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조정래의 사상적 지번
대저 칼을 든 자는 당대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으나, 필을 든 자는 역사가 다하기까지 두고두고 사람의 정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칼을 든 자 보다 필을 든 자의 책임이 더욱 중하다 할 것이다.
1. 작품이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매체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
역사적으로 보면 필을 든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레닌에게 전파되고 레닌이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을 채용하여 칼을 잡게 되었을 때, 이때부터 전 세계의 불행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위험한 것은 전혀 시도된 적이 없고 효과가 검증된 바도 없는, 단순 무식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문제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사회의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것은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지주와 자본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불평과 불만이 없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 구조를 만들게 되면 유토피아가 실현 되는 것으로 확신했다. 특히 다수의 힘을 가진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실력대결을 하게 되면 종국에 가서는 정부와 자본가의 패배로 끝이 나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다수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노동자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혁명이론을 세웠다. 즉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을 각오하고 혁명적 사상으로 무장하여 끝까지 투쟁하여 정부를 장악하고 귀족과 지주를 몰아내면 노동자들의 천국이 이뤄진다는 논리였다.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를 채용한 국가들은 인명을 하찮게 여기는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으로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고 자신들만의 공산주의국가를 세웠다.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베트남은 수많은 보트피플과 엄청난 인적 자원을 소멸시키고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이론이 단 한 번도 시도된 적도 없었고 따라서 그 효과가 전혀 검증된 바도 없는 다만 혁명에 미친 정신병자의 악독한 망상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구소련은 공산주의의 실패로 러시아의 앞날이 불투명해지자 마침내 두 손을 들고 소련연방체를 해체했다. 성난 군중들은 레닌의 동상을 화형 시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소련의 레닌주의를 따르며 공산주의국가를 세웠던 공산국가들은 그대로 버림을 받았다.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오염되어 수많은 국민을 살해하며 공산정권을 세웠던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는 그대로 방치되어 열등한 국가로 추락하고 말았다.
독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많은 시간을 공들여 멸망직전에 있던 동독을 흡수한 서독은 현재 통일후유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통일 후 독일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서독의 모든 제품은 세계시장에서 데미지를 입고 있다. 이로 인해 서독과 동독의 통일에 주목했던 세계는 공산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하여 충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통일 독일의 예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공산주의에 오염된 정권과의 연합은 그것이 흡수통일이 되었던 합의통일이 되었던지 간에 양쪽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준다는 현실적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은 10년 좌파 정권에 편승한 박현채, 임헌영, 조정래, 황석영, 김지하, 고은 등 친북자들이 주창한 민족주의를 빙자한 친북적 통일론에 세뇌되어 통일에 대한 막연한 환상까지 가지고 있다. 이들은 내친김에 연방제 통일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와 남민전 출신의 임헌영의 사상에 오염되어 친북자가 된 조정래처럼 이들의 사상에 오염이 되면 친북자가 되어 나오게 되어 있다. 오염된 증상을 보자. 첫째로 이들의 사상에 오염이 되면 공산주의 사상은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이해의 차원에서 보게 된다. 둘째로 북한을 동포로 바라보게 되며 동포애를 말하며 한 형제라고 말한다. 세째로 김정일을 단순히 북한의 지도자로 보게 되고 인정하게 된다. 결국 이 말은 북한을 적으로 보지 않게 되더라는 말이다.
