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론에 대한 문화적 담론

제5장 통일론에 대한 문화적 접근

도제조 안형식 2009. 10. 20. 13:09

제5장 통일론에 대한 문화적 접근


1. 안티문화

2.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 된 경위

  1) 세계 정세

  2) 한국의 정세

3. 묵살문화와 반골문화

  1) 유교문화권의 묵살문화

  2) 민주화 시대의 반골문화

  3) 동학과 반골문화

4. 광주와 DJ

  1) 빛고을 광주와 DJ의 역학관계

  2) 사기꾼 DJ

  3) 광주의 스승인가?

  4) 고립을 자처하는 광주

  5) DJ를 청문회에 세우고 심판해야


1. 안티문화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 청소년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진 안티 문화권. 10년 세월을 지나니 이제는 청년 문화권의 트랜드로 자리 잡았다. 안티를 당하여 충격으로 자살한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 안티문화는 사람 잡는 문화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빈총으로 총살하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악의적인 댓글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고소하는 고소사건이 년 간 1만 건에 달하자 정통부에서는 인터넷으로 인한 명예훼손의 형벌을 강화했다. 2005년 10월 19일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허위사실을 유포,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 정지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 등 강력한 처벌을 담은 특별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안티문화권이 사이버 폭력의 수단으로 악용되어지자 안티문화권에 대하여 추적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생겨났고 대학졸업논문으로 인기 높은 아이템이 되었다. 안티 문화권를 정점으로 놓고 안티문화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등식적인 구조가 발견된다. 


안티 문화권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을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자연 구축된 문화권이다. 다시 아버지 세대는 할아버지 세대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세대에서 증조할아버지 세대에 대한 반발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세대는 증조할아버지 세대에 대하여 만족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나는 각 세대 간에 변수가 있음에 주목했다. 그것은 각 세대 간의 가치관이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우선순위에 대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안티세대를 1세대로 그 아버지 세대인 아날로그 세대를 2세대로, 할아버지 세대를 3세대로 편의상 구분하여 호칭하도록 한다. 한 세대의 간격은 30년으로 한다. 기준이 되는 안티세대를 현재 20~30살의 나이대로 하고 1세대로, 아날로그 세대는 아버지의 세대로 50~60세의 나이대로 2세대로 하고, 할아버지 세대는 80~90세의 나이대로 3세대로 구분한다. 안티세대를 기준점으로 하려니 인터넷의 역사가 10년이 되었음으로 인터넷을 통한 안티문화권에 속한 10년의 기간을 텀(term)으로 가지는 것이 마땅함으로 이런 구분이 나왔다.   


할아버지 세대인 3세대는 묵살문화가 키워드이며 절대순종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아버지 세대인 2세대는 할아버지 세대에 대해 반동하는 반골문화가 키워드이며 능력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아들의 세대는 안티라는 키워드로 비교라는 조건이 붙었다.


각각 세대의 문화적 특징을 살펴보자. 3세대는 일제 시대와 육이오를 거친 세대로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권위를 앞세우는 묵살문화권의 시대로 표지된다. 이 세대의 가치관은 군과 민의 분리가 정확하며 부모와 자식의 구분이 확고했다. 장유유서가 덕목중의 하나였으며 당시의 가치는 상하구분에 따른 예의가 극진하고 수직적인 구조에 대해 철저한 순종자가 가치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2세대에 들어오면서 능력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무능력하면서도 묵살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묵살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반골문화가 나타난다.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 동란기를 거치면서 능력이 없는 개인과 국가는 패망하고 만다는 논리를 체험으로 터득한 2세대는 여전히 권위를 부르짖는 3세대의 묵살문화권에 대하여 도전했다.


"아버지의 묵살문화권은 권위를 내세워 무능력을 선비정신이다 혹은 양반정신의 가르침으로 포장하며 수직적 구조를 강요하고 있지만, 실속이 없는 어리석은 문화권이 아니냐. 중국에서도 내다버린 중국의 유교의 틀을 고집하며 무능을 능력으로 포장하는 실속 없는 한학은 학문이 아니다. 능력이란 경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능력이지 생각에 머물고 학문에 머물러 있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실패는 유교에서 나왔고 실패한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무능에 대한 포장일 뿐이다." 구시대를 무능의 시대로 규정한 2세대는, 새 시대를 열고 새 문화를 열어 자식에게 더 이상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사명감으로 3세대에 대해 저항했는데 이 저항은 시류의 조류에 편승하면서 정치꾼에 의해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되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은 지배권의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항거의 형태로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품고 소위 민주화 지도자라는 자들에 의해 방향성과 폭력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일제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 동란을 거치면서 능력이 없으면 망하고 만다는 체험에 의해 형성된 저항논리는 좀 더 강한 행동의 논리를 필요로 했다. 이들은 "행동하는 지성,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구호를 앞세우며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을 행동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채택된 배경을 살펴보자.


2. 혁명이론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 된 경위


1) 세계정세 속의 혁명이론


세계 1차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주역들은 제국주의의 군주들이었다. 세계 1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전쟁을 일으켰던 제국주의의 패망한 군주들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쇠락하는 반면, 세계 대전에 투입된 연합군의 군수품산업은 거대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경제발전과 자본시장의 동력이 되었다.


