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있는 문학개론

제1장 작품의 틀

도제조 안형식 2009. 7. 10. 20:41

제1장  작품의 틀


사람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만물 중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문화란 사람의 삶이 구체적으로 살아온 흔적입니다. 여기에 역사와 공간 그리고 시간이 포함되면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되어집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유한 문화라고 해서 문화권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문화는 영웅의 발자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문화는 문명이라는 모체가 있습니다. 동양권과 서양권은 문명에 따라 갈립니다.  


그리스는 헬라문명의 발상지로 서방 문화권을 대표합니다. 터키는 오리엔탈 문명의 발상지로 동방 문화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는 지정학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위대한 동서방의 문명은 부자가 일으켜 세운 문화권입니다.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은 헬라문명의 창시자로 서방 문화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필립 대왕은 오리엔탈 문명의 창시자로 동방문화를 창시한 창시자로 각각 등극되어 있으니 한 가문에서 부자에 의하여  각각 다른 문명이 일어났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는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어도 문화는 달랐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웅과 시간이 함께 굴려간 역사의 수레바퀴의 자국에는 그대로의 문화가 피어납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은 그대로 민중의 길이 된다는 말이 나온 것이지요. 영웅을 모방하고 영웅이 걸어온 발자취를 추적하고 평가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그 시절 그 시대의 문화가 탄생합니다. 사람에 따라 품은 사상은 같아도 관점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관점과 사상은 역사와 공간 그리고 시간이라는 요소가 주어질 때 각각의 문화로 꽃피워집니다. 개인의 역사는 가문의 역사에 남아 있고 영웅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에 남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모든 문화의 중심에는 영웅이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기록은 영웅을 위한 기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록이 곧 문화입니다. 


그리스 호메로스는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써낸 고전시인으로 말해집니다. 특히 호메로스의 영웅서사시인 “일리아드”는 고전으로서 1만 5693행, 전권이 24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작품입니다. 그 속에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내용의 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그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어떻게 썼을까요? 이야기 하고 싶어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그는 이야기 하고 싶은 글의 내용에 줄거리를 잡고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 호메로스가 길게 이야기 한 내용의 작품은 후대 역사에 의하여 고전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1. 작가


작가란 글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 축적되어진 문학적인 영혼의 세계를 시, 혹은 소설 혹은 수필 등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업으로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작가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업이 따로 있고 취미삼아 틈틈이 써낸 작품을 펴냄으로 작가로 등단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의 작품의 세계가 취미성이나 소일거리 혹은 부차적인 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성향이 있기 마련이고 그 성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문학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면 그 분의 영혼의 세계는 이미 작가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로보건데 누구나 다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자신의 작품을 풀어내 공개를 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는 동시에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곧 그 작가가 가견을 이루었느냐 아직 가견에 도달하지 못하였느냐의 평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작품을 통해 작가로 인정받을 때에 작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시인, 소설가, 수필가, 저술가 등등의 칭호는 그 작가의 특기가 어떤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시인이며 동시에 소설가일 수도 있으며 수필가이며 동시에 소설가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작가란 자신의 영혼의 세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냈느냐 하는 작업을 완성한 분이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한 분을 일컫습니다. 


2. 장르(갈래)


장르를 구분하기 전에 먼저 단단히 못을 박아 두어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이 전제는 작품이란 사실(Fact)과 허구(Fiction) 두 가지를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신문의 기사가 아닙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다빈치 코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팩션(팩트와 픽션의 합성어)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있는데 이는 문학작품에 대한 기본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문학작품은 사실과 허구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사실에 살을 입히고 자기 생각을 덧입혀서 지어내는 이야기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사는 동안에 본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겠습니까. 역사를 공부한 것이 없겠습니까. 이것들은 작가의 기본기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기본기 위에 공력(작업)과 필력이 더해져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시, 시조, 수필, 콩트, 칼럼, 에세이, 희곡, 평론, 소설 등의 각 장르를 구별하는 것은 완성된 작품이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작품화 되었을 때 구성의 요건에 따라 각 장르로 구별됩니다. 물론 각 장르별의 경계는 내용에 따라 모호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세이, 칼럼 등은 독자에 의하여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구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길게 쓴 콩트라고 해도 이를 수필이라 혹은 소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내용이 시 같은데 작가가 수필이라고 벅벅 우기면 그 작품의 장르는 수필이 되는 것이지요. 


