 입니다.
역사 이래로 문학은 사상을 전파하는 매체로 자리매김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미디어 매체들이 기라성같이 포진하고 있어도 사상에 대한 재료는 책에서 근거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책을 통해 사상가는 자신의 사상을 내포하여 이야기 해 두었기 때문에 책을 통해서 사상에 접할 수 있습니다. 사상가나 일반인이냐를 막론하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평소의 생각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생각. 이것을 사상이라고 표현하는데 생각은 사상에서 나옵니다. 이를 생각의 틀이라고도 말합니다.
작가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것을 소재로 하여 노래하거나 이야기 하거나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작가의 시각이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심중은 작품을 그려 나가는 중에 사상이라는 틀 안 매여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려나가기 때문에 작가의 사상은 작품 속에서 반드시 얼굴을 내어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이란 어떤 사상이 있을까요? 사상은 두 갈래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이 두 가지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사물을 자연인으로서 보느냐, 신앙인으로서 보느냐 이 두 가지의 시각에서 생각이 나오게 되어 있고 그 생각의 틀이 굳어져 사상으로 표출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불교인으로서 3.1 운동의 33인 중의 한 분이신 만해 한용운 선생은 “님의 침묵”을 통해 잃어버린 국가와 민족의 한을 절통한 심정으로 노래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큰 틀 앞에서 개인의 신앙심이 애국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만해에게 있어 국가와 민족이라는 큰 틀이 사라지고 난 지금,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절규로 님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님의 沈默] 만해, 한용운 (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의 글에 나타나고 있는 님은 만해가 출가한 승려의 신분이라는 점과 맞물리면서 묘한 여운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혹시 만해의 가슴에 품고 있던 연정의 주인공을 말함이 아닌가 하는 시각과 만해가 이상하고 있는 신의 존재가 아니겠나 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시각은 만해의 사상과 국가관에 비추어 볼 때에 만해가 님으로 부른 님은 국가를 대변하는 마지막 황제인 군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에서 일치됩니다. 곧 만해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상과 요소는 군과 자신, 국가와 국민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도 국가와 민족을 향한 뜨겁고 애절한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의 사상 속에 국가와 민족을 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상이 확실하면 당당한 시가 나오게 되어 있고 철학이 단단하다면 단단하고 묵직한 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상의 소재로서 사상을 말함은 자연인(인본주의자로 표기)인 무신론자나 신앙인인 신본주의자의 색채가 작가의 작품에서 배어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의 시와 자유민주자의 시의 색채가 다릅니다. 이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사상은 작가의 상상력과 생각의 줄기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전인격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그것들이 베틀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오가며 조직을 만들어내고 작품으로 탄생되어 나옵니다.
따라서 작가는 먼저 작품의 소재 혹은 시상에 대한 작품구성 보다 먼저 자신의 사상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습작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색깔이나 색채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작품을 써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역사에 남길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습니다.