언필칭, 만약 그렇게도 북한이 좋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존경을 받을만한 지도자라고 추앙을 할 정도라면, 북한으로 망명신청을 하고 북한인이 되어 활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에 가서 소원했던 대로 북한과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고 그네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는 것이 남한 국민들을 위해서도 좋고 북한인민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어찌 밥은 남한에서 먹고 밥 먹은 힘으로는 북한을 찬양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박현채에게서 나온다. 박현채는 "세 단계의 싸움에 주는 격문"이라는 지시를 김경추(가명 현재 71세)에게 내렸다. 1964년에 채근담 속에 메모와 같은 형태로 은밀히 전해졌다. 박현채는 편향된 돌출 행동은 통일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김경추에게 준책 채근담은 ‘중용을 배우라’는 뜻이었고, 흔들리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김경추는 이 책을 64년부터 98년까지 테이프로 묶어 숨겨두었다. 박현채는 격문에서 "그"를위해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하며 늘 "그"를 가슴에 담고 조직적으로 단계적으로 투쟁할 것을 지시한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지혜롭게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중용을 지키고 끝까지 투쟁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 격문은 김경추와 함께 광주서중에서 같이 운동했던 김경추의 친구가 월북기도 후 잡혀 사형당한 직후, 박현채가 김경추에게 경거망동을 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내린 격문이었다. 10대 소년으로서 빨치산에 입대했던 박현채는 문화부에 소속되었고 이후 얼마 후에 문화부 중대장이 된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년 빨치산 문화부 중대장 조원제는 다름 아닌 조정래가 쓴 박현채 자서전이었다. (박승옥)
사상이란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상이다. 칼로 목을 치면 떨어진 목이 뒹굴면서도 혀로는 사상을 말한다. 함석헌 옹은 “사상에 대한 언로를 막고 감옥에 쳐 넣으면 감옥에서 알 까고 나온다”라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다. 도무지 변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상전환이란 자신의 생각의 틀을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한다. 안병직 교수는 사상전환을 하고 뉴라이트 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에 있다. 안 교수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에 심각한 고민과 갈등 끝에 학자적 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로 귀의했다. 과거 동반작가로 분류되기도 했던 이효석도 잠시 오염되었던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순수작가로 귀의한 전례가 있다. 물론 귀의했다고 해서 당시에 발표되었던 공산주의 사상이 담긴 작품까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일도 없다. 오히려 독자에 의해 양심적인 행동으로 평가 받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독자들이 이해를 해 주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 안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공산주의 사상자가 있는가 하면 정통적인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국민으로 양분된다. 특히 한국은 분단국가로서 북한과는 단지 휴전 중일뿐이다. 휴전 중이라는 말은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말이며 주적이 북한이라는 뜻이다. 주적인 북한과 지도자를 찬양하는 자는 이적자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자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단이다. 실제로 이들은 죽은 공산주의를 지식하고 있기에 죽은 지식의 소유자들이며 이적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이들을 지금까지 비판하지 못한 한국 문단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이에 더하여 친북정권에 기대어 치부한 어용들과 이들이 토해 낸 작품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 조국의 상처를 들춰내고 그 상처를 이리저리 헤쳐 심각한 아픔과 혼선을 주고 자신들은 그 책을 팔아 치부했을 뿐이다.
만약 이들이 역사관과 국가관에 충실했다면, 한국의 역사책이 단군신화로 시작되고 있는 허무맹랑한 신화를 걷어내고 사실에 입각한 역사관으로 바꿔 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대북포용정책과 보안법폐지를 주창했고 북한을 주적에서 빼 놓는 일에 힘을 다하여 적을 이롭게 했을 뿐이다.
2. 사상의 근저와 뻗어나간 줄기
조정래의 사상적 지번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정래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밝히면 쉽게 나온다. 조정래의 스승은 소년 빨치산 출신인 박현채이다. 박현채는 김일성의 소년 전사였으며 박현채의 생애는 김일성에 대한 충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점철되어 있다. 박현채는 공산주의를 유토피아의 개념으로 인식했으며 스스로 진골 공산주의자라고 자신을 특정했다.