시는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수필은 삶을 짧게 이야기 하는 것이며 소설은 삶을 길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이가 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은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또 길게 이야기하는 이가 노래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장르로 구분해 주는 것이지요. 조금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장르설정의 기준


장르를 문단에서는 갈래로 말합니다. 장르나 갈래나 같은 뜻입니다. 장르는 커피맛과 같이 익숙하고 갈래는 녹차맛과 같이 신선합니다. 장르 설정은 2분법이라는 이름으로 운문과 산문으로 구분해 주는 것이 근래까지 통용되었으나 현대에서는 4분법으로 구분되는 것이 통례이며 교과서적입니다. 요즘에는 5분법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이렇게 세세하게 구분해 주는 것은 시대의 변화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평론가들에 의하여 편의상 구분되어지던 것인데요, 평론가들의 편의상 구분되어진 것에 논리를 세워 체계화(학술화)시키면 어느덧 장르로 설정되어지는 겁니다. 


한국문학의 장르는 서양의 장르구별과 양식을 달리합니다. 서양문학에서 볼 수 없는 판소리라는 엄청난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서 이 암초를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폭파시켜 버릴 수도 없다는 고민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상 전래되고 있는 판소리는 분명 소설을 노래한 것이거든요. 그것도 원판으로 가면 판소리는 12마당이나 됩니다. '판소리 열두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박타령), 수궁가(토별가), 적벽가를 구분하여 예술적인 음악으로 가다듬어져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현재 불리고 있는 다섯마당에 '가루지기타령(변강쇠가)'을 포함시켜 '판소리 여섯마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판소리 6마당만 해도 완창하면 8시간 이상이 걸리고 밥 먹고 하면 12시간이 걸린답니다. 그러니 이걸 가사로 구분해서 시에 포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있는 힘을 다해 목청이 찢어지도록 불러 제치고 있는데 소설에 포함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여 4분법에서 5분법으로 나눠 봤다가 다시 2분법으로 돌아갔다가 찜찜하면 3분법으로 돌아갔다가 헤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살펴보도록 하지요.


조윤제는 개념으로 장르를 구분했습니다. 상위개념을 두어서 각 부문별과 하위개념으로 유형, 형태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고정옥은 형태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장덕순은 양식에 따라 구분했구요. 김수업과 조동일은 갈래를 따라 구분했습니다. 대체적으로 2분법을 기초로 한 구분입니다. 


2) 2분법


이분법은 운문(韻文, verse), 산문(散文, prose)으로 나눠집니다. 이병기는 시가부분과 산문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시가에는 잡가, 향가, 시조, 별곡체, 가사, 악장, 극가를 포함했습니다. 즉 노래 가사형식을 띄고 있는 글은 시가로 분류했다는 것이지요. 다음 산문에는 설화, 소설, 내간, 일기, 기행, 잡문으로 나누었습니다. 산문은 말 그대로 운율이 없고 형식에 매이지 않은 서술형태의 글을 말합니다.


김기동은 형식에 따라 율문장르군, 산문 장르군으로 구분했습니다. 율문장르군은 시적장르와 (향가, 속요, 별곡, 시조, 가사, 송시, 신시), 극적장르(판소리)를 따로 구분했습니다. 산문장르군은 소설, 희곡, 수필, 평론으로 구분했습니다. 형식에 따라 구분하다보니 같은 극갈래인 판소리와 희곡 장르가 하나는 율문, 하나는 산문 장르군으로 쪼개지는 모순이 생겼습니다.


3) 3분법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3분법으로 장르를 구분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정, 서사, 극으로 구분했습니다. 정반합의 원리를 주창한 관념철학자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3분법에 이론을 세워 서정문학(주관적인 것, 시). 서사문학(객관적인 것, 소설). 극문학(주관과 객관이 종합, 止揚된 것, 희곡)으로 나누었습니다.


