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중국의 변화와 문화
1. 세계정세 속의 중국의 위치
(1)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경제시대로
1)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적 한계
2) 세계적 맹주로 부상한 중국
(2) 무섭게 변하는 중국의 위상
1) 소련의 붕괴로 얻은 반사이익
2) 맹주로 부상한 중국의 위상
2. 역사와 문화의 수정(동북공정과 대국굴기)
(1) 역사의 수정
1) 동북아 역사 수정
2) 한국의 대응
(2) 문화의 수정
1) 대국굴기
2) 비판에서 비평으로 가고 있는 중국
3) 종교적 성격의 역사관과 중국의 문화
4) 되살아난 공자
1. 세계정세 속의 중국의 위치
(1)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경제시대로
20세기에 들어와 동서의 이데올로기의 전쟁에 휘말렸던 세계는 경제력이 최우선이라는 교훈을 남기고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세계정세는 곧 바로 경제시대로 돌입하여 21세기는 FTA(자유무협협정)로 귀착되었다.
FTA시대로 전이된 가장 큰 원인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해체로 공산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연합체 해체로 각각의 공산주의 국가로 떨어져 나온 공산주의 국가는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다. 먹고 사는 원초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니 영토 분쟁이니 국경분쟁이니 사상전쟁 등의 문제는 우선순위에서조차 밀려났다.
1)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적 한계
오랜 내전의 사상전쟁 끝에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는 공산국가로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치룬 대가는 혹독했다. 자유민주주의와 단절되면서 세계시장에서도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세계시장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시장이 협소한 공산주의체제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해 간신히 숨을 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낙후되어 있는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은 상품의 양과 질적인 면에서 서로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따라 무역의 본질인 수입을 통한 수출의 동력을 창출하여 발전시키는 기본적 경제의 시스템마저 붕괴되었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경제해결을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가 소련 연방공화국을 해체하고 개별국가로 돌아섰다. 그동안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이룬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공산반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의 맹주인 러시아가 소비에트연맹을 해체시키고 동독마저 서독에 흡수된 이후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로부터의 지원은 커녕 고립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고립상태에 빠진 이들 국가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국의 사정을 살펴보니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팽개쳐 버려두었던 국가 형편을 살펴보니 한심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오랜 내전과 공산주의로 인한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경제 동력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국민의 삶과 질은 형편없이 추락하고 악화되어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있는 능력조차 되지 못했다.
원인도 결과도 하나, 경제력이다. 한 번 추락한 경제는 늪과 같아서 일단 동력이 소진되어 고갈되면 자력으로는 동력을 발생시킬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런 경우 주변국의 전쟁 등의 특수를 일으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자력으로는 경제의 동력을 만들어낼 수 없다. 과거 일본이 패전국의 위치에서 선진국까지 갈 수 있는 성장 동력을 창출해낼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도 한국에서 625 동란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국에 6.25 동란이 터지지 않았다면 일본은 이처럼 빠른 시간에 선진국에 진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들은 추락한 경제력의 창출을 위해 공산주의 사상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까지 몰려 있다. 일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의 개념을 수정하여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실용적 노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상대개념으로 출발한 공산주의가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뜻은 사실상 공산주의를 버리고 간다는 뜻이기에 부담스럽기는 해도 이미 중국의 모형이 있기 때문에 중국식 공산주의를 모델로 채용하고 있다.
중국식 공산주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홍콩을 통해 습득된 자본주의의 장점과 통제시스템으로 가동하고 있는 공산주의 체재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이중적인 구조이다. 중국은 양쪽의 상반되는 두 개의 가치를 절충하여 큰 틀에서는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작은 틀에서는 자본주의를 허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비근한 예를 들어 설명하면 필요한 물의 양을 얻기 위해 원천이 각기 다른 두 개의 하천을 인공운하로 연결한 경우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높낮이가 다르고 깊이와 흐르는 물의 양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물줄기를 하나로 합칠 때 상식과 현실은 전혀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상식적인 논리는 두 줄기의 물줄기를 하나로 합쳐 놓으면 물의 양은 서로가 보완되어 수평이 맞아지고 두 물줄기가 합해짐으로 해서 물의 세력이 강해짐으로 원하는 대로 물의 양은 증가될 것으로 예상하게 되어 있다. 작은 물줄기는 큰 물줄기와 연결되어 있음으로 이전보다는 더욱 많은 물의 양이 유입됨으로 물의 양과 깊이 그리고 폭이 넓혀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론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러나 현실적으로 두 개의 물줄기를 합쳐 놓았을 때, 오히려 큰 물줄기는 작은 물줄기에 흡수당하면서 세력이 줄어들게 되어 있고 기왕의 작은 물줄기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온다. 왜냐면 물은 계속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증발을 계속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물처럼 많은 곳에서 작은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있는 쪽의 것을 계속 퍼부어도 받는 쪽에서 경제를 일으킬 능력이 되지 못하면 경제는 창출되지 못하고 오히려 받은 것을 까먹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내전을 통한 흡수 통일은 경제의 원리에서 가장 위험한 요인으로 규정되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한다. 결국 공산주의 혁명이론에 의한 통일은 목적만 달성했을 뿐, 경제력 창출을 내지 못하는 통일로서 총체적인 실패로 간주되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흡수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된다. 1만 불 소득에 불과한 동독과 3만 불의 고소득을 얻고 있는 서독이 통일 되어 이 둘을 합쳐 놓으니 양쪽에서 흡수하고 흡수당하고 해서 삶의 질은 반 토막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또 오랜 내전의 영향을 받은 필리핀 역시 경제후진국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동아시아 국가 몇 개국이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국가 경쟁력을 상실하는 동안, 미국은 자본패권주의라는 지탄을 받으면서도 전 세계를 권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한반도 문제에서는 여전히 제왕적인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고 중동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이란 전을 통해 소련의 영향력을 축출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란 전에서 미국은 최첨단 무기를 동원하여 이란의 전투력을 초토화 시켰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란은 중동 권에서 발언권이 제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이후 고유가를 발판으로 다시 회복했다.
