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있는 문학개론

제3장 판형

도제조 안형식 2009. 7. 10. 20:43

제3장 판형


글은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은 각각의 용도에 따라 문장의 틀이 다르게 짜여 있습니다. 그저 단어와 동사 형용사 부사 등의 수식어를 배열해 놓는 것이 글이 아닙니다. 글이란 반드시 용도가 있습니다. 즉 글을 쓰는 목적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글의 틀짜기라고 말하며 글 판이라고 쉽게 말하지요. 글 판에는 판형이 있습니다. 말하기 판과 보여주기 판이 그것입니다.


말하기 판은 연설문, 인사의 말씀, 축사, 격려사, 설교문,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논문 등, 보고를 목적으로 한 일회성 용도의 글을 말합니다.


보여주기 판은 산문, 시, 소설 등의 남기기 위한 작품을 말합니다. 글 판이 보고의 목적을 띄었을 때에는 말하기의 판에 걸어야 합니다. 보여주기 판에는 작품을 걸어야 합니다. 보고의 목적을 띈 글은 일회성으로 마쳐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아서 작품으로 남기려고 한다면 보여주기 판으로 연결시켜 주어야겠지요.


칼럼, 에세이, 시론, 사설 등은 보도의 형태를 가지고 일회성 용도로 사용되어지지만 그것을 모아서 보여주기 판으로 사용한다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작품을 책으로 출판했다면 그 작품은 비평의 과정을 거쳐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신인이라 이름이 없다할지라도 출판된 책의 내용으로 인하여 작가의 사상이나 문학의 성취정도는 언제라도 비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검증이 된 당당한 작가들이야 평가가 내려진 상태이니 논조의 변화가 없는 한 그대로 가는 것이지요. 실상 작가의 논조가 변한다면 색깔이 변했다는 뜻이며 맛이 변했다는 뜻이니 가히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예측을 해야 하고 결과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작품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쓰는 것까지야 개인의 자유이겠으나 발표하려면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발표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작품으로 인하여 독자에게 행복을 끼쳐 주겠다는 정도의 사명감을 가지고 발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책을 통하여 감동을 받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인하여 독자의 인생에 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작가는 양서를 발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글판에서 어떻게 틀짜기를 해야 멋진 글판이 탄생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판


1) 연설문


 연설문은 통상 문서의 형태인 서론=> 본론=> 결론의 순서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강하게 논지를 강조해 주느냐 하는 설정이 중요합니다.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연설문은 기억의 돌기부분에 충돌되어져야 합니다. 표현한다면 여성이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형태와 비슷한데요. 지 스폿이라는 내밀한 부분을 오랫동안 자극해 주어야 크라이막스에 도달하는 것과 연설문이 기억의 돌출부분에 오래 자극을 주면 오랫동안 명연설로 기억에 남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입니다.


 명연설문은 연설자의 논지가 감정에 호소되어야 하고 결단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렇지요. 먼저는 호소력입니다. 감정에 몰입시킬 수 있도록 감정을 유발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서론 부분입니다. 서론 부분에서 연설자의 몇 마디 말에 집중을 유도하고 경청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사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강력한 이슈가 되는 부분을 도입해 보려고 하는 시도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반대파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시사적인 문제로 물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충분히 감동적인 사례를 들어서  청중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적당한 사례를 들어서 자신의 말로 소화를 해서 내어 놓으면 훌륭한 연설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연현상의 독특한 사례를 끌어내어 기분을 맞추어 보는 것이지요. 통상 날씨 등등이 사람의 기분을 평이하게 자극해 주기 때문에 무난한 연설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체험 중에서 가장 적합한 내용을 끄집어내어 배설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에 독특하지요. 남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연설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가족과의 얽힌 이야기나 쇼핑했던 내용 중에 기억에 많이 남는 부분이거나 혹은 만난 사람과의 대화 내용이거나 등등 자신이 해야 할 연설의 내용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면 좋습니다.


 또 다른 내용은 읽은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명작일수록 좋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 중에서 감동이 되는 교훈적인 부분을 이야기 한다면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것으로 는 호소력이 뒤떨어집니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서론으로 추천할 만한 것은 "명언"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하고 "이솝우화"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나 명화, 자신의 체험 이야기 순이 좋습니다. 연설문은 통상 길어야 10분 내외로 마쳐야 하기 때문에 단축되어진 문장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서론이 길어지면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론 부분은 감동적인 내용으로 명쾌하게 도입하여 청중의 시선과 머리가 연설자에게 집중되도록 도전을 주는 정도에서 마쳐야 하고 이어서 본론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본론에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해야 합니다. 우회에서 강조하는 기법을 좋아 한다면 우회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치 남에게 들은 이야기처럼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청중은 다 알아 먹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려면 머리부터 꽁지부분까지 죄다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호소력이 있습니다. 통상적인 연설문을 보면 가운데 토막을 말하고 마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머리 부분하고 꽁지 부분은 다 알고 있다는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꽁지 부분은 알고 있는데 머리 부분을 모르고 있는 분이 많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본론의 부분에서는 자신이 전하려고 했던 논지가 충분히 말해져야 하며 이 논지는 설득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즉 청중을 상대로 설득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청중 가운데에는 연설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논지와 반대 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분들도 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본론에서 자신의 말도 이분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 설득 작업의 성과에 따라서 명연설이 되기도 하고 그저 그런 연설이 되기도 합니다.