패전의 충격은 패전국가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패전의 원인이 힘과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물이라는 것과 군주제의 폐해성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들었다. 힘과 능력은 경제에서 나온다는 체험적 논리는 산업발전을 촉진시켰고 힘이 있는 강력한 무기개발은 과학문명의 발전을 불러왔다. 패전국의 학자들은 승전국들의 과학과 산업 그리고 정치와 경제체제를 섭렵하며 처절한 각오로 연구했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최고 권력자였으나 실권은 군 수뇌부에 맡겨져, 1916년 8월 P.힌덴부르크와 E.루덴도르프가 국내의 실력자가 된 뒤로는 전혀 권력을 쥐지 못하였다. 패전 시에는 국내의 지배계급으로부터 퇴위 권유를 받았으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신봉자인 그는 최후까지 자발적인 퇴위를 거부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대전 말기에 국민의 원성을 샀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기자라는 직업으로 인해 비교적 세계정세에 밝았던 독일의 칼 마르크스(1818~1883)는 군주제로 인한 끊임없는 전쟁의 이유가 전제정권인 군주제에 있음을 확인하고 군주제를 폐지할  이론을 연구하였다. 독일 관념론, 공상적 사회주의 및 고전 경제학을 비판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하였다. 헤겔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고 급진적인 부르주아 반정부 기관지 《라인 신문》의 주필로 있다가, 신문의 폐간으로 파리로 망명하여 사적 유물론 사상을 확립하고 1848년에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였다. 1849년 이후에는 런던에서 빈곤과 싸우며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고 《자본론》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는 역사의 유물 변증법적 해석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인식하고 해방을 추구하여 계급투쟁의 이론을 수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인터내셔널’을 만들었으며, 저서에 《신성 가족》, 《경제학 비판》, 《프랑스의 내란》, 《철학의 빈곤》, 《자본론》, 《고타 강령 비판》 따위가 있다.


그는 헤겔 철학의 좌파적 관념론을 따랐으며 엥겔스의 자본경제론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을 중심한 서방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론을 경계하며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식민지 정책의 세계화를 막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혁명논리를 채용했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견해를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라인신문" 신문지상에 발표함으로 이슈화시켰다. 칼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받아들여졌고 항거와 투쟁의 원리는 행동하는 지성 혹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  현대 사상의 동력선이 되었다.


이 동력선의 +선은 민주화의 동력케이블로, 선은 공산주의의 동력케이블로  연결되어 항거와 항쟁의 동력을 공급해 주었다. 이중 동력선인 공산주의는 생명력이 고갈되어 80년 만인, 1991년 모스크바 광장에 있던 레닌의 동상이 쇠줄에 묶여 목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선인 민주화 운동의 동력선은 현재 한국 등에서 친북이라는 케이블로 바뀌어 노동운동을 가장하고 민주화 운동을 가장하여 국보법 폐지, 미군철수, 평화 등의 이름으로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2) 같은 기간 한국의 정세


6.25 동란 이후 남아있던 남로당원은 빨치산이 되어 최후까지 항거했다. 남로당의 영향은 빨치산을 통해 발산되었고 아직 남아 있는 공산주의자는 신분을 감추고 수면 아래 잠복해 들어갔으나 6.25 동란 시에 북한에 의해 강제 납북된 포로들의 가족은 김일성의 대남공작을 위한 인질로 활용되었다. 북한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가족들과 자진 월북자의 가족을 인질로 하여 김일성은 대남공작의 교두보를 지하점조직망의 형태로 확보해나갔다. 포섭 자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각종 시위에 참여하여 항거토록 명령되었다. 북한에 의해 포섭된 자들은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대한민국의 운동권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성실히 이행했고, 대학은 이들의 공작으로 인하여 점령당했다.


김일성은 육이오 동란 이후에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바탕으로 북한식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었다. 먼저 6.25 남침을 남한과 미국에 의한 북침으로 둔갑시키는 역사왜곡에 손을 댔다. 북침의 원인은 미국의 자본주의의 제국 화를 위한 야욕으로 한반도를 집어 삼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규정했다. 남한은 미국의 앞잡이로서 미국의 명령에 따라 북한을 침략했다는 6.25 북침 론이 김일성을 통해 만들어졌다. 김일성은 만들어진 북침 론을 배경으로 남한과 미국은 응징을 받아야 할 주적으로 규정한 주체사상을 만들어냈다.


6.25의 패전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미 제국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남한은 공존할 수 없는 적으로서 마땅히 타도되어야 했으나 6.25 전쟁에서 패한 것은 내부적으로는 남한에 있는 친척 등 피붙이에 연연하여 혁명사상을 저해한 동포애에 원인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서로가 비판을 통하여 적개심을 유발하도록 인민재판을 통해 이뤄졌다. 공산주의 혁명이론에 반하는 종교, 가족애, 형제애, 동포애 등은 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반동으로 자아비판과 인민재판의 단골메뉴였다. 인민재판을 통해 적개심이 유발된 자아비판은 내부의 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명분과 신변보존을 위한 충성심 증명을 위해 고발로 이어졌다. 김일성은 이 명분으로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을 토사구팽 시켰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와 민족주의를 위해 항거해야 한다는 저항론의 바탕이나 내부적으로는 주체사상 교육을 통해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서약용으로 사용 되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론에서 파생된 저항논리는 신지식의 하나로 둔갑하여 한국의 지식 역사에 등장했다.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그 자체가 반골문화의 핵심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공산주의 혁명 논리가 일어난 배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각각 발전되어 세력화된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배경은 어떠한가? 대체 어떤 배경에서 친북좌파 대통령(DJ, MH)이 두 명이나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정신적인 배경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3. 묵살문화와 반골문화


발상과 성향의 구분으로 구분해보면, 묵살문화시대에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었던 포지티브적인 개념의 시대로, 반골문화시대는 포지티브와 네가티브의 발상이 공존하는 공유개념의 시대로, 안티문화시대는 아예 네가티브적 개념의 시대로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나고 있음이 관찰된다. 이를 추적해 보자. 


1) 유교문화권의 묵살문화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국교였던 유교문화권은 민주주의시대(이승만 정부부터)에 들어와서도 맹위를 떨쳤다. 뿌리 깊은 유교적 전통은 수직적인 구조로 묵살문화의 특징을 가진다. 위, 아래가 선명한 수직적 구조의 권위 앞에서는 무조건 입을 닫아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유교의 가르침은 건전한 사고와 비판을 가로 막았다. 칠거지악의 논리는 여인들의 입과 손을 막았고 군신유의와 장유유서는 건강한 토론문화를 억제했다.