이란 전을 속전속결로 마칠 수 있었던 요인은 최첨단 무기 사용 외에도 이스라엘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시오니즘 정책을 펼치며 팔레스틴 지역에서 아랍인을 축출해내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고 있던 중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강경정책과 친소정책으로 미국에 맞서는 이란을 응징하고 석유자원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이란 전에서 미국이 승리함으로 이스라엘의 동력은 더욱 성장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대치중에 있는 아랍에미리트는 이스라엘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경제력이었다.
이로 인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현대전은 막강한 경제력이 동원되지 못하면 패배로 이어진다는 사실상의 교훈을 미국과 이스라엘을 통해 얻었다. 전쟁도 돈 있는 국가에서나 할 수 있는 특권이다.
2) 세계적 맹주로 부상한 중국
시장경제를 개방하고 난 이후 계속된 9%대의 고도성장을 발판으로 중국은 일약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세계의 판도는 중국을 위해 존재하는 듯 판은 중국 쪽으로 기울어졌다. 세계의 경제가 고부가가치 사업의 창출로 인한 고가의 전략을 구사하는 동안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졌고 소비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중국 상품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초저가의 상품은 스페어 혹은 짝퉁이라는 개념으로 흥미를 끌며 소비를 이끌어 내었고 현재는 세컨 상품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는 중국산 상품이 한국의 가정에 어느 정도까지 파고들어 왔는지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장난감의 90%가 중국산이었다. 식탁에서는 약 80%가 중국산으로 판명되었다. 쌀과 야채를 빼고 나면 거개의 양념이 중국산이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중국산의 가격은 한국산에 비해 1/5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절반 정도의 가격대까지 치솟은 상태이다. 특히 한국산과 육안으로 식별이 되지 않는 일부 품목은 90% 이상이 한국산과 혼합되어 한국산으로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10년 전, 중국이 개방되면서 한국의 무수한 기업들이 공장을 이전했다. 일 년에 최고 3000개의 기업이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는 통계청의 보고까지 나왔었다. 이중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기업은 거의 없고 중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공장과 설비는 물론하고 기술력까지 넘어갔다. 2005년과 2006년 중국 당국의 대대적인 외국부실기업 정리와 외국기업에 대한 세금 부과로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던 한국의 중소기업들은 손을 털었다. 또 이들 기업에 근무를 했던 한국인 대다수가 중국 상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중간상인으로 전락했다. 결국은 이들로 인하여 중국산 상품의 가격은 치솟아 올랐고 이에 따라 저가의 상품에 밀린 국내기업들이 주저앉는 악순환의 고리가 발생했다.
현재 세계는 가히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국은 세계경제 시장의 주역이 되었다. 조선업을 비롯한 철강 산업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세계의 철강시장은 중국으로 쏠리고 있는 중이며 전 세계의 고철 값은 가격이 치솟았다.