서론 부분에서는 호소력 본론 부분에서는 설득력 그리고 결론부에 가서는 공감을 얻으면 최고의 연설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강의문


명 강의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쉽게 해설해 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논리가 정연하여 듣는 이의 머릿속에서 정돈이 잘되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 듣고 난 뒤에는 반드시 머리에 남는 강조된 부분 몇 개가 들어 있게 됩니다. 이는 논지가 확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명 강의는 위의 특징이 과학적이라 할 만큼 순차적이며 청중의 한계 안에서 정돈이 되도록 설정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말하는 이가 중심이 아니라 듣는 이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무게 중심이 확실히 두어져야 할 곳에 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전문용어를 설명해 줄 때, 보통의 강의자라면 자신이 연구한 최고의 것들을 아낌없이 최대한 많이 배설하여 들려주기를 원합니다. 최고의 것들을 최대한 많이 들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전문용어가 다시 몇 개씩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전문용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몇 개의 전문용어를 차용하여 들어온다면 청중은 일대 혼란에 빠져 들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는 강의자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에 대해 잃어버리고 다른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때도 있습니다.


전문용어를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전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다음으로는 어떤 곳에 어떻게 사용되어졌는가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들에 대한 實例를 들어 연대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업적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어떤 뜻인지 그리고 어디에 사용되어졌는지 다음에 누가 사용해서 그 결과물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준비를 많이 한 강의자라면 사람의 이야기가 나올 때에 에피소드 한 가지 정도 곁들여 주면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대학 이상의 강의라면 모든 강의가 전문용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그것을 풀이하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대개 학자들은 한 가지 어휘를 탄생시키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기 때문이지요. 혹은 평생 연구한 업적이 한 개의 단어 혹은 한가지의 어휘로 결실합니다. 황우석의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혹은 이즈라엘 커즈너의 “시장경제이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이 그것입니다. 논문의 제목이거나 책의 제목이거나 표제어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줄기세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사전적인 개념으로 풀이를 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줄기세포를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어야 하구요. 다음으로는 줄기세포를 누가 언제부터 연구해 왔는지에 대하여 몇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이 연구가 어디까지 왔는지 그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차후에 어떤 연구나 실험이 연결될 것인지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는 부분까지 설명되어져야 합니다. 여기에 황 교수의 연구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정도를 곁들여 준다면 훌륭한 강의가 될 것입니다. 물론 어느 부분을 얼마나 길게 혹은 짧게 혹은 무게를 두어서 설명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강의자의 몫이지요. 


3) 설교문


기자가 조용기 목사께 물어 보았습니다. 조용기 목사라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교인수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단일 교회로는 가장 큰 교회이지요. 여의도 순복음 교회 교인 수가 70만이라니...    


“목사님 목회를 하시는데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


“네 설교입니다.”


“아니 설교를 제일 잘하시는 분이 설교가 어렵다 하십니까?”


“설교는 단 한 번만 사용하는 것이로되 항상 바꿔 주어야 하니까 어렵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설교. 설교문 없이 설교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부작용이 많이 있습니다. 했던 설교를 또 한다는 것이지요. 불행히도 교인은 안 잊어버렸는데 설교자는 잊어버리고 또 합니다. 그 머리에서 나왔으니 똑같겠지요. 설교문 없이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제일 두려운 교인이 설교를 늘 필기하는 교인이랍니다.


새벽설교, 주일 낮과 밤 설교, 삼일(수요일)설교, 금요철야예배 설교를 하게 되는데요. 이중에 주일 낮 예배 설교에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다른 예배의 설교는 약화되지요. 그래서 주일 오후 찬양예배, 수요 성경공부 등으로 구분을 해서 필요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주일 낮 예배 설교에 사용되어지는 설교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목, 성경본문이 타이틀로 잡힙니다.