2. 사물과 경험
시상의 소재로서 으뜸은 자연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감각이나 감동을 시나 수필 혹은 소설에 주재료로 담아 표현을 하기 마련이지요. 심지어 결혼청첩장의 인사말에도 날씨나 계절에 대한 인사말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자연과 결부되지 않는 것은 글이 안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연이라 함은 우주만물과 삼라만상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인이라면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포함되어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느냐, 보고 느낀 점을 글로 옮기는 것이 작품이거든요. 이에 더하여 어떻게 감촉했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으며 어떤 맛이더냐? 하는 자신의 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충실할 때, 자신이 그 답에 대하여 만족할 때에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어집니다. 따라서 어떻게 감촉했느냐? 어떤 맛이냐? 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는 경험이 충분해야 완성도 높은 작품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느꼈고 그 맛이 어떠한가? 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으려면 이에 대하여 각각 분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분류들은 작가의 깊은 내면의 세계에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 하겠군요.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오감
오감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말합니다. 여기에 느낌이라는 것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맛을 느꼈느냐, 어떤 감촉을 느꼈느냐, 어떤 냄새를 느꼈느냐? 여기까지는 반드시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이것들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객관성을 띄기 보다는 주관성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맛이라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리 감각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같은 쌀밥인데도 자식은 달고 맛있게 먹는데 입속이 헐은 노모는 모래알같이 느껴집니다. 두엄 옆을 지나면서 도시인은 옆 사람이 혹시 실례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데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촌부는 늘 맡았던 두엄냄새가 익숙합니다. 어떤 이는 가스 냄새에 민감하여 남이 맡지 못하는 가스 냄새를 맡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똑 같은 사람이라도 자라나온 환경이나 문화권에 대한 차이의 정도나 훈련의 정도에 따라서 느껴지는 감각이 전혀 다를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내가 느낀 감동을 남도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의문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었느냐, 무엇을 보았느냐? 이 두 가지는 객관성을 띄고 있습니다. 내가 본 사물을 남도 똑같이 본다는 것이며 내가 들은 어떤 물체의 소리를 남도 똑같이 듣고 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달리 표현해 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별이 빛나는 밤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별똥별이 꼬리를 물고 하늘에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유성이 흰 꼬리를 매달고 반딧불처럼 하늘을 수놓았다라고 표현을 하는 분도 있겠고 또 어떤 분은 별똥별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눈물이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았는데 그 사물에 대한 연상과 표현은 작가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같아도 연상과 상상 거기에 표현의 기법이 가미되면 전혀 다른 시각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글로 노래하는 사람이지요. 그것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프로가 되어 있는 작가군은 똑같은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연상을 추출해 내는 시각이 남다르게 나옵니다. 거기에 표현기법까지 동원하니 깜짝깜짝 놀랄 글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보건데 작가란 추상적인 오감의 부분은 물론하고 객관적인 오감의 부분까지 색깔을 입히고 색체를 더해서 멋지게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지요. 독특한 사람들입니다.
오감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연상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하여 작가는 일정부분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많이 보는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자연을 소품으로 삼아 늘 그리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작가는 보헤미안과 같은 방랑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으며 여행을 자주 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작가는 생활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일과 사건들, 그것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나 감동을 놓치지 말고 표현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표현에 대한 훈련이 익숙해지면 글의 깊이나 수준 그리고 전달되어지는 감동의 양도 증가되어 나올 겁니다.
2) 서정적이냐 목가적이냐
근래에 들어와 시인의 특징을 설명하는 용어로 서정 시인이냐 목가풍의 시인이냐를 구태여 따지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서정시인의 군에서 목가 풍 시인을 재분류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 말은 서정적인 풍경을 목가 풍으로 노래했느냐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구분하면 쉽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서정시인은정원에 피어 있는 장미를 노래하고 목가풍의 시인은 집 전체를 노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서정적인 감성을 가진 분들은 대개 시인이 됩니다. 자연에 대하여 노래하다 보면 서정적인 시인이 되는 것이지요. 아마 서정적인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글에 담아낼 맛있는 요리가 너무 많이 있다는 것에서 자주 놀라고 있을 겁니다.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의 시각은 땅속에서 갓 솟아난 새싹을 보고 벌써 농익은 과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땅 속에서 숨을 쉬고 있을 다른 새싹들과 씨앗의 생명을 꿰어 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의 시각은 남다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남다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성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얼마나 감성이 예리하고 풍부한가 하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감성이 예민한 분은 감동도 잘 합니다. 늘 눈물을 매달고 삽니다. 그래서 일명 수도꼭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쯤해서 주제를 하나 더 가져 보지요.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앞에 놓고 볼 때, 감성이 예민한 분은 큰일을 당하면 남들이 느끼는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도가 더 크게 감각되어집니다. 남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깊이가 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큰일을 많이 겪은 감수성이 예민한 분은 어떨까요? 불행하게도 감수성이 깊은 분도 큰일을 많이 겪게 되면 감수성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도 쉽게 받고 상처도 깊이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이 되면 결국 스스로의 면역력으로 인해 감수성이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왜냐면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서 일상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슬픔을 끌고 일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실수가 많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감성의 정도가 둔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에 감수성이 둔해진다면 이는 시상이 둔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둔해진 시상으로는 감동을 줄만한 시를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시인의 경우 감수성이란 예리한 칼과 같아서 항상 잘 벼려 놓아야 합니다. 서슬이 퍼렇게 날을 세워 두어야 떠오른 시상을 예리하게 처리하여 완성도 높은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서정시인은 작은 소망을 행복으로 노래합니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들을 서정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행복이라는 구슬로 다시 태어납니다. 어쩌면 연금술사와 같은 손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신의 손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표적 서정 시인으로는 이효석, 윤동주, 김영랑, 김윤식 시인을 꼽습니다.