뿐만 아니다. 전 세계가 고유가의 진통을 겪는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중국이 소배하는 원유는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고 있으며 원유의 비축을 위해 확보하는 물량이 고유가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중국의 경제성장은 세기적인 것이며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고유가는 또 다른 중국의 영향력을 키워주고 있다. 고유가로 인해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는 사이 중국은 곡물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고유가로 인해 대체에너지원이 필요한 세계 각국에서 거대한 땅에서 생산되는 중국의 대두와 옥수수는 바이오디젤의 원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대두와 옥수수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중국은 세계시장에서 곡물가를 좌지우지하는 식량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현재 세계시장은 중국의 위안화 절상에 따라 세계주식시장이 요동칠 정도로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변화, 중국의 정책은 세계의 판도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될 전망이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중국의 정책과 정책의 방향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까지 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주변국가와의 영토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주변국의 역사와 문화에까지 손을 뻗치며 역사를 왜곡하는 동시에 백두산을 유네스코에 등록하는 등으로 영토 확장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이렇듯 무섭게 변모하고 있는 중국의 변화에 대하여 대한민국은 너무도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6자 회담의 실체에서도 드러나듯 남한은 북한에 대한 책임만 어깨에 짊어지고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한반도와 주변국의 평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국가라는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2) 무섭게 변하는 중국의 위상
1) 소련의 붕괴로 얻은 반사이익
이제 세계는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총성 없는 경제 전쟁이다. 공산주의가 밥 먹여 주지 못한다는 현실성을 이유로 패권주의를 지향하던 소비에트연맹공화국은 해체되고 구소련은 러시아로 돌아갔다. 1991년 12월 11개 공화국이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결성을 합의함으로써 소련은 완전히 해체되고 1992년 1월 1일자로 러시아를 비롯한 각 공화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러시아라는 옛 이름으로 돌아간 러시아는 패권주의를 지향했다가 실패한 만큼 실패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미국과의 패권주의 경쟁에서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여 계발한 첨단의 무기는 골칫거리로 남게 되었다.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계발되었던 첨단의 무기는 단순국가로 돌아간 러시아의 현실에서 가장 처리 곤란한 걸림돌로 남았다. 러시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판을 다시 짜야 했다. 건국 이래로 가장 힘든 시기이며 가장 뼈아픈 시기였다. 패권다툼 시기에 군은 최고의 지위를 누렸으나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를 포기한 러시아에서 군은 물먹는 하마에 불과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서 군인의 월급과 정부 공무원의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며 일시적인 무정부 상태까지 직면했다.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첨단의 무기 밖에 없었고 무기를 처분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군인의 수도 줄어 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무기를 운영하는데 소요되는 재정도 줄일 수 있다는데 정부와 군수뇌부가 합의를 했다. 보유하고 있던 핵잠수함을 비롯하여 최첨단 무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조차 없어 러시아는 일시적인 국가파산상태에 놓이게 되자 세계시장에 구소련의 첨단무기들이 바겐세일 품목으로 등장했다. 고르바초프 시절 이미 구소련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은 포기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물러나고 옐친이 집권하면서 심각한 재정난은 무기를 팔아 국가재정에 투입했다. 정책에 의해 최우선적으로 예산이 투입되었던 공들여 개발한 첨단무기가 재래무기 값으로 판매되었다. 러시아의 첨단 무기에 눈독을 들인 일부 국가는 운용할 과학적 능력이 없어서 구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다. 중국의 무기체계는 자체 계발한 재래식 무기와 소련에서 구입한 첨단무기로 무장한 이중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첨단무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바겐세일되는 첨단의 무기를 하나 둘 사들였다. 소련은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들여 첨단의 무기를 계발하기만 했고 중국은 폐기처분 되는 고철 값으로 그것을 구입함으로 무기구입비와 무기계발에 소요될 국방예산은 엄청난 액수로 줄일 수 있었다. 그것도 평소에 중국군이 눈독을 들여왔던 첨단무기 구입을 위한 국방계획에 의해서였다. 몇 년 사이에 소련의 무기는 중국의 것이 되고 말았다.
소련의 패권주의가 실패한 반사이익은 몽땅 중국에게 돌아갔다. 동양의 맹주로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중국은 소련제 무기로 국방력을 강화하여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패권자로 우뚝 섰다. 러시아의 핵잠수함 기지인 블라디보스톡 항은 중국에 팔아버린 핵잠수함의 수리 기지가 되고 말았다.
2) 맹주로 부상한 중국의 위상
중국의 공산주의는 체제는 공산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경제는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한 독특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는 13억에 달하는 거대한 인구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중국에서 2000년 11월 1일에 조사하기 시작한 제 5차 인구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12억 9,533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인민일보, 3월 28일)개월 동안 조사된 인구수는 산악이나 정글에서 타잔과 같이 생활하는 소수부족에 대한 집계는 빠져 있을 듯 하다. 일부에서는 14억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13억이나 되는 인구와 광활한 국토는(남북으로 5500km, 동서로 5200km) 강력한 정부의 막강한 통제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체제로는 중국의 실상에 맞지 않는다는 인식 하에 중국정부에서는 공산주의체제에서 나오는 독재를 통해 국민을 다스리고 있다. 동시에 공산주의체제의 분배적 경제정책은 실패했다고 보고 시장경제원리의 장점을 도입했다. 도입된 시장경제원리는 통제가 필요할 시 당국에서 적절히 개입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중국식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있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기존의 공산주의 국가와는 협력의 구조로, 자유주의국가와는 경쟁원리로 접근함으로 양쪽 진영을 포괄하면서 경제적 유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동시에 소련이 무너짐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중국이 소련을 대신해서 공산주의 국가의 맹주가 되어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음을 말한다.