이로 인해 가부장적이다,  권위적이다. 라는 불만과 함께 누적된 불만은 항거로 나타나고 있으며 묵살문화에 대한 반발로 반골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수직적인 구조에 수평적인 구조가 더해져 순종해야 할 권위에만 순종한다는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다. 1990년대 후반기부터 인터넷 시대가 도래 하면서 익명성과 비대면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터넷문명은 위. 아래가 따로 없는 수평적인 구조로 출발하여 무차별공격, 무논리 공격의 폭력적인 어휘를 구사하며 안티문화를 탄생시켰다. 이 안티문화는 MH 정권에 의해 활용되어 포퓰리즘 정치를 가능하게 했다. MH의 참여정부는  안티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참여연대와 한겨레신문 등을 주축으로 16대 총선에서 낙선운동을 펼치며 큰 사고를 쳤다. 탄핵까지 받았던 MH 대통령을 기사회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과 함께 거대야당을 탄생시키는 대형사고까지 터뜨렸다.


묵살문화는 소통을 기대할 수 없는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 불만을 키웠다. 건강한 토론문화(의회문화로 자유민주주의 문화의 근간)가 형성되지 못하고 어리다는 이유나 여성이라는 이유 후배라는 이유 직급이 낮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묵살 당하는 묵살문화 앞에서 소통이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소통이 되지 않으니 불만은 고조되고 불만이 고조되니 폭발한다. 이래서 모임이 깨지고 회의가 중단되고 종국에 가서는 판이 깨진다. 이런 이유로 반골문화가 생겨났고 안티문화가 뒤를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한 능력이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비판력이 있다. 건전한 비판은 소통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소통이 막히면 불만이 응축되어 있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폭발하게 된다. 폭발과 동시에 불만의 정도에 따라 비난이 뒤따르며 비난이 나오게 되면 서로가 적이 된다.  


이는 전적으로 소통의 문제이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불만이 쌓이게 되고 그 불만으로 결국은 갈라서게 되어 있다. 그냥 갈라서겠는가. 서로가 죽이고 죽을 만큼 싸워 적이 되고 난 이후에야 갈린다. 소통의 여부도  시대와 사회가 건전한 비판문화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느냐에 따라 갈린다. 한국의 현실은 유교사회의 묵살문화권과 자식세대의 항거방식인 반골문화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이는 어느 한쪽으로 치환될 수 있는 구조적 환경이 아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환경일 뿐이다. 힘으로 치고 들어오는 자식세대의 반골문화권에 대해 유교적 사고자들이 마냥 양보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이는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교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묵살문화권은 선비정신이라는 유교의 정체성으로 한국의 정신을 이끌어 온 때가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 때까지이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연속적으로 성공하면서 한국은 산업발전을 이룬 개발도상국으로 승격되면서 산업국가가 되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공장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공장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일자리도 늘어나면서 열악한 농업구조에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이 변혁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하는 농촌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청년들이 대거 도시의 공장에 취업하면서 일어난 변혁이었다.


이 변혁은 두 가지의 강력한 매력에서 발생되었다. 첫째는 공장에 취직하여 기술을 배우면 평생을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고 둘째는 도시생활에 대한 동경이었다. 실제로 도시의 공장에서 돈을 벌어 명절 마다 금의환향하고 몇 년 번 돈으로 부모님께 논과 밭을 사 드리는 고향선배의 성공은 농촌 청년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이 되었다. 일은 많은데 일할 사람이 부족했던 공장의 사장은 명절에 일할 사람을 찾아오라고 주문하며 선물을 주어 보냈다. 사장의 주문과 독려를 받은 노동자는 자신이 취직을 시켜 줄 수 있는 성공자가 되어 고향을 찾았고 자신의 후배들을 이끌고 공장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사정으로 도시에 유입된 전체 노동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늘어났다.


1970년대 당시, 도시로 밀려드는 농촌 총각의 유입으로 도시의 인구문제와 상대적으로  공동화 되는 농촌사회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사람이 몰리는 도시에는 필연적으로 서비스업이 따라 붙게 되어 있다. 이는 또 다른 경제 인구를 양산해 냈고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노동인구와 서비스업 종사자의 삶의 질은 동반상승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상승한 만큼의 몫을 차지하지 못한 계층은 자신들의 몫을 찾기 위한 요구도 거세졌다. 특히 노동자의 경우 노동의 강도에 비해 노동의 대가는 열악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시위가 잇따랐다. 


노동자의 시위는 사장과 관리자를 상대로 파업과 시위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사회의 수직구조에 길들여져 있는 당시의 문화권으로는 하극상으로 비쳐졌다. 유교의 묵살문화권에 대항하는 반골문화권의 등장이다. 이처럼 반골문화권이 나타나면서 묵살문화권은 거센 저항을 받아야 했다. 이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자.


2) 민주화 시대의 반골문화


6.3사태(1964년)와 4.19의거(1960년)등의 민주화 운동은 반골문화권의 표지이다.1) 


반골문화권은 묵살문화권을 추격하여 기성, 혹은 가부장적 권위, 기득권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주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살한다. 한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의 근원은 반골문화권의 외적인 발현이며 내적인 사상의 중심에는 공산주의 사상의 혁명논리가 담겨져 있었다.


3.1 운동과 4.19 운동이 명백히 구분되는 구분 점은 외세에 맞선 항거와 정부의 독재에 맞서 항거한 항거라는 분명한 구분점이 있다. 이 경계는 3.1 운동은 독립을 위한 항거이며 4.19 운동은 독재정권의 교체를 위한 항거라는 명백한 경계점을 가지고 있다. 양자 간의 구분은 극명히 대조되는 구분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좌파계열의 학자들은 양대 운동을 구분점이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동격화하고 있다. 


실상 이 구분은 근대 및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의 가치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과연 민주화 운동이 독재정권의 교체를 위해 항거했다면 어떤 정권으로의 교체를 위해서 항거했느냐는 항거의 목적도 규명이 되어져야 한다. 만약 어떤 정치꾼의 정권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 정치인을 따르는 정치지망생들이 이슈를 만들고 힘을 합쳐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항거로 규명이 되어 진다면 이는 구테타성 시위이지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역모이며 역적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하여 6.3 운동이나 4.19 운동에 김일성이 관여되어 있거나 혹은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규명이 되어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는 이적 행위이다. 공산주의 혁명사상은 민주화운동권에 혁명논리와 항거의 이유를 자주적, 민족적이라는 제공해 주었다. 이로부터 민주화운동은 공산주의 혁명이론으로 무장하고 투쟁이라는 붉은 완장을 차고 6.3사태부터 등장한다. 이명박 씨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6.3 사태의 내용을 보면 군부독재타도와 외세반대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한국일보 2003년 4월 10일자에는 "민주화 발자취를 찾아서 1부"라는 내용으로 다음의 내용이 보도 되었다.