슈타이거는 헤겔의 3분법을 계승, 유개념으로 나누고 다시 종개념으로 하위 장르를 나누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유계념은 서정적, 서사적, 극적은 그대로 두고 종개념을 설정하여 세밀하게 구분했습니다. 종의 개념은 작품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작가의 능력과 맞물려 있습니다. 작가의 능력이란 작가의 표현력을 말하는 것인데요.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시제, 환경설정, 주인공의 역할 등을 말합니다. 슈타이거의 잣대를 볼까요. 슈타이거의 틀에 의하면, (언어전개/시제/인칭/언어기능/정신영역/신경체계/세계관/생의단계/역사적 연계) 라는 도식을 설정해 놓고 도식에 대입하면 어느 항목과 일치하느냐에 따라서 구분한다는 식이지요. 정형화된 틀에 맞추어 글을 쓰는 작업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물지요. 그래서 슈타이거의 3분법은 작가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논리이나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슈타이거의 3분법이 구체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슈타이거의 방식을 많이 취하고 있습니다. 도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서정적 작품)/감각적/현재 /1인칭 /표현적/감정/정서적 경험/심리적/청춘기/주관적 대조

(서사적 작품)/직관적/과거/ 3인칭/ 지시적/사고/상상적 경험/자연적/성숙기/객관적 명제  

(극적 작품)  /개념적/미래/ 2인칭/ 상징적/의지/동적 경험 /이상적/노년기/ 종합


도식을 놓고 보면 상당히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장르 구분의 기준점이 명확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적 구도에 맞춘 평론가적 구별법입니다.


다음은 한국의 3분법입니다.  조윤제는 시가, 산문, 문필로 구분했습니다. 이는 전래되고 있는 조선 문학의 가사 문학의 독특함을 인정한 것인데요. 판소리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형식상으로는 가사이지만 내용이나 길이는 소설과 같으니 이리 붙일 수도 없고 저리 붙일 수도 없어서 고민 끝에 문필이라는 장르를 떼어 준 것이지요. 


장덕순은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서정적 양식에는 고대가요,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주관적 서정가사), 잡가로 구별했습니다. 서사적 양식은 설화(신화, 전설, 민담), 소설(전기적 소설, 서사시), 수필(일기, 내간, 기행, 잡필, 객관적 서사적 가사)로 구분했습니다. 극적양식으로는 가면극, 인형극, 창극으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이능우는 시, 소설, 수필로 정리했는데요. 가사를 수필로 분류했습니다. 수필에는 시, 소설, 희곡 등 픽션적인 것은 제외한 것으로서 일기, 기행, 편지문, 만필(만록), 가사 등으로 압축 정리했습니다. 조윤제의 체계를 수용했으나, 희곡을 제외한 것이 결함으로 지적되었습니다. 국문학의 형태에서는 '수필' 대신에 만록이라는 갈래로 설정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4) 4분법


 4분법은 시, 소설, 수필, 희곡으로 분류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헤르나디(Hernadi)는 4분법을 사용하면서 각 장르상의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희곡과 소설의 언어는 플롯과 인물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어지고 수필과 시의 언어는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데 사용합니다. 소설과 희곡에서는 작가와 독자가 서술자나 극적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지만, 시나 수필에 있어서는 그런 매개가 없이 직접 만납니다. 시나 수필은 다같이 1인칭, 시는 정서표출의 미적 가치를 가지지만, 수필은 설득의 공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구분되어집니다. 헤르나디는 장르란 작가가 어떤 글을 썼느냐 하는 작가 중심으로 장르가 결정된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지요.


이능우는 조윤제를 따르던 3분설에서 제외되었던 희곡 부분을 다시 불러 들여 4분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시적 작품, 소설적 작품, 수필, 희곡으로 구분하여 4분법을 채택하였습니다. 물론계륵과 같은 판소리는 희곡부분에 포함을 시켰습니다.