중국이 경제력에서 탄력을 받게 되자, 세계의 판도는 중국 중심과 미국중심으로 나뉘었다. 중국은 과거 역사를 근거로 시오니즘에 성공한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동북공정에 나섰다. 인접주변국의 역사 중에서 중국의 역사와 중첩되는 부분의 역사를 취합하여 재처리하여 중국의 역사적 근거로 삼겠다는 의도이다. 기대되는 효과는 중국의 국토를 확정하고 인접국인 한국이 만주협약을 빌미로 만주반환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일본과 청나라의 만주협약은 2009년이 되면 100년이 됨으로 자동적으로 소멸된다. 영토분쟁의 경우에 100년 동안 점유하고 있다면 국제통례상 점유국의 영토로 인정을 해주도록 되어 있다. 이 경우 역사적 증빙자료가 불확실하고 점령하고 있는 100년 동안에 영토주장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영원히 점령국의 영토로 간주된다.
동북공정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 측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고 견고히 해 두자는 의도로 2002년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1999년 변강사지 연구로 시작된 이 작업은 역사적 증거물이 희미한 고대역사를 추적하여 복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한국의 고대사를 중국으로 흡수하는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물론하고 중국 주변 국가들의 고대사까지 손을 대 티벳까지 흡수하기 위해 일부 중국의 고대사까지 수정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 역사와 문화의 수정(동북공정과 대국굴기)
(1) 역사의 수정
1) 동북아 역사 수정
한국에서의 국사가 서자 취급을 받고 있는 동안에 한국의 역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도전을 받았다. 이미 중국은 중국의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의 역사를 취합하여 중국 역사의 틀 안에 수용하기 위한 작업을 2002년부터 작업해 왔음이 베이징 연합뉴스의 박기성 특파원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2년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해 온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센터는 최근 웹사이트에 발해국사 등 동북지방의 역사를 정리한 과제논문 27편 중 18권의 내용을 정리한 요약본을 올려놓았다.
논문 발표 시점이 2005년 9월 21일로 표기돼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공개를 보류하고 있다가 한국에서 발해사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에 영향을 받아 한꺼번에 웹사이트에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 중 3편은 각각 발해국사, 발해사론(論), 발해이민의 통치 및 귀속연구로 최근 드라마를 통해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발해에 관한 것들이다.
발해 국사 편에서는 남북한이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민족적 감성에 사로잡혀 학술연구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났다고 폄훼했다.
이어 남북한에 의한 대량의 발표가 중국 쪽으로 형성돼 있는 국제여론의 압도적인 우세를 상당 부분 눈가림하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중국의 고대사 연구가 발해에 집중된 배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발해국사는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족이며 대조영(大祚榮) 정권이 발해 초기 말갈을 정식국호로 채택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발해국이 완전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아니라 당나라의 통치범위 안에 든 지방 민족정권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발해사론에서는 발해의 분묘형태와 장례의식, 기물(器物)과 도기(陶器), 관혼상제 풍습 등을 고구려의 것과 비교함으로써 둘 상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발해이민의 통치와 귀속연구에서는 발해가 건국 이래 당나라의 속국으로 당 왕조의 책봉을 받는 중국 역사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라고 밝히고 발해 멸망 후 그 이민들이 요(遼)와 금(金)으로 옮겨가 중화민족으로 융화됐다고 밝혔다. 다른 논문들도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특히 고조선과 부여까지 중국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우리 학계에서는 그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자(箕子)에 대해 '기자와 기자조선 연구'에서는 은(殷)대 갑골문자와 전진(前秦)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서 한반도에 최초의 지방정권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논문은 이어 그가 세운 기자조선은 주나라와 진나라의 복속돼 있었고 후에 위만(衛滿)의 정변으로 멸망했다고 밝히고 기자조선이 이후 위만조선과 한4군,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시작점 역할을 했다고 기술했다.
