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조정래의 작품에 담겨있는 사상의 독
조정래의 작품에 들어 있는 독의 중량과 성분은 어떠할까. 그의 강한 전라도 말은 실제로는 전라도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옛말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북한의 이질적인 말과 같이 들려진다. 구태여 조정래가 현지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는 구어체의 전라도 사투리를 고집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그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경상도와 전라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문학은 뚜렷한 구분이 있다. 작품에 내포되어 있는 특성 때문이다.
1. "태백산맥" 그 한풀이 문학의 특징
한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조정래가 사용하는 개념과 일반적인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조정래가 말하는 한의 개념은 의식화의 첫 단계로서 저항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서의 한이다. 한이 품어지면 분노하게 되고 분노하게 되면 저항이 나온다. 따라서 조정래의 심리적인 전쟁을 유발하는 한을 말한다.
이미 조정래는 남한의 지식층들을 선동하여 반공주의와 심리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박현채는 총을 들고 빨치산이 되어 전쟁을 했으나 그의 제자인 조정래는 필을 들고 전쟁을 펼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지 알맹이는 같다. 그러면 보편적인 한국인이 정의하는 한의 개념은 조정래가 말하는 한의 개념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정철우 기자는 박경리 선생의 '한'과 꼴찌팀 팬의 '삶'이라는 기사에서 박경리 선생이 정의하는 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이 보편적인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한의 개념이다.
"한(恨)을 한때는 퇴영적인 국민정서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일본은 한을 '우라미'라고 하는데 우라미는 원망이에요. 원망이 뭐냐, 복수로 가는 거예요. 일본의 원망이나 복수가 일본 예술 전반에 피비린내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복수로, 그게 어디로 가냐면 일본의 군국주의로 가요. 우리의 한(恨)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내가 너무 없는 것이 한이 되어서... 말하자면, 내가 뼈가 빠지게 일해서 땅을 샀다. 내가 무식한 것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것이 너무나 한이 되어서 내 자식은 공부시켰다. '미래지향'이거든요. 소망이거든요. 이게 절대로 퇴영적인, 부정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 2008-05-13 11:03)
박경리 선생이 내린 한국인의 한에 대한 정의는 정서적으로 문학적으로 완벽한 정의이다. 일제치하와 6.25를 거치며 어머니의 너른 가슴에 품어진 한은 못 배운 한이며, 못 먹인 한이며, 더 잘 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으로 어머니의 가슴 속에 포원된다. 포원된 한은 분노의 에너지가 되어 자식을 잘 공부시키고,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출세시키는 미래지향적인 동력으로 승화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은 못 배운 국민들이 힘이 없어서요, 6.25 동란이 일어난 것 역시 그러하다.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것도 천운이니 누가 잘하고 잘 못 하고를 떠나 내가 못 배운 한으로 내 자식을 잘 가르쳐 출세를 시켜 주겠다는 몸뻬 정신과 파마정신으로 자식을 가르쳤다. 휴전 후 이승만 정권에서 실시한 초등학교 의무교육에 해당 학생 전체의 97%가 입학했다. 과거를 붙잡고 탓할 시간에 뼈 빠지게 일해서 자식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조정래가 정의하는 한은, 분노의 에너지를 복수로 표출되도록 충동하며 과거 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한이다. 그리고 잘 못 했으니 사과를 하고 처형을 당해야 마땅하다는 한풀이로 끌고 나간다. 그래서 이 사람 조정래의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천불이 나고 친일파들을 찾아내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한국 문학 작품은 순수문학과 이념적 문학 학술적 문학으로 구분된다. 순수문학은 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구조는 권선징악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념적 문학은 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선동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학술적 문학은 이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냉정한 분석과 함께 판단을 요구하는 비판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문학이 한국의 현대 문학의 성질을 특정화 시켰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비롯한 조정래 문학은 이념적 문학이다. 좌파 자신들에 의해 분단문학으로 특정화 되어 있다. 의식화를 목적하고 있는, 그러니까 좌파로 편향되어 있는 비이성적 작품이며 이데올로기적 작품이다. 과거 공산주의가 죽기 전에 공산주의 사상을 유토피아적 감상으로 보았던 좌파 문인들이 공산주의를 지식으로 포장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 작품은 이성적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사멸하고 난 뒤에 남은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이며 그것이 이들 좌파 문인들의 실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는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구나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난 뒤에는 이들 좌파들의 작품은 따로 분류하여 의식화의 목적을 가진 불온적 작품으로 분류된다. 좀 더 짚어 보자.