조동일은 서정, 서사, 희곡의 3분법을 지양하고 교술을 추가하여 4범주로 갈래를 구분했습니다. 즉 서정, 서사, 희곡, 교술이지요. 여기에서 敎란 알려주어서 주장함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述이란 어떤 사실, 경험을 서술한 것으로 한정했습니다. 조동일은 교술에 가사(시조, 향가, 판소리 등)를 포함시켰는데 가사에 대한 특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가사의 전반적 특질이란, ‘있었던 일을 확장적 문체를 일회적으로 사용하고 평면적(반상구분 없이)으로 서술해 알려 주어서 주장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는 판소리 중에 굿거리마당이 포함이 되어 있으니 이를 어디에 편입시켜야 하느냐 하는 고민 끝에 가사의 정의를 내려 주고 가사를 교술에 포함시키는 논리를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조윤제는 시가, 가사, 소설, 희곡으로 구분하여 4대 부문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각 부문은 다음과 같이 세분했습니다.


(1) 시가 : 향가, 장가, 경기체가, 시조

(2) 가사 : 가사

(3) 소설 : 신화, 전설, 설화, 소설

(4) 희곡 : 가면극, 인형극, 창극


판소리는 가사부분으로 독립시켜 주었고, 문필이라는 부문을 신설하여 문필 = 소설 + 희곡으로 설명합니다. 즉 소설과 희곡의 장르는 성격상으로는 다른 장르의 군으로 구별하지만 본래는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성질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소설과 희곡은 서양문화적인 요소가 있으니 같이 보아야 한다는 조윤제 교수의 시각으로 보입니다.

4대 부문에 들지 않은 평론과 잡문의 영역은 부수부문이라는 영역을 주어 따로 구분한 것이 특징입니다.


국문학에서는 장르로 말하지 않고 갈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장르로 말을 하던 갈래로 말을 하던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면 갈래라는 표현이 익숙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장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오늘의 작가들이 창작해 낼 수 있는 작품의 영역인 시와 수필 그리고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시


시란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언어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압축시켜서 단숨에 노래로 풀어냅니다. 억양이 있고 운율이 있습니다. 함축되어 있는 언어는 담금질을 한 흔적이 발견되지요.


김춘수 시인님의 “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편의상 1.2.3 이라는 숫자로 문단을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는 통상 연으로 말하지요. 연은 줄기 하나하나를 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연이라는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서 이 글에서는 연으로 나누지 않고 숫자로 나누도록 하렵니다. 구태여 연으로 따진다면 이 시는 6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3.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시인은 시의 전체에서 꽃이라는 단어로 (관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꽃이란 연인이 될 수도 있겠고, 아내가 될 수도 있겠고 자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어찌 보면 자신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의 엄숙함 앞에서 나라는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내적인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는 내 날을 하루하루를 진실만으로 채우고 싶다는 열망이 이 시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관계를 설정하기 전에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였느냐? 그리고 나는 네게 어떤 존재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더냐? 이 질문을 가지고 꽃의 존재를 노래합니다.


‘꽃’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시인은 꽃의 의미를 관계의 완성 혹은 존재의 가치로 봅니다. 꽃처럼 아름다움과 싱그러움 그리고 계절의 성숙함 이것을 의인화 시킨 것이지요. 꽃이라는 사물을 대입하여 인격의 존재성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인격의 완성을 한없이 추구하는 인생의 본질을 꽃에 비유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를 관계의 미완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미완성의 꽃 혹은 내게 별 의미가 없는 꽃, 사물을 말하지요.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 꽃이고 보면 꽃은 사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을 뿐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데 그 꽃에 이름을 불러주니 그 이름을 불린 꽃이 자신에게 와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관계가 설정됩니다.