서정시인 가운데에서 목가적 시인으로 분류되는 목가풍의 시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울려 있는 균형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행복을 노래합니다. 한국의 목가풍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를 받은 시인으로는 한용운, 윤동주, 박목월, 신경림, 서정주, 이육사, 김소월, 김영랑, 이용악, 김광균, 근래의 박화목 시인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특징은 대청마루에서 자연을 보고 노래했다는 것이거나 자연 속에서 자신과 가정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꿈
꿈을 소재로 한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니 설명조차 필요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구태여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1913년 유일서관(唯一書館)에서 간행된 조중환(趙重桓)의 번안소설 장한몽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로 꿈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종교작가로 분류되어 있는 존 번연은 꿈을 소재로 한 천로역정 (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을 펴냈습니다. 17세기에 발표되어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아온 죤 밀턴의 실락원 (失樂園 Paradise Lost)은 어떠한가요. 이 작품들은 꿈을 소재로 하고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유자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써낸 작품들입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고 새벽에 일어나 꿈에 본 세상을 화폭에 소담스럽게 담아내는 화가나 그 내용을 글로 써내는 작가나 꿈이라는 동일한 소재로 창작해 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작가는 꿈으로 보았든 생시의 눈으로 사물을 보았든 본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지어내는 사람입니다. 본 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술과 기교로 건축물을 지어내는 작업 끝에 작품이 탄생됩니다. 요리도 그러합니다. 똑 같은 재료를 써도 맛이 제각각 차이가 나는 것은, 요리를 할 때 이미 그림을 그려서 맛을 그려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지요.
대장금하면 벌써 귓가에 생각시들이 모여서 노래했던 “오나라 오나라 ...”가 생각이 나지요. 대장금에서 주인공인 장금이가 요리를 하는 장면이 그려질 겁니다. 장금이는 음식을 할 때 음식의 맛을 그려보면서 요리를 했지요. 맛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손맛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는 맛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작가가 꿈을 소재로 하여 결론까지 똑 떨어지게 구상을 하고 그 구상대로 그림을 그려낼 때 완성도 높은 맛있는 작품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꿈을 소재로 한다는 말은 그 소재에 제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맛갈스럽게 요리를 해서 격이 있는 그릇에 멋있게 담아내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4) 촉수
사람의 감정이 오감에 의하여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느냐의 정도는 그 사람의 감수성과 성별, 관심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오감에서 느껴진 감각 혹은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는 정도는 교육, 내력, 성격에 따라서 현저히 달라집니다. 이는 표현의 기법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표현의 기법이야 말로 자신이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 혹은 노래하고 싶은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해 내느냐는 기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작가는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작가입니다. 이름 있는 작가들도 대작을 쓰기 전에 수없이 많은 습작을 휴지통에 넣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도예공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사정없이 망치로 깨버리는 것과 같아서 작가도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작품의 경우에는 아낌없이 휴지통에 박아 넣어 버립니다. 아마추어들이 볼 때에는 휴지통에 구겨 넣어 버린 그 습작의 정도만 해도 상당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작가는 휴지통에 버릴 작품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어 놓아도 좋을 작품이 되어야 비로소 내어 놓습니다.