이제는 고구려뿐 아니라 고조선부터 발해, 부여에 이르기까지 고대사를 포괄적으로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이번에 책으로 출간된 18권의 논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박기성 특파원은 중국이 역사왜곡을 위한 '동북공정'에 대한 작업을 구체화 하고 있는 중에 한국 MBC의 ‘주몽’과 SBS의 드라마 ‘연개소문’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중대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변강사지 연구 결과물을 앞당겨 발표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기성 특파원)
중앙일보 베이징의 진세근 특파원은 한국 고대사를 왜곡해 온 중국의 동북공정팀이 내년 2월 완결된 보고서를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으나 우리 측은 아직도 연구 주체와 과제조차 선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8일 "이를 위해 중국 측은 그동안에도 한국 몰래 연구에 몰두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2002년 2월 사회과학원 산하에 '변강(邊疆.접경지역)사지(史地)연구중심'을 설립하면서 연구 기간을 5년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활동 시한이 내년 2월이기 때문에 앞으로 5개월 안에 그동안의 과제에 대한 논문을 종합적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한.중 양국은 2004년 8월 고구려 역사 분쟁을 해결한다며 5개 항에 합의했으나 중국 측은 이를 무시하고 연구를 계속해 왔다는 얘기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은 1999년 윈난(雲南)공작소로 출범했다.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와의 접경지역 연구를 먼저 시작한 것이다. 이어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헤이룽장(黑龍江)을 포괄하는 동북 3성 공작소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공작소가 세워졌다. 학자들은 변강사지연구중심이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반도와 관련된 동북공정과 티베트. 신장위구르와 관련된 서남공정과 서북공정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연구중심 초기의 고문은 당 정치국원 겸 사회과학원장이었던 리톄잉(李鐵映)과 샹화이청(項懷誠) 재정부장이 맡았다. 중앙정부의 분명한 개입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출범 때 동북공정팀장은 당시 당 중앙위원이자 사회과학원 부원장인 왕뤄린(王洛林)이, 부팀장 3명은 동북 3성의 부성장이 맡았다. 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합작품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북공정의연구 분야는 여섯 가지이다. 이 가운데 변강이론연구. 동북지방사연구. 동북민족사연구. 중조(中朝)관계사연구. 중러 변강연구는 주제가 공개됐지만 나머지 하나는 대외비로 분류됐다. 내년 2월 종합 결과물 발표 때 이것도 공개될지 주목된다.
6개 분야에서 27개의 과제와 비밀에 붙여진 응용과제가 선정됐다. 여기에는 발해국사, 발해사론, 기자(箕子) 및 기자조선연구, 삼국사기 주해 및 연구, 광개토대왕비 등 관심을 끄는 연구가 여럿 들어 있다. 이 가운데 18개 논문의 요약본은 지난해 9월 공개됐다.
신장공정팀은 지난해 11월 변경이론, 민족연구, 문화종교 연구, 안정발전 방향, 주변국 관계 등 다섯 가지 연구과제를 정했다. 여기엔 응용과제라는 것이 없다. 동북공정의 경우 한 쪽 넘게 기술한 공정 소개도 단 두 줄로 처리했고, 연구 기간. 연구경비는 물론 아직 구체적인 과제도 정하지 않았다. 접경지역 역사 연구의 핵심이 동북공정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체 프로젝트에 책정된 공식 비용은 1500만 위안(약 18억원)이다. 1000만 위안은 중앙정부(재정부)가, 나머지는 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이 나누어냈다. 그러나 이는 연구원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만 담은 것이다. 연구실, 연구장비 및 자료, 차량 비용 등을 보태면 실제로는 이보다 몇 배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1)
2) 한국의 대응
문화일보 9월 5일자 보도에 의하면, “정부, 중국과 갈등 우려 ‘동북공정’ 대응 안했다”는 제하의 고발성 보도가 눈에 뜨인다. “임효재 교수 ‘2004 대책회의’ 내용 공개”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보도내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관련,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 진 2004년초 정부가 학계 관계자 등이 참석하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당시 6자회담에서 중국의 역할 등에 대한 정치적 고려 때문에 무시하기로 했다는 원로학자의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임효재 교수는 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학계가 아우성을 쳐 2004년 초 문화관광부 장관 주재로 외교통상부 국장, 문화재청 관계자, 학계 인사 등이 참석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참석한 정부 고위 관계자가 ‘대세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발언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그 무렵 정부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중국의 역할을 크게 기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때문인지 회의에 참석한 외교부 관계자도 ‘이 문제에 시비를 걸면 중국은 물론 미국과도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며 문제 삼지 말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참석자중 한명인 정부 관계자는 ‘중국의 한국역사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으니 문제를 긍정적으로 풀기 위해 우리 정부는 물론 학계가 도와주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해 아연실색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그 후에도 학계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하니까 정부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재단을 만들었지만 이마저 지난 8월31일 동북아시아 연구재단으로 흡수됐다”며 “이는 학계가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대응하는 직접적인 기구를 없앤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임 교수는 “한, 중 수교전인 1990년쯤 중국 학생 한명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받아 박사학위를 수여해 보냈는데 이 학생이 귀국한 뒤 동북공정 추진에 참가하면서 그 내용을 상세히 알려와 학계와 정부에 보고했지만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2004년에 정부와 학계가 공동으로 대응했으면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 주요 고구려 유적이 중국의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현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에서라도 고구려 유적을 중국 단독의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2)
(2) 문화의 수정
1) 대국굴기
중국정부가 영토와 역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깊은 관심은 중국정부의 관영 T.V에서 내보낸 역사 다큐물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서 확인된다. 대국굴기이다. 조선일보는 문화 충격에서 벗어나는 중국, 깨어나는 중국이라는 표제를 사용하여 중국관영 T.V 방송을 통해 방영한 대국굴기에 환호하는 중국인의 표정에 주목했다.