이름이란 존재를 일컫는 것이지요. 존재의 존엄성이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나와 그것이라는 불투명한 관계에서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와 너의 관계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 구체적인 동기는 이름에 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름이라도 애인이 부를 때와 친구가 부를 때에 느껴지는 감정은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존엄성의 가치란, 불러 주었을 때 그 부름을 받은 대상이 반응해 줄 때 너와 나, 나와 너의 관계로 승화되었다고 노래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로의 승화는 활짝 만개한 꽃의 모양을 연상시킴으로 ‘완성이다.’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시인은 이를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누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시인은 자신의 꽃이 된 존재에게 존엄의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시인의 꽃이 된 존재는 분명한 빛깔이 있고 향기가 있습니다. 꽃도 알고 꽃이 된 상대도 아는 빛깔과 향기지요. 그 빛깔과 향기란 그 존재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꽃이 된 상대의 존엄을 이름으로 말했고 그 이름으로 상대의 가치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시켰습니다. 그 특별한 존재는 빛깔과 향기라는 두 가지 원소에 의하여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라는 가치로 구별되었습니다. 특별한 관계가 설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노래합니다. 자신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이에게 꽃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시인의 이름을 불러 꽃이 되게 할 사람은, 시인 자신이 꽃의 가치에 대하여 존엄성을 부여했던 것처럼 자신의 가치에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시인은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설정된 꽃의 개념을 우리 전체에게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 꽃처럼 아름다운 인간관계. 여기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전체의 꽃밭으로 연결시켜 가고 있는 시인의 의도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요. 꽃의 빛깔과 향기를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지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에 대한 답은 당신은 나만이 알 수 있는 빛깔과 향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가도 그 빛깔과 향기는 퇴색되거나 증발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서 기억되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 어디 없을까요? ‘우리’ 는 모다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는 시인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런 제자를 키우고 싶다는 스승 된 이의 소원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키우고 싶다는 아비들의 공통된 소원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빛깔과 향기가 퇴색되지 않고 증발되지 않는 멋있고 맛있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우리라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시인의 깊은 뜻이 소망이 담겨 있는 ‘우리’ 입니다.


4.  수필


수필이란 일상에서 일어나는 감동이나 혹은 느낌표나 생각을 오밀조밀하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남에게 이야기 해 주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수필은 일기문의 형식처럼 기록된 것도 있고 어떤 수필은 서간문 형태로 쓰인  것도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일기문 형식이다 혹은 서간문 형식이다 라고 분류를 하는데요. 수필은 그 모든 형식을 다 포함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합니다.


하나하나의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동을 글로 엮어 내는 것이니 만큼 필자와 독자가 서로가 역동적인 감동을 느끼게 되고 교감하게 되지요. 내 일상에도 이런 일이 있는데 수필가는 이런 일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보았고 오묘한 필체로 그 감동을 풀어 이야기하는구나 하는 것으로 필자에 대한 호감도 가지게 됩니다.


책상 위에 오뚝하니 세워 놓은 탁상시계에서, 오래 전에 어머니가 시간에 맞추어 깨워 주시던 때가 회상하기도 합니다.  그 때의 달달한 추억을 풀어 놓으며 자신이 지금 그 때를 회상하며 느끼게 되는 감동과 생각 그리고 회한을 오밀조밀하게 적어 놓는 겁니다. 이렇게 적어 놓은 수필가의 수필에서는 그 수필가의 놀라운 시각과 감성에 대하여 놀라워하고 때때로 감동을 크게 받습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데 탁상시계에 어머니와의 사연이 숨겨져 있다거나  혹은 어머니가 아침마다 깨우는데 진력이 나서 탁상시계를 사 들고 오셨는데 독일병정이 나팔을 불어대는 “빱빠라뽑 빱빠압” 하는 소리를 처음 들었던 때의 당혹감이라든지 등등 그 때의 감정을 그대로 써 놓았다면,  독자들은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저 다만 그 때의 생각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공감. 그 공감이 수필의 위력입니다.


수필은 느낌에 대해 길게 표현한 것인데요. 운률에 맞추지 않고 길게 자유롭게 쓴 시라고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줄거리를 세워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소설이 됩니다만, 느낌을 길게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에 수필이라는 장르로 구분됩니다.