모든 문학의 목적은 인간의 가치관을 결정지어 주며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목적을 지닌다. 작품을 통해서 권선징악이 나타날 때 정상적인 논리가 생긴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북한의 김일성을 찬양하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나 의식화를 목적하고 쓴 작품에서는 비정상적인 논리가 생긴다. 비정상적인 논리는 곧 문제의식이다. 역사가 정확하게 웅변하고 있는 진리는 김일성에 의한 남침이다. 이로 인해 생긴 비극은 북괴로부터의 방어 혹은 자유 수호를 위한 공격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탄생된 비극이다.
그런데 조정래는 비극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대신 결과를 원인으로 삼는 역설(paradox)을 채용했다. 이른바 말 타기, 물 타기로 부르는 수단이다.
패러독스의 채용은 비정상적인 논리를 유발시켜 문제의식을 발생시키게 만드는 언어의 독이다. 이 독에 당하면 원인과 원인자에 대해서는 면책을 해 주고 결과와 결과자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역설적 논리가 생긴다.
분명 원인자는 김일성이며 원인은 6.25 사변이다. 김일성에 의한 6.25 사변이 도발되지 않았다면 민족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은 아예 탄생되지도 않았을 일이다. 문제는 김일성이며 김일성이 남한을 집어삼키기 위해 일으킨 6.25 전쟁에 있다.
그러나 보라.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는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한국인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살해당한 한국인이 북괴군이든 국군이든 아니면 간첩이든 빨치산이든 간에 미국인에게 살해당한 희생자가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북괴군과 빨치산에 동정심을 유발시키고 동시에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만든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이 가미되어 있는 작품에는 포플리즘적인 요소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미군이 소녀를 강간하는 장면이나 여염집 부인을 겁탈하는 장면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는 것이며 이 장면들이 극점(크라이막스)을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정래의 작품인 태백산맥이 그러하고 아리랑이 그러하며 한강이 그러하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속한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미군은 잔인한 강간범으로 등장한다. 이는 포플리즘의 하나로서 피해자에게는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고 가해자에게는 증오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이다. 6.25 사변 이후 지금까지 북한이 써먹고 있는 공작용 수법이다. 그런데 이제는 좌파들이 북한을 대신하여 남한 국민들에게 공작하고 있다.
가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지정해 줄 때, 작가들은 종종 작품을 통해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한풀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 또 그런 유혹을 느낀다. 아무래도 행복을 노래하는 것으로 인해 진부함을 느낄 때, 문제작을 하나 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지식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좌익사상이 들어 있는 소위 분단문학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순수문학의 범주에는 좌익사상이 끼어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순수문학작가들에 의해 분리되며 좌익사상이 의도적으로 배설되어 있는 일체의 작품은 거부된다.
조정래는 그의 작품 태백산맥을 통해 한국인의 문화를 ‘한의 문화’로 정의했다. 한이란 감정의 최종점이며 이성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감정의 휴화산이다. 그야말로 분노라는 마그마의 용틀임만 있으면 폭발해 버릴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는 감정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한이란 이성으로 조절이 되지 않는다. 다만 환경이라는 조건이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의 1부를 한의 모닥불로 출발하면서 ‘한’의 중심에는 전쟁이 있고 전쟁의 중심에는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조정래는 일제치하의 맺힌 한을 북한에서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풀어 주었는데, 남한은 오히려 친일세력을 지도층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펼침으로 민의 한이 그대로 남아 ‘한의 불씨’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한의 모닥불을 지핀다.