6.3 사태를 통해 김지하는 대일굴욕외교에 대해 민족적민주주의의 장례식이라는 퍼포몬스를 통해 박정희 정권과 맞서서 항거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민족적 민주주의여. 네 주검의 악취는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던 시체여!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절망과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 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1964년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란 만장이 펄럭였다. 3,000여 명의 대학생과1,000여 명의 시민이 자리를 메웠다. 두건을 쓰고 죽장을 든 4명의 학생이 시커먼 관을 메고 입장했다.


"(61년) 5월 군부 쿠데타는 (60년) 4월의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대학생투쟁위원장으로 장례식을 주도했던 김중태(金重泰·63·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4년)씨의 설명. "당시 시위의 목표는 한일회담 반대였다. 서울 시내 9개 대학의 대학총연합회는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에 반대했다. 일부 학생회장은 장례식 전날 각 언론사를 방문해반대와 불참이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당시 어느 학자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수상의교도적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모방해 혁명정부에 진상한 구호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극히 사랑하는 표현이었다. 이에 대한 장례식을 갖는다는 것은 곧 박 대통령에 대한 부고를 띄우자는 의도였다.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은 결코 아니었다."


당초 장례식은 군사쿠데타 3주년에 맞춰 5월 16일에 열릴 계획이었다. 정보가 새 나가 20일로 연기됐다. 공개적인 대학총연합회는 뒷전으로 빠졌다. 김 씨와 현승일(玄勝一·61·한나라당 의원) 김도현(金道鉉·61·전 문화체육부 차관)씨 등 이른바 서울대 정치학과 3인방이 주도하는 막후의 투쟁위원회가 장례식을 집전했다.2)


6.3운동은 4.19 운동을 계승한 학생운동이라는 명분을 달았으나 6.3 운동에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과 문제제기가 있어 왔다.  만약 여기에  5.18민주화운동도 공산주의화 운동 혹은 의식화 운동으로 판명 된다면 그 성격과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들 민주화 운동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뒤집어 바꾸자는 레닌의 혁명적 이론을 채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논리는 한 결 같이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자유와 평등이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유를 달았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누구를 세우겠다는 뜻이다. 과연 사람을 바꾸면 이들의 주장대로 자유가 주어지고 평등이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는가?


이들이 벌인 운동은 어떤 정권으로 바꾸자는 혁명이었던가? 자유와 평등을 구호로 채택한 속셈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은 식민지 국가 국민이 독립을 위해 외치는 구호가 아니던가? 국가가 세워져 있는데 어째서 자유와 평등이 또 다시 외쳐져야 하는가? 혹시 자유민주주의를 바꾸고 공산주의국가로 통일하자는 혁명은 아니었던가? 의식화 되어 있는 공산주의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김일성이 적화통일 할 수 있도록 선동과 시위를 통해 사회의 분란을 부추 킨 뒤 남한은 접수하겠다는 전략의 대남공작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한 집에 사는 부부사이라고 해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함께 공존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큰 물방울에 작은 물방울이 흡수되듯 어느 쪽으로든 흡수되게 되어 있다. 다음을 주목해 보자.


우리는 DJ 씨가 대통령 시절에 5.18 항거 자들의 묘소를 민주화 투사의 묘역으로 성역 화시킨 것도 모자라, 4.19묘역과 합치겠다는 발언을 내어 놓고 5.18 항거 자를 의사로 추앙하려고 했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4.19 운동과 5.18 운동의 맥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항간의 의문들에 대한 내부적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결과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4.19와 5.18양대 운동의 정체성의 평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역사가들은 6.3 사태와 4.19 운동을 근대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왔다. 이들 운동의 정체성과 담고 있는 사상의 문제에 대하여는 일절 함구한 채로 시위의 규모와 이들이 외치고 있던 주장만을 그대로 채용하여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패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정부와 교육계는 이 내용을 교과서 내용으로 채용하여 교육시켜 왔다. 하지만 4.19 운동이 급격히 확산된 점과 5.16 혁명을 불러 온 양자 구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었다. 5.16 혁명에 대항한 6.3사태에 대한 규명 또한 깔끔하지 못했다. 


4.19 운동은 성스러운 민주화 운동이고 5.16 혁명은 정권에 눈이 먼 독재자의 구테타 정도로 설명되어져 있을 뿐이다. 현재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근. 현대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조차 납득을 못하고 일부 학자들은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현재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근, 현대사는 각종 운동사가 교과서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고, 기술의 중심도 그쪽으로 치우쳐 있다. 특히 금성출판사의 것은 한국 근. 현대 통일운동사라고 이름을 바꿔도 될 지경이다. 안병직 교수는 우리의 근. 현대사 교과서가 북한의 조선근대혁명운동사와 기본적으로 같은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 주장하며 현재의 근, 현대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3) 


현행교과서대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 출발한 시대정신의 대담은 그 내용에서 현행 근현대사의 교과서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반골문화권에서 발생한 동학혁명의 논리를 그 시대의 지성으로 포장되어 있던 공산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는 시도를 밝혀낸 일이다.


3) 동학과 반골문화


유영익 교수 (한국사,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체적인 오류는 상당하지만 두 가지만 언급해 본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서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6종 교과서 전부에 [동학십이개조폐정개혁안]을 인용함으로 동학혁명을 반봉건 운동으로 규정한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동학십이개조폐정개혁안]을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12개조 폐정개혁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어떠한 공사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그것은 1940년에 출판된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려 있는 사료이다.