수필과 에세이는 차이가 있습니다. 에세이는 사건이나 혹은 사물에 대한  소감을 담아내는 것이며 칼럼과 차별됩니다. 칼럼은 형식상으로는 에세이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내용은 교훈이나 비판 혹은 비평이 담겨져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수필은 학부형이 쓰는 자유로운 글이라면 에세이는 담임교사가 쓰는 글이고 칼럼은 교장선생님이 쓰는 글로 설명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학생은? 일기장을 쓰는 것이지요.


5.  소설


소설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최초의 소설은 광해군 시대의 좌참판을 지낸 허균 (許筠 ; 1569~1618)의 "홍길동전"입니다. 홍길동전은 시대의 구분 없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홍길동전을 시작으로 한국의 문학은 본격적인 소설 시대로 들어섭니다. 홍길동전보다 앞선 세종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장화홍련전"도 있으나 작가와 시대가 미상이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소설로 인정하는데에는 문제가 있음으로 제외되었습니다.


소설에는 스토리와 테마가 있습니다. 스토리는 테마를 설명하기 위한 단계적인 긴 설명입니다. 테마에 대한 설정은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통전적인 개념으로 보면 권선징악의 테마, 비극의 테마, 사랑의 테마가 그것인데요, 여기에 역사성이나 문화성을 부여하여 완성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역사를 테마로 할 때에 그 방대한 역사를 다 축소해 놓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 몫은 역사가들이 저술 혹은 기록해 놓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작가가 그 때의 역사를 작품으로 만들어 낼 때에는 소재를 뽑아서 줄거리 형태로 만들어 놓고 여기에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재해석이지요. 작가는 역사를 교묘히 바꾸어 놓거나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글쟁이는 엿장수와 같아서 역사마저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 역사는 역사대로 소설은 단순작품으로 이해하고 사실성 여부를 판단 할 수 있는 독자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단순히 줄거리로 볼 때에는 단편 보다는 중편이 중편보다는 장편이 더 깁니다. 이야기 내용을 보면 단편들이 모여서 중편이 되고 중편들이 모여서 장편이 된 것이지요. 단편적으로 끝날 이야기를 중편으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편으로 마칠 이야기를 장편으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편으로 모자라서 상권 하권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설의 뼈대가 되는 단 하나의 소스(source)가 관련이 있는 여러 가지의 줄기로 뻗어나갈 수 있을 때 형태에 따라 중편 혹은 장편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그 소스는 제목이나 서설 혹은 줄거리 소개에 담겨져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약 “청춘” 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면, 그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의 청춘시절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공과 관련되어 있는 청춘들이 이야기 될 것이지요. 그런데 주인공이 마당발이라든지 혹은 주인공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주인공과 관련되어 있는 청춘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또 그 관련되어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 중에 독특한 소재를 가진 이야기들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전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장편이 되고 장편도 1권 2권으로 계속 나올 수 있겠지요.  작가 김홍신의 인간시장 같은 시리즈물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김홍신 작가의 인간시장은 청춘을 소재로 하여 좀 길게 이야기한 작품입니다. 서론에서 소개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전권이 24권으로 되어 있는 아주 방대한 이야기책입니다. 이렇듯 아주 길게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길게 이야기 하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횡설수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는 작품의 통일성 문제입니다.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제(논지)를 벗어나 자꾸 늘어지거나 삼천포로 빠지게 되면 읽는 독자가 고달파집니다. 소설이란 줄줄 읽는 맛이 있어야지 읽다가 생각하고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다시 전 페이지로 돌아가서 읽어 봐야 할 정도라면 이는 논문이지요. 따라서 소설에서는 각각 다른 서로의 사건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주인공의 환경에 치명적인 역할을 하는 주연들에 대한 상세 설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저 장수를 늘리기 위하여 작품 전체의 통일성은 생각하지 않고 단순작업으로 엿가락 늘리듯 늘린다면 작품성과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해 있다는 식의 등식대로 아무리 늘어져도 결국 주인공에게 갈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언제 주인공 이야기가 나올까 할 정도의 지루함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소설은 통일성을 잃지 않고 주제를 선명히 해야 한다는 것과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년대와 그 년대의 특징적인 정황을 정확하게 묘사하여 사실보다 더 사실같이 느껴지도록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리얼리티기법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다음으로 소설은 글로 그림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웅변가는 말로 웅변합니다. 작가는 글로 말해야 합니다. 그림은 한 장이면 충분한데 글로 표현하다 보니 그림을 그리듯 묘사를 하는 작업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어지럼증이 생길 정도로 악착같이 뚫어지듯 세밀하게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제비국을 끓여내는 것과도 같은데요. 수제비국에는 밀가루 수제비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자도 들어가고 파도 들어가고 기분 좋으면 쇠고기 등심도 다져서 들어가고 사골국물로 국물을 잡기도 합니다. 밀가루 반죽을 늘여서 끓였다고 다 수제비국이 아닙니다. 똑 같은 수제비국이라고 해도 먹을 만한 수제비국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은 수제비국도 있기 마련입니다. 