작가의 양심에 의하면 친일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국민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던 자들이 바뀐 세상에서 심판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진정한 해방이란 과거의 한을 푸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다. 천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법이며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바뀐 세상에서 약삭빠른 처세로 다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그 자손들에게까지 대물림 되는 세상이라면 정의가 어디에 있는가. 이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작가는 속이 뒤집혀 혁명적인 해방을 꿈꾼다. 북한이면 어떻고 남한이면 어떤가.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보고 싶다. 진정한 해방은 과거의 한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점으로 ‘한의 모닥불’을 지피며 매운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민족주의는 일제에 기대어 동족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아 호의호식했던 민족의 역도들에 대해 북한식의 응징이 정의의 칼로 둔갑된다. 정의의 칼로 둔갑된 이유는 적어도 감정의 뿌리에 맺혀 있는 한을 납득할 만한 수준까지는 처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맺힌 한이 풀리겠는가. 한 시대가 종결되고 새 시대를 받아 들어야 한다면 과거의 불의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해결하고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민족의 가슴에 남은 한을 풀지 않고서는 새 시대를 향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조정래는 다시 북한의 모럴과 남한의 모럴 사이에서 갈등하며 6.25를 해석한다. 6.25는 과거의 한을 털고 가자는 김일성의 모럴과,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이니 과거가 어찌 되었던 현재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가자는 이승만의 모럴이 충돌한 것으로 해석했다. 일본인 보다 일본인에게 충성심을 인정받기 위해 더 악랄했던 친일파들에 의한 고초와 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미국에서 편히 살았던 이승만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국내사정에 문외한인 이승만에게 있어서 인텔리와 부자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한국의 현실에 취약한 이승만은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능력자를 선호했다. 반면 김일성은 사상의 문제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두고 친일사상을 숙청의 대상자로 삼았다.
따라서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에게 입은 한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민중의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고 사상을 중시한 김일성은 친일파들을 가차 없이 처단함으로 민중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을 풀어 주었다. 남로당들에게 김일성이 지지를 받았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 맺힌 한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이 가지고 있는 지형적인 특성은 조정래에 의해 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의 정신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태백산맥은 패배한 북괴군의 잔당들이 북으로 도망할 때 사용한 이동경로이며 빨치산의 주무대 였다. 따라서 태백산맥을 한국인의 정신으로 말하는 자의 정신에는 이러한 배경이 박혀져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태백산맥이 한국인의 정신인가?
태백산맥은 북으로부터 뻗어내려 지리산에서 끝난다. 태백산맥의 특징을 통해 지리산이 남로당과 빨치산의 종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태백산맥의 흐름이 끝나는 지리산에 전라도가 있다. 지리산은 높이가 높은 만큼 계곡도 깊다. 전라도민의 한도 깊고 높다는 것을 암시하며 조정래는 동학의 발상지인 전라도를 자극한다.
전라도민은 곡창지대와 염전을 가지고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이 있다. 지리적인 특성이 원인이 되어 전라도는 항상 착취의 일번지에 해당되었다. 거대한 곡창지대는 남북한을 먹여 살리는 일등공신이었으나 동시에 찬탈의 표적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제나 전라도민은 착취를 당하는 쪽이었고 빼앗기지 않기 위한 항거도 빈발했다. 왜구의 침략과 항거, 동학의 발생 등 항거의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권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전라도민의 불행이었다. 특히 전라도는 먹거리가 풍족해서 먹는 인심이 다른 지역과 남다르다. 남한 전체를 통 털어 가장 작은 생활비로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텃세도 남다른데 이는 타지에서 온 타 지역민들에게서 언제나 좋은 꼴을 못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당시 공출의 정도는 악랄하며 비극적이었다. 일제의 악랄함과 비극적인 착취의 정도는 곡창지대인 전라도지방에서 가장 크고 빈번히 나타났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라도의 인심마저 완전히 바꾸어 놓을 정도로 극심한 공출에 땅까지 빼앗긴 채 고향을 등지고 도시에서 막일을 하는 동안에 뼈에 사무친 한은 얼마나 되었을까 능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세상이 바뀌면 정부에서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줄 알았다가 막상 세상이 바뀌었을 때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 친일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세상을 살기가 싫을 정도였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를 작품화한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전라도민들의 한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주어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고 충동하여 분노가 일어나게 하고 복수심으로 팽창하게 만든다. 지나간 역사이니 잊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묻어 두었던 것을 조정래는 파고 할퀴고 찔러대면서 그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저항함으로 전라도민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선동한다. 충동을 푸는 것이 아니라 한이 아니라 피에 목말라 하는 흡혈귀의 욕망적인 한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2) 태백산맥의 정신 조명
조정래의 분석에 의하면 일제치하 36년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소원의 한을 품게 했고 해방 후 민주주의를 놓고 소련적 민주주의(공산주의)로 가느냐, 미국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로 가느냐의 선택을 놓고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6.25 동란을 겪게 되면서 한국인의 중심에는 한의 문화가 생성되었음을 지적한다.