오지영이란 인물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천도교계의 아마추어 역사가이자 역사 소설가였다. 그는 한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던 1938년에 "역사소설 동학사"를 탈고했는데, 그 속에 "횡포한 부호배는 엄징할 사(제 3조)와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사(제12조) 등이 포함된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을 무지한 농민이 이끈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내지 계급투쟁으로 묘사했다. 1894년에 공포된 모든 동학농민운동 자료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건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오지영이 만들어 낸 가공안이며 특히 12조는 그렇다. 그래서 오지영은 자기 책을 출판할 때 제목을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2002년에 출판된 근. 현대사 교과서에는 [12개조 폐정개혁안]을 마치 믿을 수 있는 사료인 것처럼 인용했다. 인용하면서 역사소설이라는 제목은 빼고 동학사로 인용했다. 따라서 이는 교과서의 독자들을 속인 행위이다.


더 심각한 것은 2002년판 근. 현대사 교과서 집필자 가운데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은 애당초 동학농민운동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12개조폐정개혁안]을 인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교과서를 검증하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마련한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에 [12개조 폐정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실어야 했다고 전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는 이야기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역사왜곡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벗으려면 그 준거안을 만든 학자의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 동학농민운동 서술과 관련하여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2002년판 근. 현대사 교과서 거의 모두가 동학농민운동을 '반봉건외세'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4)


유영익 교수의 주장을 채용하면, 당시 동학혁명은 고부현감의 착취에 항거하여 농민중심의 반란이었는데 이를 사회주의 내지는 계급투쟁으로 오지영이 묘사해 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이를 문제 삼는 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미화되어 있는 소설을 토대로 근현대사의 교과서 내용으로 채택했다는 것으로 교육인적자원부 관계자가 제 입맛대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섰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대단히 위험하고 중대한 일이다. 천도교도인 오지영이야 동학으로부터 천도교가 나왔으니 자신의 종교를 논리화 하고 미화해 내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했을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되어 진다. 문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교과서 검증담당자이다. 담당자 역시 천도교도인가? 아니라면 역사를 왜곡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가?


동학을 농민들의 지역반란으로 규정하는 것과 동학을 전국적인 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차이는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느냐 그대로 사실해주느냐의 차이이다. 정권을 잡은 정권에 의해 슬며시 왜곡된 역사교과서는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후대의 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상 이 점을 노리고 왜곡했다면 역사의 중대한 반역자이며 정권을 모반하는 정도의 반역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평가 역시 섣불리 미화시키거나 혹은 폄하시켜서도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에 대한 건강한 비평은 반드시 필요하다.


동학은 민주화 운동과 분명 괘를 달리하지만 실제로는 뿌리를 같이 한다. 이 말은 근대의 민주화 운동이 과거의 동학으로부터 혁명적 논리의 근거와 당위성을 차용해 오고 있다는 뜻이다.


동학 당시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연결시킬 고리가 없다. 동학이후 공산주의 이론을 채용한 작품은 1920년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는 기미년(1919년) 3.1 만세 사건의 무저항 운동이 일제의 총검에 제압 당하고 처절히 응징 당하는 과정에서 충격과 심적인 고통을 받은 작가들이 힘대 힘으로 맞서는 혁명이론과 처절한 저항운동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당시의 역사에는 동반작가 군들이 공산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친일파 작가들과 차별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진출되어 있던 한국문인들의 활동은 전제주의를 타파하고 인민중심의 사회를 구현한다는 공산주의 사상을 신학문이며 자유주의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동반작가 군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자유민주주의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5)


이로 볼 때, 동학과 사회주의이론을 연결시키려는 오지영의 소설은 역사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동반작가군은 유진오를 필두로  이무영,  채만식, 이효석, 조벽암, 유치진, 엄흥섭, 홍효민, 박화성, 안덕근 등과 함께 동반작가의 군을 형성하여 친일파계와 맞섰다. 이유는 춘원 이광수와 같은 친일문학파들의 식민지사관 홍보에 대한 염려와 증오심과 친일파의 작품 활동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효석은 잠시 동안 조선총독부에 근무했었는데 이로 인해 평생을 자책했다는 기록이 이효석의 문학관에 남아 있다.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동반작가의 의미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기의 수년 동안만 가능했을 뿐이다. 프로 문학이 객관적 정세악화에 부딪친 1931년 이후부터 동반작가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태평양 너머에 있던 미국의 합리적인 문명인 자유민주주의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신지식의 한 부류로 인식되었던 공산주의와 갈등이 생긴 연유 때문이며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에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학교설립과 병원설립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의 자유주의문명과 혁명으로 기존의 가치관을 박살내는 공산주의의 실체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한국의 동반작가 군에 속한 문인들은 1934년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新展開)와 경향”에서 그 절정을 이루며 속속 전향하였다.


전향 이후 이효석을 비롯한 동반작가군은 순수문학으로 귀의하여 주옥같은 향토문학을 잇달아 발표하며 애향심을 자극하며 그것을 애국심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돈(돼지)" 그리고 수필 "청포도"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이 순수문학으로 귀의한 후에 잇달아 발표된 작품은 애향심을 고취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들이었다.


이들의 작품을 접한 당시대의 지성들은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애향심과 애국심에 자극을 받아 조국 해방에 대한 염원을 불태웠고 애국심과 애향심은 이들의 심장을 뜨겁게 덥혔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또 하나의 신지식으로 인식하고 있던 저항론자들에 의해 공산주의는 한국 사회의 지하를 파고들며 이념화 되고 증식되며 세를 불리고 있었다. 이 현상은 6.25동란까지 연결되었고 동족상잔의 비참한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 남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반공주의로서 북한의 공산주의와 맞섰다.


오지영이 "역사소설 동학사"를 쓴 시기는 공산주의가 망국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대이다. 공산주의는 당시의 신지식 중의 하나로서 노동자, 평민에 의한 정권을 세움으로 이상적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연하게도 공산주의 이론은 천도교가 주창하는 동학교의 주장과 맞아 떨어졌다. 과학적인 논리가 부족했던 천도교의 오지영 등이 작품을 통해 공산주의 이론을 차용하여 동학론을 발전시키려 했던 맥락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4. 광주와 DJ


광주는 DJ을 스승으로 받들며 광주는 DJ가라는 등식을 제공했다. 광주는 역사적으로 동학의 발상지인 고부(정읍)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혁명 혹은 야당의 출발지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반골문화의 진원지라는 뜻이다. 제네바가 평화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듯 광주는 야당의 산실로 인식되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5.18 사건은 광주가 반골의 도시라는 확고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동안 DJ는 광주를 발판으로 정치활동을 해왔으며 광주의 의미를 동학혁명의 진원지로 특정하고 민주화 운동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고 선동해 왔다.