박현채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경제론을 한국의 상황에 끼워 맞춘 민족주의 경제론에 잘 드러나 있다. 박현채는 마르크스의 경제론과 앵겔스의 경제론을 석파하고 그것들의 장점이랄 수 있는 공산주의적 공동체 사상인 자립경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대변되고 있는 미국과 일본과의 통상을 외세의 경제침략으로 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박현채는 일본과 미국의 경제침탈을 막기 위해 북한과의 통상을 통해 민족주의적 자립경제를 이뤄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박현채의 친북적 경제론은 남한에 존재하는 모든 친북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김대중의 햇볕정책의 근간이 되었고 노무현의 대북포용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간첩혐의로 투옥되고 20여 년간 재야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이론을 설파하는 기간과 김대중의 재야활동 기간과 겹치고 있다. 박현채가 김일성을 위해 충성한 빨치산 출신이며 친북사상과 간첩혐의로 인해 20년 동안이나 교단에 서지 못하고 재야인사로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다는 것은 20년 동안 친북좌파로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충성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박승옥(시민발전대표)이 한겨레 21에 투고한 "한미 FTA, 그 결말을 아는가?"에서 박승옥은 박현채를 대한민국 경제론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브리테니커 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박현채’ 항목에서는 박현채를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로 정의하고 있다. 박현채는 송두율이나 강정구 등 친북주의자들과 차원이 다른 이들의 스승격이며, 김일성의 맹종자이며 찬양자였다. 박현채는 김일성을 감히 독재자로 부르지 못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김대중을 비롯한 모든 친북자들이 동일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친북자들은 남한의 박정희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독재자로 말하고 있으나 김일성의 독재에 대하여는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독재가 뭐냐. 김일성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의 이름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들은 김일성에게 충성하기 위해 남한을 적화시키고 괴뢰 정권을 세워 김일성에게 바치기로 충성맹세를 한 자들이다. 그 선두에 박현채가 있다.
박현채 김대중 등이 벌인 민주화 운동이란 사실상의 친북운동이었고 대한민국의 정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괴뢰정권을 세워 북한에 넘겨주기 위한 지하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현재에 와서 민주노총의 좌파집단인 제3노총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들은 코리아포커스를 통해 박현채 전집을 발간하여 박현채의 김일성 찬양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또 이들은 이 작업을 민주화 운동으로 말하며 제멋대로 명찰을 만들어 붙였다. 기억 속 박현채, 현실 속 박현채 라는 제목이 설명을 하고 있듯 이들은 대한민국의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라는 헌법을 악용하여 박현채의 김일성 찬양사상을 민주화 운동의 교과서로 포장을 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박현채가 김경추에게 준 고등학교 졸업선물 ‘채근담’. 책 속 표지엔 박현채가 친구에게 주는 ‘편중되지 말되 전투적으로 살라’란 조언이 적혀 있다. 박현채가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자 김경추는 이 책을 김대중 정부 출범 때까지 꼭꼭 숨겨뒀다.” 허태주/코리아포커스.
1957년 2월, 서울대 상대 학생이던 박현채는 고등학교 졸업이 늦어진 김경추(71세, 가명)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채근담’이었다. 당시는 광주서중에서 같이 운동했던 친구가 월북기도 후 잡혀 사형당한 직후였다. 편향된 돌출 행동은 통일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박현채는 믿었다. 김경추에게 준 책은 ‘중용을 배우라’는 뜻이었고, 흔들리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김경추는 이 책을 64년부터 98년까지 테이프로 묶어 숨겨두었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감된 박현채와 연루될까 두려워서다. 물건 하나로 조직사건에 엮여 들어가는 시대였다. 이 책은 김대중 정권이 탄생하고서야 다시 빛을 봤다. 책 표지 뒷면에 쓰인 몇 마디 문장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칼날같이 서늘하다고 김경추는 적고 있다. 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 단계의 싸움에 주는 격문”
인생은 투쟁이며 젊음의 상징은 기대이다.
투쟁은 조직화 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이율배반적 사상의 예술적 통일.
그를 위해 나는 너에게 동양적 중용, 이를 제시한다.
편중하지 말라.
그러나 전투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투쟁에 있기에....
서기 1957. 2. 26 민봉(民奉) 서.
여기에서 그는 누구인가? 박현채가 뼈골 깊이 각인하고 충성을 맹세한 그는 김일성이다. 박현채는 그 이름을 혀 밑에 감춰두고 임헌영이 그에게 넣어준 지혜를 따라 글과 책을 수단으로 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3. 김대중, 박현채, 임헌영, 조정래의 사상은 한 줄기
김일성의 소년전사 박현채와 친북자 김대중은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현채 계열과 김대중 계열은 연결선상에 있다. 김대중은 거짓말에 능한 희대의 사기꾼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경제의 대가로 자처하며 전 국민을 기망했다. 그는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을 스스로 저술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실상은 박현채 교수가 대필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 刊)에 실린 논문 ‘조국근대화론 대(對) 대중경제론’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대필’ 문제가 학술 논문을 통해 공론화되기는 처음이다. 김대중씨의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 경희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1969), 신동아’ 기고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1969)는 모두 박현채씨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하다고 김 교수는 확언했다.