시성 혹은 대작의 거성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작가라면 이미 한국의 문단을 대표할만한 명성이 자자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들의 표현기법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서정시의 대표원로인 김소월 시인이 1925년 발표한 [진달래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따다가 가실길에 뿌려 드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반어법을 사용하여 상당히 강한 부정의 문체로 쓰여 있는 이 시에는 결코 보낼 마음이 없음을 반어체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민요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네”의 직설적이며 협박적인 표현으로 솔직한 심정이 드러나 있는데요. 이에 반하여 소월의 진달래꽃에는 떠나신다면 진달래꽃을 영변 약산까지 가서 따다가 가는 길에 뿌려 놓겠다 합니다. 어쩌라는 말인가요. 그 동안에 딱 붙어 있으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이별의 노래가 아니지요. 만약에 여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듬해 봄이 와서 진달래꽃이 필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붙어 있으라는 말이지요.
사뿐히 즈려밟고 가랍니다. 아무리 길이라고 해도 그 위에 고이 뿌려 놓은 진달래꽃을 어찌 밟고 갈까요. 그래도 가겠다면 꽃잎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밟고 가시라는 소리인데, 하나 둘 헤아리며 밟고 가다 보면 어느덧 그 정성에 탄복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엄포가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이 여인은 진달래꽃을 아주 좋아하는 여인이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진달래꽃으로 협박과 회유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역겨워서 못 보겠거든 그 때에는 이 앙다물고 보내 버리겠답니다. 반공갈이지요. 죽어도 눈물 안 흘린다는데 떠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눈물을 한 바가지 정도는 흘려주어야 떠나는 사람의 자존심도 살고 떠나가는 재미도 생기는 것이지 죽어도 눈물 안 흘린다니 “갈테면 가라지~” 이것 아니겠습니까.
시인의 속마음이 빤히 보이는데 그런데도 속마음은 진달래꽃의 화사함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아하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눈물겨운 감동만 보입니다. 그 감동으로 이 시를 밤새워 외웠습니다. 근사하게 써 먹을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하고는 열심히 외웠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이니 이것도 못 외우면 어디 사람 축에나 끼겠습니까. 그러니 열심히 외울 밖에요.
“아름 따다가 가실 길에 뿌려 드리오리다”,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표현기법은 김소월 시인이 독자적으로 사용한 언어입니다. 그 누구도 김소월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김소월 시인의 감수성과 함께 언어 구사의 표현능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월은 영변의 약산 진달래(불행히도 우리 해방이후 출생자는 모릅니다만)를 눈으로 혹은 손으로 촉수하여 느껴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영변의 약산이라는 지명을 지정했습니다.
진달래꽃에는 주인공이 셋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진달래꽃이 주인공입니다. 진달래꽃을 중심으로 당신과 내가 대치하고 있는 중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달래꽃은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촉매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헤어짐의 증인(증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진달래꽃의 꽃잎을 살며시 촉수하듯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보드랍게 촉수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를 보여 주었거나 들려주었다면 그녀는 떠나던 마음과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이켜 시인에게 돌아와 안겼을 듯 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촉수하여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유발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도의 감동이 우러나오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촉수한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외수 작가는 차가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계곡의 얼음을 깨고 얼음물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얼마나 추운지를 표현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작업을 해내야 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촉수한 것이나 자신의 몸으로 체득되어진 느낌을 완벽히 재생해 내는 작업이 작가의 일이며, 이 작업의 결과에 따라 독자는 냉정한 눈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강조하기를
시인의 눈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시의 소재입니다. 어떤 특정적인 사물에 눈이 머물 때가 있습니다. 그 사물에서 먼 추억이나 기억이 추출될 때가 그 때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추억이 교차될 때, 그것은 베틀의 씨줄과 날줄과 같이 서로 들락거리며 조직이 짜여 집니다. 이것을 일컬어 시상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그것들을 가슴으로 감각하고 손으로 베를 짜서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 소양을 시상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하고 조직으로 짜낼 수 있는 가슴과 손이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프로의 기질을 가진 작가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자신의 필에 필력이 생기기까지 부단히 자신의 필을 담금질해야 합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작품세계가 만들어져 나옵니다.
가슴을 비우면 맑은 하늘이 가까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오면 감동이 되고 감동이 되면 어느덧 손에 필이 잡혀 있을 것입니다. 그 감동으로 글을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이 지속되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초기의 감동을 그대로 간직해야 합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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