그러나 실상 민주화 운동은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산과 부산 대구 등 경상권에서 먼저 일어났다. 이 불꽃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는 전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광주로 옮겨 붙은 것에 불과하다. 이를 DJ는 철저히 포장하고 동학혁명의 발상지라는 이름으로 마치 모든 민주화 운동은 광주에서 일어난 것처럼 위장시키는데 주력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하여 민주화 운동은 광주가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고 선동해왔다.


(1) 광주와 DJ의 역학관계


DJ가 광주를 토대로 정치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광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광주는 동학의 발원지인 정읍과 동일권역이다.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은 세가 불어남에 따라 대도시로 진출하게 되었고 광주와 순천 여수 등지로 확대되었다. 광주시민은 동학난을 제압하기 위해 힘없는 조정이 일제의 힘을 빌어 전라도민들을 학대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6.25이후 마지막 빨치산의 거점으로 공비소탕을 위해 이승만 정부에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전라도에서 소탕작전을 벌임으로 원하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 당연히 피해의식이 타도에 비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졌다.


이 피해의식은 실상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라도에 왜구가 출몰하여 약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곡창지대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남해안쪽으로는 곡창지대가 없어 인기가 없었고 경상도 쪽으로는 해안의 경사가 급하고 곡창지대는 내륙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약탈이 쉽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전라도 지역은 해안의 경사가 완만하고 웬만하면 배로 강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뛰어났다. 해안에서 곡창지대까지의 거리도 짧아서 치고 빠지기에 그만이다. 접근성은 뛰어나고 위험성은 가장 작다. 물때만 잘 맞추면 성공성이 보장된 곳이기 때문에 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빈번했는데 관에서는 뒷북만 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관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으며 곡창지대라는 이유로 세금이 많았던 것도 국가에 대한 불만으로 작용되어 항거의 정신이 키워졌다.  


전라도민은 추수기에 어김없이 출몰하는 왜구의 약탈로부터 자신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가 단합해야 했고 관군이 도착하기까지 왜구와 싸워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전라도민이 단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단합정신으로 이어졌다. 왜구야 적군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관에서 빼앗아 가는 세금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소작료, 태풍으로 인한 소출 감소는 전라도민의 삶을 황폐화시켰고 일 년 내내 긴장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은 타도 민으로서는 그 고단함의 정도를 속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전라도민 만의 억울한 속사정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전라도민은 타도에 비하여 월등한 단결력과 애향심 그리고 항거의 정신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 고부현감이 만석 군이라는 비를 세우고 저수지의 물로 물세를 추징하려고 하니 참고 있던 관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왜구들의 후손인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상처 입은 자존심까지 누르며 살고 있던 전라도 민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더하여져 분노가 탱천하며 일시에 폭발했다. 이것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전국에 흩어져 산발적으로 항거하던  의병들이 연합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따라서 동학군이 가는대로 흩어져 있던 의병들이 모여 들어 그 규모가 군대를 능가할 정도까지 확산되어, 조정에서는 일본군대의 힘을 빌어 간신히 진압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DJ는 이러한 상처를 담고 살고 있는 전라도민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야욕의 제물로 삼았다. 이 증거는 5.18 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원 700명이 남파되어 광주시민을 무참히 살육하여 폭동을 유발시키고, 진압군과의 교전을 통해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공작했다는 귀순용사들의 증언에서 밝혀졌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기자회견을 통해 5.18 사태 발생 시 북한군 1개대대 병력 700명이 남파되었고 이들을 안내한 자들이 있었다고 고발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은 12월 20일자 데일리지에 실렸다. 기자회견 시 북한군 대위 출신 최중현 씨의 증언 내용을 요약해 본다. 최중현 씨는 북한군 특수부대 정치군관으로 15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위해 총 폭탄이 되어 죽을 각오로 충성했다 한다. 이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귀순했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의 핵실험이 있고 난 뒤에도 남한의 태도에 불안을 느껴 기자회견 자리에 나왔다고 증언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소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 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 간 긴급속보를 전해 들으며 20여 일간 출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2는 희생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귀대했다”고 증언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DJ와 김일성 관련설. 5.18 광주사태와 5.18 민주화 운동자들에 의한 대통령 후보 추대 문제, DJ 대통령 방북과 5억 달러 현금지원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시중에 떠돌던 소문의 진상이 시원하게 풀린다.


DJ는 광주시민의 선생님이 아니다. 그는 상처투성이의 광주시민을 사지로 몰아넣은 원흉일 뿐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야욕의 화신이 되어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어주고 끝까지 선생님으로 모셨던 광주시민을 제물로 바친 자이다. 원래가 빨갱이인 DJ는, 광주시민을 5.18항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북한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광주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과 대한민국 정부와의 총격전을 벌이게 만든 천인공노할 만행자이다.


이 전투로 인해 희생된 광주시민은 DJ으로 인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혈세였다. DJ는 대통령이 되자, 대한민국의 세금으로 위로금을 내어주고 재직 시에 8차례의 보상협의를 진행하도록 지시함으로 5.18 사태로 희생된 광주시민은 민주화 유공자로 처리했고 당시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었던 북한군의 시신은 행려자로 처리했다. 행려자로 처리한 것은 외지의 사람이 5.18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위장시키기 위함이다.


1) 사기꾼 DJ


DJ는 자신을 경제의 대가로 자처했다. 그는 ‘DJ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을 스스로 저술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실상은 박현채 교수가 대필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이 사실을 폭로한 교수는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이다.