조선일보에서 주석한 내용을 보자. 15세기 이후 영국, 일본, 미국의 성공 소개 프로그램에 시청자 환호 “재방송 해 달라” 자본주의 시각으로 해석… 속마음은 “언젠가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세계 1위 대국될 것” 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중국대륙을 덮고 있음으로 주석했다. 보도 내용을 보면 "역사와 문화의 대장정, 중국 문화충격에 빠트린 TV다큐, 내용은… "으로 시작하고 있다.
지난 11월 13일부터 24일 사이 중국 관영 중앙TV(CCTV)가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하자 중국 사회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대국은 어떻게 일어섰나(大國堀起·대국굴기)’. 방송 직후 시청자와 네티즌 사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중국 역사에 이정표가 될 내용이다. 이 방송은 정치체제 개혁이라는 ‘큰 움직임(大動作)’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무슨 소리. 이것은 신(新) 자유주의가 파산하는 장송곡에 불과하다.”
이 방송은 15세기 이후 세계를 호령한 9개 대국(大國)의 발흥과 패망의 역사를 돌아보며, 각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떻게 해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짚어보는 역사 다큐멘터리이다. CCTV 제작팀이 무려 3년에 걸쳐 9개국의 역사적 현장과 박물관 등을 직접 찾아가 1차 문건을 확인해 제작한 역작이다. 제작팀은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쳰청단(錢乘旦) 교수를 비롯해 수도사범대학 류신청(劉新成) 교수, 영국 노팅엄대학의 쩡용녠(鄭永年) 교수 등 중국 안팎의 학자ㆍ전문가 100여명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생동감 넘치는 화면과 충실한 내용 덕분에 이 방송은 중국 시청자들로부터 “2006년 중국 사회를 뒤흔든 최고의 TV 프로그램”이란 찬사를 받았다.
딱딱한 역사물임에도 불구하고 12회 시리즈가 끝나자 방송사에는 “재방송하라”는 시청자의 전화가 쇄도했다. 결국 CCTV 측은 지난 11월 27일 이 프로그램을 재방송했다.
게다가 프로그램을 담은 6개짜리 DVD는 12월 20일 베이징 등 대도시 서점에 깔리자마자 2~3일 만에 동이 났다. 8권으로 된 ‘대국굴기’ 책 역시 1만질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13억 중국인이 이 방송 내용에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하상(河)’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황하(黃河)의 죽음’이란 뜻의 이 프로그램은 1988년 CCTV가 제작한 기획 다큐멘터리. ‘하상’은 만리장성이나 용(龍) 같은, 중국인이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여기던 전통문화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황하’ 자체가 ‘황색 얼굴의 중국인과 중국 전통’을 상징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에 비수를 들이대고 서방 문명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은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지 1년 뒤 중국에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일부 학자는 “하상이 1989년 중국 민중운동의 사상적 선도 역할을 했다”고도 말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환영 받은 것은 개혁ㆍ개방 초기 젊은 층의 사회 모순에 대한 반발과 변화 욕구를 잘 담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로부터 18년 만에 중국 사회가 또다시 한 TV 프로그램으로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방송 내용이 무엇이기에 중국 사회가 요동치는 것일까.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의 도움으로 DVD를 긴급 공수 받아 본 ‘대국굴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니, 중국의 관영 매체가 이런 방송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사회가 이런 내용을 소화할 만큼 성숙했단 말인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이런 방송을 내보내는 의도가 무엇인가.’ 충격과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총 12편의 방송은 6개의 DVD에 담겨 있다. 편당 방송시간은 약 45분. 유럽의 지명과 인명, 역사적 사건을 중국식 표현으로 쏟아놓기 때문에 방송 내용을 따라가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먼저 제1편 ‘해양시대(海洋時代)’는 15~16세기 신항로·신대륙 발견으로 강대국으로 우뚝 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한 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향료(香料)’였다고 본다. 하지만 식민지로부터 은(銀)을 약탈해 엄청난 부를 쌓은 두 나라는 상공업 발전에 투자하지 않고 종교활동과 사치, 식민지 확장에 전념하다 쇠락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제2편 ‘소국의 대업(小國大業)’은 국토 면적이 베이징의 2.5배에 불과하고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습지의 나라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 비결을 찾는다. 제작진은 그 비결이 네덜란드인의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인 사고에 있다고 본다.