대개 A4 용지로 4장에서 5장 정도로 30분 설교의 분량이 되는데요. 청년들 말로는 “휠 받았다” 라고 표현하지요. 감동을 받으면 여기에 10분 정도는 무상으로 추가 됩니다. 어떤 분은 50분 설교를 하고는 눈총을 받은 분도 있기는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이나 듣는 분이나 다 같이 감동을 받았다면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말씀을 전하는 분은 감동을 받았는데 듣는 분들은 감동을 못 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문에 충실해지게 마련입니다.


처음 부분은 예화로 시작합니다. 웬만한 소재는 다 알고 있으니 심드렁할 것이고 해서 주로 강남의 큰 교회에서는 해외에서 일어난 일들을 예화로 들고 변두리로 갈수록 자신의 집안 이야기들이거나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예화의 소재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신문이나 드라마에서 열 받은 내용이 많이 등장됩니다. 종종 시를 읽어 주시는 분이나 읽었던 책에서 감명 깊었던 내용을 예화의 소재로 삼기도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예화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러 왔기 때문이지요.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그리고 어떤 것을 요구하셨으며 그에 따른 약속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의 뼈대가 되는 성경본문은 설교의 범위에 대한 한정이기도 합니다. 시간 내에 충분히 설명을  해 줄 수 없다면 설교의 본문인 성경본문에 대한 설명만 해 주면 되는 일이지요. 휠 받아서 삼천포로 빠지면 언제 본문으로 돌아올지 모를 일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저것을 도입했는데 아차 이걸 잊어버리고 도입된 저것에 심취해서 저것만 설명을 하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설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인들은 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정돈이 안 되는 것이지요.


설교문은 논리적이며 조직적인 짜임새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충분히 알 수 있으며 그 내용을 듣는 교인들도 다 알 수 있도록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번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해서 눈물을 쪽 빼 놓겠다 하는 그런 욕심은 버리는 것이 옳다는 말이지요. 18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지독한 근시라 안경을 쓰고도 큰 글자로 쓴 설교문을 떠듬떠듬 꼬박 읽어 내려갔답니다. 그런데도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감동은 설교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본연에 충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감동은 전적으로 성령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변론 내용 중에서 모세에 대한 내용을 떼어내어 모세에 관한 설교를 한다고 가정합니다. 설교가는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모세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고 난 뒤에 결론으로 갈 것입니다. 결론 부분에서 “모세가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을 갔으니 살인자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축이나 하면서 자식을 낳고 살았으니 여느 목축인과 다름이 없는 평범한 촌부에 불과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에서 일개 촌부가 되었으니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겠는가. 그것도 환갑 진갑도 넘어 80세나 되는 늙은이가 되었다. 늙고 실패한 인생을 불러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살인자요 실패한 인생이요 석양에 기우는 인생과 같은 80의 나이에도 버리지 않고 불러서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끝난 인생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위대한 인생이 된다. 모세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이런 내용으로 마무리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가 주어야 합니다. “모세의 40년 동안의 애굽 왕자 생활은 지도자의 리더쉽이 준비되어진 기간이며, 미디안 광야의 40년 세월은 훈련의 세월이었지요. 쓰임받기 위하여 준비되어지고 훈련되어진 기간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경우에서 보듯 준비되어지고 훈련되어진 사람을 쓰십니다. 결국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준비되어진 일꾼으로 훈련되어진 일꾼으로 어려서부터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리 못 되어 있다면 자식을 그리 되도록 준비시켜 주고 훈련되어지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던지 어떻게 훈련이 되어 있던지 준비되고 훈련되어진 사람을 쓰십니다. 그렇게 쓰시기 위해 혹독한 준비의 과정과 처절한 훈련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만약 혹독한 과정 가운데 있거나 처절한 생활 가운데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쓰실 날이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는 내용까지는 들어 있어야 합니다.


즉 객관적인 성경본문의 내용에서 주관적인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은 즉흥설교의 형태로는 나오지 못합니다. 또 본문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결론부분에서 강조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되고 작업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설교문 작성을 마쳐 놓고 각각의 부분(보통 3개의 대지) 중 어느 위치에 두어야 가장 효과적인 감동이 나올 것인지에 대하여 예측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님은 주일대예배 설교의 설교원문을 10회 이상 녹음기에 녹음을 하면서 설교문을 검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감동적인 설교는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4) 웅변원고


웅변에 사용되는 언어는 아주 강력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청중의 가슴을 후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3분 혹은 5분으로 주어져 있는 짧은 시간 안에 주장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해야 하며 동시에 청중의 감정을 촉발시켜내야 합니다.