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 刊)에 실린 논문 ‘조국근대화론 대(對) 대중경제론’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DJ의 ‘대중경제론 대필’ 문제가 학술 논문을 통해 공론화되기는 처음이다. DJ 씨의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DJ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 ▲경희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1969) ▲‘신동아’ 기고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1969)는 모두 박현채 씨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하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DJ의 경제론을 써 준 박현채는 어떤 사람인가?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에 의하면 박현채는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자신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문화부장 조원제라고 밝혔다. 박현채는 자신 스스로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의 경제론은 막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경제론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밝힌 사람이다. 시민발전 대표인 박승옥은 박현채의 공산주의 사상은 조정래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태백산맥’이 저술되었다고 밝혔다.


조정래는 친북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시 남한의 문학 대표자의 한명으로 초청을 받았다. MH에 의해 초대되었고 김정일에 의해 방북이 허락되어 평양을 방문했다.


조정래 뿐만 아니다. 사기꾼 DJ와 페러독사 MH가 심어 놓은 친북좌파들은 한국의 각계각층에서 둥지를 틀고 선생 대접을 받으며 유형, 무형으로 친북사상을 퍼뜨리고 있는 중에 있다.  


 2) 광주의 스승인가?


광주의 스승으로 받들어져 있는 DJ의 행적을 비판해 보자. 과연 그가 광주의 스승인가?


문익환 옹이 타계했을 때 DJ는 문익환 옹의 빈소에 찾아 눈물을 흘리며 평생의 동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이 말은 문익환 옹과 사상의 맥과 배짱 그리고 뜻이 맞았다는 방증이다. 문익환 옹은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네이버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DJ의 평생동지인 문익환옹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서 충성을 맹세할 당시 DJ는 평화민주당 총재로 야당을 이끌었고 당시의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네이버 사전에 등재 되어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DJ는 문익환 방북사건과 임수경 방북사건의 배후자이다. 또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익환 옹이 사망했을 때, 빈소를 찾아 평생의 동지를 잃었다고 눈물을 흘렸던 DJ는 대통령(1998년~2003년) 대통령 재임 당시 일어난 서해교전 사태로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빈소조차 찾지 않았다. 이 사건은 DJ가 햇볕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1999년과 2002년에 거듭 발생한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에 치욕으로 남아 있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 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3) 광주는 DJ와 결별해야 한다


DJ가 광주의 선생님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광주는 언제까지 대한민국의 반골도시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동학의 발상지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반골도시, 반역 도시로 출발한 광주의 이미지를 벗어나야 한다. DJ을 떨쳐내고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한다. 친북좌파의 대부인 DJ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DJ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DJ 왕국"인 광주는 DJ가 어떻게 광주를 손아귀에 넣었는지 그 공작의 순서를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광주의 지성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광주를 DJ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DJ는 광주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가당찮은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지역색깔론을 부추 켜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역색깔 강조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수많은 전투와 백제가 신라로 인해 복속되어야 했던 과거의 역사로부터 추출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하여 전라도를 자신이 발판으로 고착화시키려는 DJ의 논리의 핵심을 이룬다. 광주가 근대사에서 점하고 위치는 동학 난의 중심지라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DJ는 이를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로 특정하고 광주시민과 전라도민의 자긍심에 불을 지폈다.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경상도 대통령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전라도민을 다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도 퍼뜨리며 선동했다. 이 선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에서 극점을 이룬다. 유신정권 치하로 들어가자 권좌에서 멀어진 DJ는 유신정권을 독재로 규정하고 전라도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색깔론을 펼치며 유신정권과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선동했다. DJ의 말에 상처를 입은 전라도민이 유신정권인 박정희 정권과 맞서서 시위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계의 좌파적 지식인들과 북한의 지령을 받은 한총련이 가세하여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 중심에 DJ가 있다. DJ의 곁에는 언제나 친북좌파로 변질된 "천주교정의구현실천사제단"이 있었다.


4) DJ를 청문회에 세우고 심판해야 


DJ는 자신의 친북정체성을 민주화로 위장한 사특하고 간교한 자이다. 뿐만 아니라 DJ의 이적행위는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DJ는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바른 역사는 잘 못 된 역사를 바로 잡고 잘 된 역사는 계승해야 역사관을 통해 국가관이 바로 서게 되어 있다. DJ을 심판해야 할 이유는 3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이유는, DJ의 정체가 친북좌파로 이적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자신의 야욕인 노벨상을 받기 위해 5억불을 현금 지원함으로 북한이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근본 원인자인 역도이기 때문이다. 


셋째, DJ의 망명성 도피 비자금에 대한 혐의는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비자금으로 확인되면 국고로 환수 조치되어야 한다.


과연 DJ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가? DJ가 연루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사례를 일례로 들어 보았다.


(2) DJ 노선의 친북종교단체들

 

1)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1-1)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DJ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제단이며 친북좌파의 대부로 분류되며 한국의 근대사의 모든 민주화 운동에는 이들이 개입되어 있다. 


김성욱 정치평론가는 삼성폭로 앞장선 '정의구현사제단' 정체를 폭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3가지 중대 강령을 올곧이 주장해 온 좌파성향의 사제단이라고 밝히며 3가지 중대 강령은 국보법폐지, 미군철수, 연방제 실시를 말한다. 이 중 국보법폐지는 대한민국을 친북좌파의 활동무대로 만들기 위한 공작으로, 미군철수는 6.25 동란 직전의 남로당의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남로당의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으로 미군철수가 가결되었고 1949년 5월까지 미군철수가 이뤄지고 난  1년뒤 6.25 동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미군철수 문제는 6.25의 역사와 연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연방제 통일론은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 제도는 그대로 두고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동수의 대표들로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의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연방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이다. 국호는 이미 김정일에 의해 "고려연방민주공화국"으로 정해져 있다. 그동안 친북좌파들이 "고려"라는 단어를 자꾸 끄집어내고 고려에 집착하고 있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김정일의 뜻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