왜 분단이 되었는가? 사상으로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소련적 해석과 미국적 해석이 각각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북측의 소련식 해석을 따르는 좌파지도자들과 남측의 미국적 해석을 따르는 우측지도자들 간의 간극으로 인하여 해결 불가능의 대립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간헐적인 소모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지도자와 달리 국민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북한에 살고 있으면서 남한의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흠모하는 국민의 수가 남한에 살면서 이데올로기의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을 흠모하는 국민의 수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는 6.25 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 북한에 살고 있던 국민이 대거 남한으로 피난 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서는 오히려 남한에서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소위 빨치산들의 인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작가의 작업에 의해 탄생되어진 문학작품은 작품으로 이해하겠다는 경계점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타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상이라면 그리고 그 사상이 분단국가의 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사상을 담았다면 귀추가 어찌 될지에 대한 예측은 하고 썼을 터이다. 조정래 작가의 작품을, 작품일 뿐이라고 해도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에서 교과서 중의 하나로 채용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작품으로만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이적단체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이 이적단체에게 유익을 주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붙어 있는 비평가들의 비평은 찬양일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과연 이 작품에 대하여 정당한 비평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히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이다. 물론 그것이 출판사의 의도에 의하여 일부내용만 발췌되어 사용되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과정을 통해 비판되지 않은 작품의 비평이란 있을 수 없다.
최근에 들어 방송사들의 드라마를 보면 문학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오직 상업주의에 일조를 하는 정도로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근친상간이 존재하고 성폭력이 조장되어지고 아버지의 존재는 희화되어지고 조소거리로 분장되어진 채로 왜곡된 내용이 스크린을 점령하고 있다. 이는 곧 전통적인 가치관의 형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아버지 문화가 붕괴되었다는 말이 되겠는데 아버지 문화란 최소한의 권위를 말한다.
권위가 무너졌다는 말은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말이겠는데 그 존재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것은 성공지상주의이며 경제이다. 성공을 하면 돈이 따라오기 때문에 성공지상주의는 물질만능주의를 말한다. 물질만능주의가 고착되면 정신세계는 사멸되게 되어 있다. 성공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가정에 도입되어 성공한 아버지는 존경을 받았고 성공하지 못하거나 혹은 직장에서 밀리거나 등의 이유로 도태된 아버지는 즉시 존경심을 잃었다. 생산의 능력이 없는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자식과 같은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소비의 문제에서 자식과 경쟁해야 하는 한낱 소비자에 불과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조정래가 규정한대로 한국인은 한을 가진 시대의 문화인이라는 정의가 맞는 말인가? 그래서 그 한을 풀기 위해 한국인은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문학이 스크린과 만나면서 순수문학에 대한 경계점은 와해되어 버리고 오직 경제논리에 따라 문인의 정체성마저 허물어진 듯 보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순수시대가 있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고집스런 문인선배들은 자신의 원고를 월간 문예지 이상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판하는 출판사 외에는 원고도 주지 않았다.
문화촌의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빨간 벽돌집에 살던 얼마 전에 타계하신 박화목 선생은 순수문학파 문인의 정의를, 상업적 의도로 사용하는 일간지나 주간지 등에 투고하지 않고 월간 문예지 이상에 투고를 하는 문인으로 한정했다. 선생은 물질과 담을 쌓고 오직 문학의 발전과 후배문인들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있는 글을 고집스럽게 써내는 순수문인을 존경한다 했으며 순수문인의 선봉으로 소설가 이효석, 김동리, 한수산, 황순원 선생 정도를 꼽으며 순수문학의 경계와 지평을 국한했다.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3) 태백산맥에 차입된 기독교는 서양 오랑케의 종교로 묘사
태백산맥에서 조정래는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들의 종교라는 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김교신과 무교회주의를 찬양하며 서민영과 황순직을 대비하여 공산주의식 기독교관을 설파했다. 내용을 보자.
"드십시오. 선암사 경내 큰나무 그늘에서 잘 자란 것인데다가, 한 스님의 정성까지 깃든 찹니다." 서민영이 찻잔을 들며, 편지를 읽고 나서 처음 한 말이었다.
“아니, 크리스천으로서 우상숭배자들과 관계를 하십니까!"