이때는 담금질된 본문이 사용되어집니다. 즉  10분 분량의 내용을 5분으로 압축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글을 담금질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강력한 문장이 나옵니다. 너무 강력하면 청중이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늘려서 7분 정도의 분량의 문장으로 만듭니다. 또 늘려진 문장을 다시 압축해서 4분 정도의 분량으로 줄여 줍니다. 5분 이내에 마쳐져야 할 웅변은 4분 정도의 문장으로 줄이게 되면 발음이나 제스추어 등의 동작이 훨씬 여유로워지지요. 아주 유연해집니다.


제스추어를 쓰면서 어디에서 숨을 쉬고 숨을 쉬는 것을 청중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위장할 것인가를 여유롭게 생각해 보면서 자세를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웅변자가 숨을 몰아쉬거나 혹은 깊이 숨을 쉬거나 하는 동작이 청중에게 보여 지게 되면 청중도 따라서 숨을 쉬게 되어 있지요. 이렇게 되면 원하던 감정의 촉발은 식어 버리고 김이 빠지고 맙니다. 웅변자는 숨을 안 쉬고 몰아 부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청중들이 숨을 죽여서 몰래 쉬며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감정에 몰입되기 때문입니다.


웅변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는 수상자는 청중이 숨도 못 쉬도록 몰아 부친 웅변자가 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웅변내용의 본문이 탱탱한 탄력이 있도록 담금질을 한 문장을 사용할 것이며 자세와 제스추어를 교묘하게 배합하여 숨도 안 쉬고 웅변에 몰입한 열정적인 웅변자라는 감동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5) 제스츄어


제스추어는 손이나 동작으로 하는 보조언어입니다. 효과적인 언어전달에 있어서 제스추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제스추어를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말에 능한 사람이며 고도로 훈련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스추어는 손동작과 표정 그리고 온 몸이 다 사용이 되어집니다. 강단에 서 있는 연설자가 원고를 읽어 가면서 청중들의 표정을 살펴보기 위해 눈을 옆으로 굴리는 행위는 절대 금물입니다. 자신이 작성한 원고라면 적어도 한 문장 정도는 원고를 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원고에서 눈을 떼어서 청중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어 주어야 청중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고 호흡이 맞추어 집니다. 그래야 호소력이 생깁니다.


손동작의 제스추어는 강조하기 위한 대목에서 사용됩니다. 이 대목을 강조한다는 뜻이지요. 또 이 대목이 진정으로 옳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이 대목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벌써 손동작이 올라가게 되면 여기에 연설자 자신의 논지가 꽉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말하고 싶어서 서론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가끔 연설자가 흥분이 되면 강단을 냅다 내려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먹으로 어떤 분은 손바닥으로 치기도 하고  어떤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과거의 정치가 후르시초프는 구두를 벗어서 구두로 강단을 쳤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무엇으로 치든 치게 되면 이는 청중의 가슴을 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강단을 치지 않아도 능히 전달될 수 있는 기법이 많이 있는데 구태여 강단을 칠 이유는 없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 위해 참석을 하신 분들이라면 자기의 적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들어 주려고 부러 참석한 분들의 가슴을 쳐야 합니까.


가장 강력한 제스추어는 손동작으로 주먹을 쥐로 위로 치켜들며 부르르 떤다거나(실상 연설이나 설교나 강의에서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 정도의 논제는 없지요.) 손을 청중을 향해 쭈욱 펴서 서서히 말아 들이는 동작이면 충분합니다. 손을 서서히 거둬들이면서 원고에 눈을 살짝 주고 다음 문장을 미리 읽어 두고 눈을 들어 청중들을 바라보면 청중들의 마음도 시원해지지요.


제스추어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지를 더욱 확실하게 전달시켜 주며 동시에 청중의 가슴에 호소됩니다. 호소가 된 내용은 청중의 가슴에 감정을 유발시키며 서서히 설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손을 달달 떠는 버릇이 되어 있는 분도 보여 집니다. 대개 토론 시간에 페널로 등장하여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보여지는데요. 이는 스피치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는 분입니다.


말하기 판에 등장되는 모든 분들은 자신의 말을 잘 전달하고 자신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반대하고 있는 분들까지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들여야 명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자신을 보여 주는 일체의 행위에 있어서 적어도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버릇이나 습관이 자신의 평생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명백히 인식을 하고 자신도 모르는 버릇이 무엇인지 어떤 나쁜 습관이 배어 있는지를 정확히 찾아내서 뽑아 버린다는 각오로 철저히 훈련을 한다면 어느덧 나쁜 습관이나 버릇과는 이별을 했다는 때가 올 것입니다.