제3편 ‘현대로 달려가다(走向現代)’와 제4편 ‘공업화의 서막(工業先聲)’은 모두 영국에 관한 것이다. 먼저 3편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를 체결한 이후, 1588년 영·서(英西·영국과 스페인)전쟁과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군주의 권한이 제한되고 시민이 자유권을 쟁취해 ‘개방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4편은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중심지였던 영국의 상인이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은 곧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 아이작 뉴턴 이후 ‘과학의 시대’가 열리고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모든 산업에 일대 생산혁명이 일어났다는 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자유무역의 정신이 꽃피고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5편 ‘격정의 세월(激情歲月)’은 18세기 말 프랑스가 대혁명을 거쳐 어떻게 현대 민주사회의 기반인 자유ㆍ평등ㆍ박애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제 6편 ‘제국의 세월(帝國春秋)’은 19세기 프로이센의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재적인 방식으로 공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고 전 국민 의무교육을 실시해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7편 ‘백년간의 유신(百年維新)’은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이 1853년 7월 8일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을 목격한 이후 약 100년 사이에 어떻게 아시아 최강을 넘어 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했는지를 탐구한다. 중국의 한 학자는 그것을 ‘처음은 놀라지만 다음엔 심취하고 마지막에는 미치는(始驚次醉終狂)’ 일본인의 태도에서 찾는다.
당시 일본은 중국·조선처럼 서방 문명의 파도에 쇄국의 빗장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흑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몰래 배에 오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메이지 정부의 관리를 거쳐 훗날 경제계에 투신, 500개의 기업을 설립한 일본 기업계의 대부)처럼 국가 지도부와 지식층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그 비결이라고 지적이다.
제8편 ‘강대국의 길을 모색하다(尋道圖强)’와 제9편 ‘풍운 속의 새로운 길(風雲新途)’은 피터 대제의 개혁과 국민의 저항, 예카테리나 여제의 교육 개혁과 영토 확장 등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몸부림과 이어진 사회주의 혁명 등 현대 러시아의 흥망을 다루고 있다. 10월 혁명 후 레닌은 신 경제정책을 실시해 러시아 경제를 회복시키고, 이어 스탈린은 국가 주도의 공업화 정책으로 소련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웠지만 배후의 문제를 덮어버렸다고 ‘대국굴기’는 지적한다.
제10편 ‘새로운 나라, 새로운 꿈(新國新夢)과 제11편 ‘위기 국면의 새로운 정치(危局新政)’는 미국에 관한 것이다. 제 10편은 미국 제헌의회가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위한 법률적 보호 장치를 제공했으며, 링컨이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고, 그 후 특허권 보장과 과학기술의 발달 등이 미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이끌었다고 지적한다.
제11편은 자유경제로 인해 각종 경제사회의 재난이 출현하자 미국 사회 내부에 진보주의가 대두했으며 이들의 주장으로 ‘반독점법’이 제정되고, 두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가 발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했다고 분석한다.
제12편은 9개 대국의 흥망에서 ‘교훈 찾기’이다. ‘대국굴기’는 “각국 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서로 엇갈리지만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상· 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체제· 제도의 개혁이다”라고 지적한다. 프로그램은 또 미국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 교수가 제기한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도 지적한다. ‘대국굴기’는 “평화와 발전은 현재 세계의 기본 주제”라면서 “다시는 전쟁과 패권쟁탈전을 통해 대국이 될 수는 없으며 영구평화와 공동번영의 ‘조화로운 세계(和諧世界)’ 건설이 인류가 공동노력 해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한다.3)
2) 비판에서 비평으로 가고 있는 중국
중국은 역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시각을 곧추세우고 있다. 수 천 년 동안 아시아의 맹주로 지평선을 넓혀 왔던 중국은 현재 13억이나 되는 인구를 재원으로 세계를 넘보고 있다. 인류의 3대 발상지로 꼽히고 있는 중국의 잠재력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 받고 난 이후부터 발출되기 시작했다. 자유무역도시인 홍콩을 통해 이미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를 학습한 중국의 베이징 당국은 공산주의의 멸망의 직접적 동인이 되었던 외교적 고립과 자국의 경제문제를 타결하는데 국력을 집중했다.
외교 면에 있어서는 한국을 교두보로 하여 미국과 일본 등 서방세계와의 외교에 주력하는 한편, 자국의 경제활성화를 위해 외국의 투자를 허용하고 적극적인 유치에 나서는 등의 노력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는 매년 10%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주목해야 할 점이다.
경이적인 10%대의 경제성장률은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발발한 육이오 동란을 통해 달성했던 일본의 경제성장률과 일맥상통하는 괄목할만한 성장률이다.
소련식 공산주의가 일거에 무너지면서 중국은 공산주의의 맹주로 급부상했다. 구소련에 편중되어 있던 공산주의 국가끼리의 교역은 방향타를 놓치고 러시아까지 중국으로 방향을 틀면서 교역량은 증가했다. 여기에 중국이 자유시장경쟁체제로 방향을 바꾸면서 해외투자를 허용하자 싼 노동력과 엄청난 인구의 경제수요는, 자국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맴돌고 있던 서방 세계와 한국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의 가장 큰 시장 중의 하나인 중국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외국기업의 투자는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이미 예측하기를 세계 무대는 아시아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며 향후 부의 미래는 중국에 편중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미래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세계의 학자들도 중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은 시장경제에 관하여는 자유민주주의 철학을 따르지 않고 공산주의 철학을 그대로 접목하여 사용하고 있다. 정치는 공산주의의 철학으로 가고 시장경제는 자유주의 경쟁체제를 인정하는 실용주의적인 접근이다.