황순직은 차를 마실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정색을 하고 있었다. 서민영은 혐오감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장 목사를 생각했고, 그의 왜곡된 편협성 또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우상숭배…… 내 종교가 소중할수록, 신도가 확장되기를 바랄수록 남의 종교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헐뜯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여 우상숭배라고 매도한다면, 그럼 우리 기독교가 세우는 십자가는 뭔가요. 부처님이나 십자가는 각 종교의 상징물이지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상을 숭배치 말라 하심은 인간 영혼을 사악하게 만드는 마귀적 우상을 가리킨 것이지, 엄연한 경전을 가지고 내세관을 확립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지칭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비난하라는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불교는 그뿐만 아니라 미신적 기복이나 일삼는 집단 아닙니까."
“그래요오? 그러면 우리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는 뭡니까. 우리가 밤낮으로 외는 주기도문이 바로 기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 무엇 하여 주시옵고의 계속 아닙니까. 모든 종교는 기복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절대함 앞에서 인간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의 종교를 비난하고 헐뜯음으로써 우리 종교의 위대성을 내세우려는 착각과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비열성을 버려야 합니다. 김교신 선생께서 외롭게 실천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 땅의 기독교에 미국식 물량주의와 저돌성이 감염된 것을 치유해서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종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량주의는 무질서한 교회 짓기였고, 저돌성은 바로 다른 종교의 무조건적 배척과 전통 생활양식의 조직적 파괴였습니다.
이 땅의 목회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서양 사람들의 저의가 감추어진 말을 그대로 따라 제사를 지내는 것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고사잔치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심지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예를 표하는 것까지 우상숭배냐 아니냐로 지금 유치하고 졸렬한 입씨름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럼, 이 땅에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전파시킨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엄연히 그들 풍습대로 부모 죽은 날 모여 앉고 묘지 찾아가서 절하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나 마치고는 뻔질나게 파티를 해대고, 전쟁을 할 때나 식민지를 약탈할 때나 그들은 철저하게 국기를 모시고 다니며 경례를 붙였습니다.
기독교 본고장 나라들에서는 우상이 아닌 게 왜 우리한테 와서는 우상이 되어야 합니까. 김교신 선생께서는 일찍이 그 저의를 간파하신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한 민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켜 의식을 완전히 속국화 시켜 버리려는 강대국의 저의를 말입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민족종교화를 꾀했던 것은 그 음모에 맞서기 위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황순직은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차를 마시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다보니 못 견디게 목이 말랐던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공박할만한 말이 없는데다가, 관한 트집을 잡았다가 용건은 아직 꺼내지도 못한 채 인상만 나쁘게 박힌 것이 몸이 달았다. 꾀제제한 차림에 볼품없는 생김에서 그런 강단지고 아구맞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미리 귀띔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않은 장 목사가 원망스럽게도 했다.
“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 편지에 적힌 일은 어떻게……"
“예에, 월남을 하셨다고요?"
서민영은 차로 혀를 축였다.
“그 빨갱이놈들의 탄압으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 아까운 교회 다 버리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갱이라면 아주 치가 떨립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사탄입니다. 이북 목회자들은 예수님 다음가는 수난을 당한 겁니다." 말이 진전됨에 따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가는 황순직을 서민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차로 혀를 적셨다.
“그럼 반공주의자가 되셨겠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내 원수, 아니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원숩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공산주의가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사탄이니까 그렇지요."
“생각이 분명하시군요."
서민영의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스쳐갔다. ‘단순’이라고 나오려는 말을 ‘분명’이라고 바꾼 것이었다.
“성경 말씀은 예언이니까요."
저리도 단순한 사람은 얼마나 속이 편할까. 그러나 이 땅의 기독교가 문제로구나. 서민영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그와의 자리를 파할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서민영은 생각했다. 시계로 눈길을 보냈다. 열두시가 이십여분 남아 있었다. 밥 때까지 일손을 잡기도 어중간하고, 먼 길을 온 손에게 밥은 먹여 보내야 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게 성경 말씀이 사탄이라서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건 종교가 저지른 잘못 때문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종교들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타락한 결과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인간 사회구조를 재편성하고자 하는 논리를 전개한 마르크스한테 부정당한 겁니다."
“아니, 서 선생은 그럼 막스 그놈이 옳다는 말입니까!"