제스추어는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옷차림도 제스추어라는 점을 각인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장 효과적인 제스추어로 무장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6) 입 모양과  언어구사 훈련  


말을 할 때에 입 모양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말을 할 때에 입을 조금 벌리면서 어금니를 물고 이야기하듯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말에 어눌한 분입니다. 편하게 말을 해도 될 수 있는 한  입 모양은 크게 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원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아 에에 하는 못된 말버릇이 있는 분이라면 당장에 고쳐야 합니다. 다음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데 자꾸 입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이런 좋지 못한 말버릇이 생깁니다.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정직합니다. 그리고 청중을 바라보면서 일일이 눈을 맞추어 보며 다음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청중은 눈이 맞춰지면 깜짝 놀라서 다리를 오므리는 분도 있을 것이며 어떤 청중은 노려보는 분도 있을 것이며 어떤 분은 얼굴이 빨개지는 분도 있을 것이며 다양각색으로 청중의 표정이 나타날 것입니다. 청중의 표정에서 힌트가 얻어지면 그것으로 다음 말이 생각날 때까지 잠시 붙잡아 보는 겁니다. 실상 이것을 말장난이라고 하는데요, 그래도 어쩝니까. 다음 말이 생각날 때까지는 말장난이라도 해야지 침만 계속 삼키면서 서로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잠시 말장난으로 청중과 함께 호흡을 맞춘 뒤에  “아니 제가 어디까지 했지요? 제가 여러분과 만나는 일이 너무 좋다 보니 다음 말을 잊어 버렸습니다.” 하고는 다소 우스꽝스런 제스추어를 보여 주면 청중들의 반응이 의외로 뜨거워 질 것입니다. 청중들이 다음 말을 지적해 주면 자연스럽게 다음 말로 진행해 가는 것입니다.


2. 글판


말하기 판에서 남겨진 원고.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남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차게 되면 보여주기 판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여주기 판은 남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판과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글자 한자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단어 사용이나 고급언어에 치중하면 글이 딱딱해지고 이해력도 떨어집니다. 또 문장에 치중하다 보면 논지가 흐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글의 논지는 분명하고 문장의 흐름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좋은 글이 탄생합니다. 


모든 작품은 다 보여주기 판의 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되어진 모든 작품 그리고 인터넷에 발표된 작품들을 망라하고 보여주기 판은 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여주기 판에는 작가의 굉장한 노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처음 책을 내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아기 낳는 것과 같습니다. 부피가 작은 시집이 되었던지 수필집이 되었던지 소설이 되었던지 간에 작품을 내는 첫 감동은 말로 다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내 세상이 된 것과 같습니다. 각고의 작업 끝에 탄생한 책 한 권. 대단한 일입니다.


1) 작가의 사명감


또 다시 작가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작가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행복을 주는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유익하고 귀중한 정보가 되었다는 기본적인 만족 과 지적인 충족감 이상은 주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만족도 끼쳐주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위대한 작품은 감동이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존재감에 대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독자의 삶의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 행복을 끼쳐 주어야만 합니다. 꿈과 비전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작가는 스스로의 금칙을 설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써야 할 글이 있고 쓰지 말아야 할 글이 있습니다. 써야 할 글이란 꿈을 주는 글이며 독자를 행복하게 해 주는 글이며 쓰지 말아야 할 글은 독자를 혼미하게 하거나 딜렘마에 빠지게 하거나 사상적인 혼동이나 가치관의 혼동을 주는 글은 스스로 금해야 합니다. 이 말은 비평이나 도전을 주는 글을 금하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비난의 글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상적인 이유로 선동하는 글과 혁명을 찬양하는 글이 난무할 때에 정통적인 비평의 글과 평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선동하는 글이나 혁명을 찬양하는 글의 색체는 강하고 인상에 많이 남기 때문에 정통적인 비평이나 평가의 글은 약해 보이고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여 독자에게 외면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공산주의 찬양이론을 세운 칼 막스와 레닌의 글은 아주 강력한 단어들과 행동을 유발하는 논리로 포장되어 불평과 불만의 시대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지식층이라고 자부하는 지식층을 선동하는 독소적인 전파력이 상당했습니다. 각 층을 계급으로 나누어 착취계급과 착취당하는 인민계급으로 구분하여 인민계급을 통해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논리를 세워 혁명을 충동했는데 그것이 먹혀 들어갔습니다. 공산주의 논리대로 혁명이 일어나서 세상을 바꾸면 당장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스의 이론을 공산주의혁명이론으로 정립한 막스레닌주의를 찬양하며 공산주의를 받아 들였던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라파는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막스와 레닌의 글이 찬양되면서 혁명으로 세상이 불끈 뒤집어 질 때에도 정통자유민주주의는 그저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일면 비겁해 보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혁명 이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제품을 발전시키고 사람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공산주의는 당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결과 불과 100년의 세월도 가지 못하고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공산주의는 지구의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정치의 형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늘 당의 눈치를 보며 당의 지시에 긴장하며 혁명적 구호와 자극적인 언어에 인민은 지쳤습니다. 당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잘 살아야 하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자유경쟁체제에서 자꾸 퇴보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작품은 비판의 양식에서 머물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란 문제제기와 성토에서 마치는 글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문제해결의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은 비평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비평이란 문제와 해결을 연결해 주는 가교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글은 문제가 되었으니 잡자고 하는 이야기이고 비평이란 문제가 되었으나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강은정 작가는 한겨레신문 2006년8월 23일자 판에서 <한국인들은 ‘연애질’만 하고 사나?> 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정신과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드라마를 보면 방향타를 잃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착잡하다는 심경으로 자신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원고를 쓰던 시절도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과연 드라마가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느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고민을 말합니다.