근본적으로 불교 외의 다른 종교를 허락하지 않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신앙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을 역사의식으로 대체하여 정신적인 만족감을 채워 주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일이다. 왜냐면 그것은 곧 민족주의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절대조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역사관이 투철하면 애국심으로 빛이 나게 되어 있고 그것은 곧 민족 관으로 고착되며 한번 민족 관으로 고착되면 민족주의자가 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가 제공하는 문화의 틀이며 그 안에서 가치관이 생성된다.
3) 종교적 성격의 역사관과 중국의 문화
역사를 통해 불교가 제공하지 못했던 대국적 역사의식의 복원은 정신운동의 혁명에 버금가는 중대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위력은 국민 개개인에게 있어서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부여하고 애국심으로 발현되며 이는 곧 경제의 창출과 애국적 소비문화의 순환적 싸이클을 가지게 되어 있다. 구태여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아도 자발적인 국산품을 사용하게 되는 소비행태가 구축된다.
세계시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국의 상품만을 소비하는 국수적인 소비양태이다. 만약 세계 각국에 화교형태로 흩어져 있는 중국인이 자국 제품만 고집한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이 되고 만다.
16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토마스 그레샴(T. Gresham)이 제창한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로 널리 알려져 왔다. 내용은 실질가치가 큰 화폐와 작은 화폐가 똑같은 명목가치를 지닌 화폐로 동시에 유통되게 되면 실질가치가 큰 화폐는 유통과정에서 사라지고 실질가치가 작은 화폐만이 계속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 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라고 표현할 수 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지폐가 없었고, 화폐는 모두 동전이었다. 그런데 왕은 재정상의 문제로 종종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곤 했다. 가령 백 원짜리 은화에는 백 원 값어치의 은이 함유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함량을 떨어뜨리고 명목만 백 원이라고 하여 유통시키면 사람들은 자연히 백 원 어치의 은을 함유한 은화, 즉 양화는 보관하고 질이 나쁜 은화, 즉 악화로 지불하기 때문에 결과로 양화는 자취를 감추고 악화만이 유통되게 되어 결국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중국인은 화교의 양태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한다. 중국인은 소수족의 형태로 중국내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타국에 가서도 그 양태를 보존한다. 이른바 중국타운이다. 이들의 경제양식은 본토의 것을 들여다가 현지에서 가공하여 현지인의 입맛에 맞춰 내는 외식산업에서 빛을 발한다. 혹자는 일본인을 경제동물로 비유하나 중국화교들의 경제력 창출에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중국인은 사막에 떨어져도 차이나타운을 건설하고 전갈을 잡고 벌레를 잡아 별미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물적 생태를 가지고 있다.
4) 되살아난 공자
중국의 변화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국은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개발도상국이라는 딱지를 떼어냈다. 현재는 거대한 인구를 부존자원으로 거느리고 선진국으로의 부상을 꿈꾸며 그에 걸 맞는 위상을 차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동북공정을 통해 주변국과의 역사에서 우위를 점하고 역사를 근거로 영토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다음에 문화공정의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공자를 살리는 일이다.
문화공정으로 인해 과거 춘추전국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했던 오랜 통치철학인 공자의 유교사상은 재평가를 받고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이로서 문화혁명과 천안문 사태 그리고 홍위병 사태로 급진되었던 중국의 문화는, 동북공정의 역사복원과 함께 아시아권에 퍼져 있는 유교권의 종주국으로 복원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고대역사와 고대문화의 권역을 두루 갖추게 되었으며 명실상부한 역사와 문화의 맹주 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동안 마오쩌뚱의 개혁사상에 가려 공자의 사상 복원에 미온적이던 현 실세들이 마오쩌뚱의 사망 이후 문화공정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공자의 사상을 부활시켰다. 공자의 복원과 함께 유교가 복원되는 것이며 이로써 유교권역에 들어 있던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중국을 스승의 나라로 인정을 해야 하는 문화적인 압력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공자가 되살아났다는 뜻은 그 의미가 문화공정의 복원이라는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실상 대만과의 관계에서도 실질적인 본토임을 주장하는 명분을 더해준다. 본토 국가라는 의미는 아버지 국가, 형님 국가라는 위상과 명분이 담겨 있다.
중국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 세계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달려들고 있다. 년 경제성장률 10% 내외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과 중국으로 몰린 세계의 자본을 바탕으로 번성했던 중국 왕조를 복원시키고 있다. 중국은 그 동안의 네가티브적인 비판적 시각을 버리고 포지티브적인 비평으로 돌아서면서 세계의 지각 판을 뒤흔들고 있다.
1) 중앙일보, 베이징=진세근 특파원.
2) 문화일보, 이상호기자, 2006-09-05.
3) 조선일보, 2006-12-2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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