황순직은 말허리를 자르며 버럭 소리쳤다. 서민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순직을 바라보았다. 서민영은 더 이상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비록 인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예수의 품안에 든 목숨이었다.
“말을 다 들어보시고 말씀하셔야죠. 다 제 생각일 뿐이니까 더 말하지 않도록 하지요."
“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막스 그놈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바람에 제가 실수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일방적인 얘길 한거지요. 목사님이 필요로 하는 얘긴 젖혀놓고 말입니다."
“예에, 그 일은 어떻게 될지……"
황순직은 반색을 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편지에는, 황 목사님이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하시고자 한다고 썼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요."
“예, 그 말 그대로지요. 목회활동을 하자면 교회가 있어야 되니까, 조그맣게 하나 짓든지, 맞춤한 건물이 하나 있으면 사들일 작정이지요."
우문현답이 될 것이기에, 어떻게 그런 경제력이 있는지 서민영은 묻지 않았다.
“여긴 삼십구년에 세워진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꼭 십년이 됐군요. 그런데 신도라는 것이 오십평 정도에 반도 안 차 운영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아니, 인구가 얼만데 그 꼴이란 말입니까. 그건 전적으루 전도활동에 문제가 이서요."
황순직의 말은 갑자기 사투리 억양이 심해졌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곳 일대는 토착화된 불교세가 뿌리 깊은데다가, 오래도록 사람들은 절박한 생존문제로 시달리고 허덕여오면서 신에 눈 돌릴 여유도 없고, 신을 믿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황 목사님을 위해서나, 현존 교회를 위해서나, 이곳은 피하시는 게 현명한 처살겁니다. 아무래도 농업지역이 아닌, 대도시라야 개척이 쉽잖겠습니까. 왜, 서울 같은데 계시잖고 이 멀리까지……"
“여북했으믄 예까지 왔갔시요. 서울엔 교회가 천지고, 그것도 다 끼리끼리 해먹고 말아요."
또 말허리를 자른 황순직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그의 한마디에서 월남한 교회들 간의 난맥상과 기존 교회들과의 갈등 같은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십육년과 칠년, 이 년 동안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던 교회짓기는 바로 월남한 목사들의 터잡기였다.
그에 따른 미군정과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 사회적 의혹과 비판이 생겨났다. 사실 군정은 월남한 목사들을 상대로 일본 대종교의 회당들을 넘겨주는 특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낯선 땅에서 안착이 급선무였고, 미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필연적이고도 원색적 증오심을 가진 장래성이 확실한 조직세력이었다.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주고받는 밀월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북청년단이 그랬던 것처럼, 서민영은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성직노동을 통한 단계적 안정을 꾀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쉽게 타협해 스스로 정치의 올가미를 쓰는 것을 걱정하고 우려해 왔었다. 미군정과의 그런 관계는 물론 월남 기독교인들한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서민영은 이 땅의 기독교 장래를 우려하며 김교신 선생을 생각했고,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절감했으며, 그럴 때마다 ‘한 알의 밀알’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농장 일에 파묻혀 들고는 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순직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점심이나 잡숫고 가셔야죠. 밥 때가 됐습니다."
열두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또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황순직은 거칠게 마루를 내려갔다.
“글쎄, 밥 때에 그냥 가시면 됩니까."
서민영은 다급하게 뒤따랐다.
“전 지금 밥 먹는 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황순직이 돌아서며 말했다. 서민영의 눈앞에는 노기에 찬 한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루를 내려섰다.
“괜히 실례했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예, 편히 가십시오."
서민영은 황톳길을 따라 멀어져가는 황순직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서민영의 가슴에는 까닭모를 슬픔이 차올랐다. 주여…… 서민영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태백산맥>(한길사) 4권 중에서
조정래의 작품에서는 미국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들은 철저히 오랑캐적 문화로 묘사되고 있다. 주지승의 아들로 태어나 불교인으로 성장하여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조정래의 문화적 배경에서 기독교는 대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미국의 종교로 등식화하며 증오하는데 열중하며 가히 병적으로까지 보인다. 세계의 3대 종교인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목사를 돈에 눈이 먼 자로 공격하며 기독교를 비하시키고 있다. 이는 조정래의 역사관이 이미 뿌리까지 좌경화되어 역사에 대한 수평 감조차 상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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