처음 작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했답니다. 죄와 벌, 폭력, 종교, 이혼, 죽음 같은 무거운 문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소재로 선택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그 사건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순히 차용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작품에는 무조건 재미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것이 이야기 유희의 기본 속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경제도 힘든 때에 무엇이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드라마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느꼈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을 할 땐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답니다. 강 작가는 그것이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드라마는 창작자로서 나만의 배설의 통로도 아니고, 무조건 웃자고 만들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반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과연 작가 개인의 한풀이나 해보고 싶었던 사랑타령을 풀어보자고 몇 십억 원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하는 중심에 서 있는 작가의 책임영역에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다고 반성합니다.


강 작가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에 한풀이적인 사랑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지적합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천성이며 예술이지만 방송작가에게는 거기에 더해 서비스 마인드를 가지고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성합니다.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한풀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고 고백합니다. 작가의 특성상 자신이 작품을 통해서 한풀이를 하고 싶은 욕망은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왜냐면 작가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거든요. 자신이 과거의 시간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현재의 시간을 빌어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욕망은 참을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입니다. 그것을 이겨 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약속을 지켜 낸 것입니다.


강 작가는 가지지 못한 시절,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쏟아내는 건 일기장이면 족하다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드라마 현실을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그런 한풀이 사랑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말이지요. 다음은 강 작가가 작가들 특히 드라마작가들에게 발하는 일갈입니다.


“사랑을 통해, 가족을 통해, 일을 통해, 친구를 통해 우리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는 주객이 바뀌었다. 모두들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 같다. 사랑을 통해 이루어야 할 개인의 성찰과 성장, 인생의 철학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냥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끝이 난다. 수단이 목적처럼 보여 진다는 것이다. 왜 더 깊게 가지 못할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연애질로만 돌아가거나 시청자들이 그 정도로 얄팍하진 않을 것인데 정작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얄팍하다. 그래서 트렌디드라마가 끝을 보게 되었다. “너를 갖고야 말겠어”, 혹은 “이 여자가 내 여자야”라고 소리치는 주인공들 말고,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주인공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강은정/드라마 〈파리의 연인〉 작가


2) 민주주의(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오해.


우리나라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이상주의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작가는 기본적으로 절제된 성격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펼쳐내야 할 부분만 펼쳐내고 그 외의 부분은 문장을 압축하는 형태에서 서술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통제가 없는 경우 글은 달리고 싶은 대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원고매수만 채우며 내용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손으로 움켜쥔 모래알과 같아 손에 남겨지는 것이 없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는 무의미한 이야기였다면 작가가 독자 양쪽이 다 맥이 빠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문장을 압축하듯 절제해서 정제된 문장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성된 원고에 대하여 만족해하는 작가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대로 이야기를 엮어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묵직하게 담아냈는데 속이 비어 있어 무게가 나가지 못하는 꼴사나운 원고로 나왔다면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문제는 표현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할 말을 못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있는 글을 피하고 어려운 주제를 수학을 풀듯 너무 많은 시간과 면을 할애했거나, 이유가 있습니다.


거개의 젊은 작가의 경우 글 내용이 너무 민주적입니다. 소재가 금기시 되거나 터부시 되는 소재를 함부로 다룹니다.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철학도 없는 글은 작가가 손 대 보고 싶은 한풀이에 불과합니다. 이런 류의 작품은 무게가 없습니다.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런 작품은 한 번 읽고 나면 그만입니다. 다시 책장을 넘겨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책도 있구나 하는 정도의 시각적 감각만 남기고 책장 속에서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작가는 사랑 받는 작품을 소원하며 작품을 씁니다. 몇 번씩 책장에서 꺼내서 읽히는 그런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는 책도 있는 겁니다. 이런 책은 무게 중심이 완벽한 책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살아 있고 철학이 꿈틀대며 움직입니다. 움직이는 책만이 감동을 줍니다.  