박현채의 경제 사상은 전 통일부 장관인 이재정을 통해 2007년 새해 벽두에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북한을 지원할 책임이 남한에 있다”는 2007년 새해의 취임식 발언이 그것이다. 이재정은 통일부 장관 청문회에서 6.25를 남침으로 보느냐 북침으로 보느냐 라는 한나라당의 질문에 대해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물쩍 유야무야 넘기려다가 집중적인 답변 추궁에 마지못해 남침으로 말했다. 여기에서 이재정의 사상적 좌소가 역사까지도 왜곡하는 친북자임을 확실히 증명해 주면서 그 라인이 김대중-노무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현채-김대중 계열인 조정래는 자신의 작품인 태백산맥이 박현채를 모델로 작품화되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박현채에 대한 존경심은 모방심으로 까지 발전되어 있다. 조정래는 박현채 다운 조정래가 되기 위해 태백산맥을 썼다. 박현채는 목숨을 걸고 빨치산 소년전사로 김정일에게 충성했는데 자신은 그렇게까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필을 통해 박현채의 행동을 추앙함으로 충성하고자 했다.
박현채는 마르크스의 경제론을 바탕으로 만든 민족주의 자급 경제론으로 김일성을 측면 지원하는 경제의 줄기로, 조정래는 문단에서 태백산맥을 통해 김일성을 측면 지원하는 문학의 줄기로 각각 줄기를 형성하고 뻗어나갔다. 이 줄기는 한국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통일에 대한 환상과 동포라는 민족주의와 김일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북한의 실정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하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평생을 바친 탈북인사 황장엽 씨는 “김일성의 대남공작이 이토록 빨리 먹힐 줄은 상상을 못했다”며 “남한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체사상자들과 친북세력들을 색출하여 근절하지 않고 이 상태로 가면 적화될 것은 시간문제”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황장엽씨가 김일성교의 경전에 불과한 주체사상에 쉽게 잡아먹힌 남한의 지식인들에 대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허무맹랑한 주체사상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된 배경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있다는 사실을 황장엽씨가 몰랐을 뿐이다.
소년 빨치산 박현채가 서울대학교 상대와 대학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하는 동안에 서울대 안에는 박현채를 따르는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인혁당 사건의 원흉으로 박현채는 간첩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1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박현채는 직접적인 동선에서 간접적 동선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노선을 수정한 박현채는 김대중의 재야운동에 합류하여 소위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하여 주체사상과 김일성 찬양 사상을 전파했다. 겉으로는 경제학자요 속으로는 여전히 빨치산인 박현채는 조정래의 스승이 되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성의 찬양자인 빨치산으로 거듭났다. 조정래가 박현채를 위대한 사상가로 포장해서 한국 문단에 내놨을 때 김대중과 박현채 라인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한국 최고의 걸작품이자 대단한 작품으로 평하고 광고를 해주었다. 시류 또한 유신정권이라는 타킷이 있었기 때문에 시류의 흐름을 이용했다.
유신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한 김대중은 정치일선에서, 박현채는 재야운동가로 민족경제론을 앞세워 선두에 섰다. 당시 학생이었던 386세대들과 서울대에서 발생한 박현채 동아리파들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층들을 마음껏 유린하며 주체사상의 독을 전파했다.
이로부터 20년이 가까워 오던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친북 좌파들의 온상이었던 민주화 운동은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이어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정체가 친북좌파 운동을 포장한 것임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결국 성역화 되었던 민주화 운동은 국민을 기만한 친북좌파들의 공작이었다는 사실이 역사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소위 민주화 운동은 간판을 내렸다. 그것은 북한에서 강행한 핵실험의 결과 때문이었다. 참여연대의 최열 등은 즉시 북한의 핵실험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몸보신에 나섰고 친북좌파 문인들의 온상이었던 조정래가 고문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는 슬며시 간판을 내리고 ‘한국작가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개꼬리 3년 묵힌다고 해서 황모가 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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