두드러진 한 장면을 묘사하거나 클라이맥스로 설정해서 강조하고자 할 때에는 입체음향도 깔아 주어야 합니다. 가령 “두 연인이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걷고 있다” 는 대목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한다거나 꾸며서 강조하고 싶다면,  표정까지 숨소리까지 그리고 오솔길에 개구리도 동원해 보고 계절에 따라 뻐꾸기의 소리나 혹은 까치의 소리 아니면 멍멍이 소리라도 음향으로 깔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가고 있다거나 햇볕이 내리 쬐고 있다거나 아니면 촉촉한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는 표현으로 무언가 좀 구린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입맛을 다실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작업은 작가가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를 대번에 구별해 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글을 쓰다가 생침을 꿀꺽 삼킬 정도이면 독자도 생침을 꿀꺽 하고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작가가 그 내용에 얼마나 빠져 있는지의 정도에 따라 독자들의 감흥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뼈대가 있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여운이 아주 길어서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설은 글쟁이의 글장난이 아닙니다. 소설에는 작가의 사상이나 생각의 틀,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입장이 분명히 나와져야 합니다.


태백산맥은 출판 후 지금까지 40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표출하였습니다. 작가는 태백산맥의 제 1부를 ‘한의 모닥불’로 출발시키고 있습니다.


한의 모닥불. 한이라는 개념과 모닥불이라는 개념을 중첩시키며 한을 불로 승화시키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표출합니다. 한을 가진 이들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모이자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가슴에 서린 한을 불로 태워 버리자는 웅변이지요. 조정래 작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성향을 소설이라는 무난한 형태로 꾸며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 무려 11년 동안 이 작품은 공안당국에 의하여 금서로 분류되었습니다. 직감적이며 직설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성향을 그대로 표출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성향에 대하여 질문하는 질문자들에게 일일이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길게 표출해 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조정래 작가가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있겠지요.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데올로기적인 경계인의 사상이 확실히 보여 집니다. 송두율이 말한 경계인이란 자유 민주국가에서 볼 때에는 친북이고 북한에서 볼 때는 공산주의의 이단에 불과한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경계인이란 양측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딱 한번은 크게 써 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성향이 친북적이든 아니든 작가의 성향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확연히 구분해 낼 수 있는 작가의 성향이라면 같은 작가의 눈과 양심으로 볼 때에는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어떤 작가는 소망을 주기 위하여 소설을 씁니다. 어떤 작가는 그 시대의 비뚤어진 양심과 기성세대의 추악함을 고발하기 위하여 쓴답니다. 어떤 작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길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소설을 씁니다. 어떤 작가는 바람직한 정신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설이라는 형태를 빌어 의중에 담겨 있는 뼈를 내어 놓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작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의도를 표출해 내는 작품성과  완성도가 빼어나다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다 했다면,  감동은 독자들의 몫이 됩니다. 


소설은 마지막장까지 쓰고 난 뒤에 곧바로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감동할 정도의 수준이 되기까지 계속 수정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작업이 제일 힘들고 뼈를 깎는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작품의 완성도는 작가의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작품은 기껏 몇 번의 수정 끝에 완성도 면에서 떨어지는 작품을 내어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첫 작품이라고 해도 얼마나 수정에 공을 들였는지 빼어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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