작가에 따라 첫 작품부터 감동을 주는 베스트 작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가는 이미 작품을 발표하기 전부터 베스트 작가로서의 소양을 키우고 난 뒤에 조심스럽게 등단한 작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름이 없는 무명작가의 시절을 거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감히 발표는 꿈도 못 꾸어 보다가 꾸준한 습작 끝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첫 작품으로 발표한 그런 작가들입니다. 


작품 속에서 만나는 작가의 양식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인식을 넘어 방종적인 작가라는 인식이 든다면 그 작가는 민주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기본으로 내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책임을 요구합니다. 즉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자유를 구가하라는 묵계가 전통적인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은 가상의 세계인 작품 속에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못해 보는 것을 작품 속에서 마음껏 해 보자는 식의 한풀이적 작품은 사회에 암적인 화두를 던지게 되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수용할 수도 있다는 방향으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삶의 일탈을 꿈꾸며 불륜을 사랑으로 둔갑시키는 작품들은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메디슨 카운티 다리” 와 같은 작품들이지요. 중년의 단 한 번의 불륜이며 지루한 일상의 일탈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독자의 양식에 달려 있는 것일 뿐, 작품 속에서 여 주인공은 한을 품고 죽음 직전에야 토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독자는 작품 속의 주인공과 눈높이를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독자가 작품 속의 주인공과 동기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작품 속에 빠져 들었다면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개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거나 감동을 주거나 전통적인 가치관에 충격을 준 작품은 세월이 지나면서 문화로 형성되어 갑니다. 이는 그 작품에 드러나 있는 환경과 유사한 환경이 되면 작품의 주인공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과 같은 행동을 따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작품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과 같은 윤리와 도덕으로 세뇌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불륜에 대한 작품이 나오게 되면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따라 나옵니다. 신선한 소재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불륜에 대한 작품은 이미 고전부터 다루어져 있던 소재입니다. 불륜을 다룬 작품이 유행처럼 번진다면 반드시 사회적인 환경이 그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반듯하게 중심을 잡고 있으면 숨죽이며 속으로 행해졌을 이야기이며 간신히 한 두 작품이 반짝하다가 빛을 잃어 버리고 퇴색되어 버리고 말 소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불륜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불륜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불륜자들과 불륜을 꿈꾸고 있던 대중들 사이에 당위성을 부여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근사한 사랑 이야기로 둔갑을 해서 말이지요.


다빈치코드의 작가인 덴 브라운 역시 민주주의의 오해자입니다. 작가 자신은 돈방석 위에 올라  앉아서 좋을지 모르지만 독자층에서는 이미 종교적 충돌이나 윤리적 충돌을 경험한 분들이 상당할 것입니다.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도록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에 윤리와 도덕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 작가의 이름이 오래 갑니다. 작품을 통해 한 풀이나 해 대는 그런 작가는 자신에게는 충실할지 모르나 독자에게도 그리고 역사에게도 누를 끼치는 작가입니다.    


3) 논문


① 논문에는 일정한 금칙이 있습니다.

하나, 논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얼 말하고 있는지, 내가 주장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둘,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퍼온 글인지, 인용된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의 글인지를 명확히 밝혀 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글을 인용함으로 인하여 내 주장에 무게를 더해주는 분에 대한 최소의 예의입니다.

셋,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신조어이거나 아니면 글을 읽는 분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용어일 때에는 해설 (주)을 달아 주어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② 논문은 자신의 주장과 경험 혹은 발표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하여 공증을 받는 것입니다. 논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 연구한 내용에 대한 실적의 평가가 뒤따라옵니다. 따라서 논문을 쓰신 분은 비판을 각오하고 쓰는 것입니다. 제목과 내용이 묵직하고 비중이 있는 논문이라면 학문에 기여하게 되고 그 논문으로 인하여 전문가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인정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학 과제물인 레포트 정도의 글에 논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가소로운 일입니다.


③ 논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글이 아닌 경우에는 글쓴이의 양심에 따라 소고 혹은 고민이라고 써야 합니다.


④ 좋은 양질의 논문은 해당 학문을 끊임없이 발전시킵니다. 그 논문을 대상 혹은 인용하여 더 발전된 논문이 탄생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하고, 좋은 내용과 사변의 폭을 넓혀 준다는 의미에서도 지원되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위 논문은 더욱 깊이가 있어져야 하고 무게가 있어져야 하고 업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수준의 논문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논문은 후학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선학들의 노고와 땀의 결실입니다.


⑤ 좋은 논문은 읽기에도 편한 논문입니다.


논문 발표자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 논문은 참으로 읽기가 편하며 사고의 틀에 도전을 줍니다. 각주와 필자의 주석이 많이 달려 있는 글은 많이 연구한 글입니다. 논문은 자신의 필력이나 학문의 성취도를 평가해 달라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하여 글로 내놓은 것입니다. 더 많은 분이 평가해 달라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좋은 논문은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적어도 그 분이 얼마나 노력하고 고민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도록 평가 받기 쉽도록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처럼 많이 연구되어져 있고 독자를 위하여 세심하게 배려한 글로 발표된 내용의 논문에 찬사를 보냅니다.


고민의 정도에 따라 비례하여 좋은 논문이 탄생됩니다. 많이 고민한 논문이 나와 주어야 하고 좋은 논문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주어야 합니다.


4) 비판과 비평의 차이


비판과 비평은 양식의 차이를 말합니다. 논문에서의 비판이란 비평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되어집니다. 국어사전적인 의미에서 비판은 옳고 그름을 따져 판단하는 것으로 의미됩니다. 비평이란 옳고 그름을 따져 평하는 것, 즉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판의 양식은 마르크스주의적입니다. 비평의 양식은 만하임주의적입니다. 같은 이데올로기를 놓고 마르크스는 비판양식으로 접근하여 혁명의 논리를 세운 반면,  만하임은 비평양식으로 접근하여 학문의 논리로 채택했습니다. 비판은 양쪽을 비교하여 단절시키는 반면, 비평은 양쪽을 비교하여 가교를 놓고 소통하게 합니다.  


보편적으로 비판은 비난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평으로 가야 합니다. 비판에 익숙해지면 평가하는 부분이 약합니다. 비평을 하려면 칭찬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성향이 강한 분은 칭찬하는 글에 약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 따지는 것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 따져서 판단해 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는 일은 잘 못 합니다. 그렇게 해 주면 마치 자신의 자존감에 훼손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칭찬에는 인색하지요. 또 칭찬해주려면 뭐 하러 비판을 했느냐 하는 심리도 작용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비평으로 익숙해지면 어떨까요. 비평에 익숙해지면 좌우 구별의 능력이 현저히 상승됩니다. 이를테면 내게 중요한 사람이 잘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 잘 못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야단을 쳐주어야 합니다. 거기까지는 비판입니다.  야단맞고 상한 마음을 풀어주고 아픈 감정을 보듬어 주어 상대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바로 비평입니다.   


글을 쓰는 이에게는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소설)를 통해서 독자에게 행복을 주는 글을 써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 분들이 소설가이며 이야기꾼입니다.


가설무대의 이야기꾼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로 인하여 듣는 이가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슬픈 이야기를 꾸며 냈을 때에 듣는 이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비극의 주인공이 다시 일어나 성공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꾸며 주는 것은 기본내공이며 서비스입니다. 자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 분들을 울려 보내면 되겠습니까? 울다 웃다가 가슴이 뻐근하도록 내가 여기에 잘 왔구나 하는 정도의 보람은 주어서 보내야 합니다. 고생스럽게 살아 왔지만 남의 슬픈 이야기의 뒤끝에 행복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행복해지고 삶아온 보람도 생기고 뒷심도 생기는 것이지요. 빤한 스토리인데도 신파조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가 있고 널리 사랑을 받습니다. 바로 가설무대의 이야기꾼이 비평입니다.


비판가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게 되면 이념적인 소설이 나옵니다. 그러나 비평가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게 되면 행복한 소설이 나옵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소설처럼 말이지요. 사실 이효석 작가는 잠시 공산주의의 사상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동반작가의 시절이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이효석 작가는 "도시와 유령"이라는 선동적인 단편소설로 문단에 본격적으로 등단했습니다. 1931년에 첫 창작집인 "노령근해"를 발간하여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찬양합니다. 이로써 문학적 사상의 지향점이 선명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동반작가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비판적 시각으로 글을 썼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1933년 이효석 작가는 자연묘사와 인간의 성을 주제로 한 "돈"을 발표하고 나서 뒤이어 "화분"이라는 장편소설로 순수문학으로 귀의합니다. 드디어 1936년에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고 동반작가라는 별칭을 떼어내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비평가적인 시각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이효석 작가가 비판의 시각으로 글을 쓰는 동안에는 독자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비평의 시각으로 글을 쓰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행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비평의 시각으로 써야 합니다. 소설이야 말로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작가의 색깔에 따라 그리고 취향에 따라 독특한 작품의 세계가 있습니다.  초년생의 경우 문제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찹니다. 하지만 자꾸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마음부터 불행해집니다. 그러니 그 글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태백산맥과 같은 이념적 색채가  강한 책은 시대와 맞아 떨어진 베스트셀러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년 중 행사로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파업으로 전 국민이 골탕을 먹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묵직한 이념적 책을 손에 드는 독자도 없습니다. 비판의 시대에서 비평의 시대로 넘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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