김성욱 정치평론가는 親北·反美선동에 앞장서 온 사제단의 이번 「삼성의혹」폭로 배경에는 좌파들의 국면전환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명박·이회창 두 보수 후보와 汎좌파 후보를 각각 『부패』와 『反부패』의 구도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1-2)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명칭은, 1974년 결성된 사제단의 공식 명칭이다. 특이한 점은 87년 민주화 이후 국가보안법폐지-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하는 정치적 단체로 변질되어 남한에서 김정일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1-3) 사제단의 궤적과 주요 주장


▶ 송두율 입국과 석방에 앞장 서


국보법폐지는 사제단이 주장해 온 첫 번째 사업이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 폐지국민연대」참여단체로서 在獨간첩 「송두율」 입국·석방 및 利敵단체 「한총련」 비호에 앞장섰다. 사제단은 2003년 8월 송두율 입국을 위해 결성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을 주도했고, 한국에 온 송두율이 구속되자 「宋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2002년 7월18일과 2003년 4월8일에는 각각 「한총련의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선언」과 「양심수와 정치수배 전면해제 촉구선언」에 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대거 참여, 한총련 합법화와 수배해체를 주장했다.


▶ 미군이 물러가길 예수의 정의로 결단!


사제단은 이미 1989년 6월6일 「민족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에서 『민족의 삶에 배치되는 군사동맹 해체』와『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주장했다.2000년 8월2일 「불평등한 SOFA전면개정과 매향리 폭격장 폐쇄촉구 서명」에서는 『미군이 물러가는 진정한 민족통일의 그 날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로 결단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사제단은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비롯해 매향리·직도·평택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反美집회에 참여해 「미군철수」를 주장해왔다. 이 단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대책위(평택범대위)」와 「이라크파병반대범국민행동」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고려연방제 연구하고 논의하라 촉구


6·15선언 실천을 주장해 온 사제단은 2002년 2월18일 「한(조선)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 6·15선언이 한(조선)반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방안임을 인정한다』며 『북의 고려연방제와 남의 국가연합제(남북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대중적 논의를 통해 한(조선)반도에 필요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1-4) 신부들의 사상과 주장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각종 反美· 親北단체에서 「맹활약」을 해왔다. 反美선동 앞장서 온 사제단 신부들의 활동과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는 2000년 주한美공군의 공대지사격 훈련장인 경기도 화성군 매향리 사격장 폐쇄를 주장하며 만들어진 (매향리 범대위)의 상임대표였다.


2005년 4월 매향리 사격장 폐쇄가 결정되고, 대체(代替)기지로 직도사격장이 거론되자, 이번에는 문정현 신부의 동생인 문규현 신부가 나섰다. 같은 해 5월 직도사격장 폐쇄를 위해 (직도대책위)를 결성, 문규현 신부가 상임대표를 맡았다. 


2005년 2월22일 만들어진 (평택 범대위)에는 문정현 신부가 친북인사인 오종렬, 홍근수, 정광훈, 한상렬, 문경식 등과 함께 상임대표를 맡았다.


▶ 문규현 신부

문규현 신부는 △89년 임수경 방북사건에 동행해 국보법위반으로 징역5년형을 선고받은 데 이어 △98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해 金日成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 방명록에 『金 주석의 영생을 빈다』는 글을 남겼던 인물이다.


▶ 함세웅 신부

사제단의 또 다른 유명인사는 함세웅 신부(現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함 신부는 최근까지 친북단체인「전국연합」 상임지도위원으로 홈페이지에 이름이 올라있던 인물이다. 함 신부는 2004년 10월9일 평화방송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과 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국보법폐지반대를 『성서에 대한 문자적 맹종』,『인간을 법체계에 예속시키는 현대판 우상』등으로 비유하며 『그런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구체적 사례』라고 주장했다.


함 신부는 같은 해 9월16일 「9·9국가원로시국선언」에 대응, 소위 「민주화원로71인선언」을 갖고 『보안법 고수론자들은 일제와 독재의 잔존세력』이라며 『지금이야말로 보안법 폐지를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4년 3월25일에는 함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당시 구속수감 중인 송두율에 대해 제3회 안중근평화상을 수상했다. 기념 사업회는 송두율을 수상자로 선정한 사유로 『송두율 선생의 고난이 민족고난의 현장을 상징하는 한 지표』라며 『송두율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과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정신을 체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또 『부디, 시대성숙에 힘입어서, 우리 민족문화와 사상의 한 횃불이자 민족의 갈림을 잇는 데 기여할 한 「진정한 접점」으로서 송두율 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자유롭게 견인할 그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6) 


2) 불교의 대표적 좌파인 실천승가회


2-1) 실천승가회의 정체


1992년 설립된 실천승가회는 98년 6월 "비전향장기수후원회", 99년 9월 "국보법반대국민연대", DJ 정권 당시인2001년 3월 친북(親北)단체인 "통일연대"에 참여해왔고, 2005년 5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 내 소위 "통일애국투사묘역"이라는 간첩과 빨치산의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추모공원에 세워진 비석을 보면, 남파간첩을 『의사(義士)』, 빨치산출신을 『애국통일열사』로 표현하며 『애국통일열사 정순덕 선생.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 된 조국 산천의 봄꽃으로 돌아오소서』라는 등의 비문(碑文)을 새겨 넣었다. 2004년 12월13일에는 「국보법폐지108배 정진」를 통해 "부처님의 위대하신 신력으로 국가보안법이 하루 속히 폐지되도록 해 달라"는 서원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종단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조계종 종단을 좌경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994년 3월23일 선우도량(대표 도법)과 함께 "범종단개혁추진위"를 결성하여 1994년에 조계종 사태를 유발하여 주도권을 쟁탈하는데 성공하고 지관을 총무원장 자리에 앉혔다. 


2-2)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의 정체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 승려는 2007년  6.15선언 평양 대회에 명예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북측에서 제시한 대회참석자에 대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대회참가자격은 자주(미군철수),평화(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 민족대단결(연방제통일)을 위해 헌신한 개인 및 단체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전선과 코드가 일치되는 자를 말한다. 이날 평양행사에서 북측은 의도적으로 한나라당 의원석을 단상에 배치하지 않았고 지관 승려 등의 자리를 단상에 위치시킴으로 노골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지관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명예 대표들이 모두 단상 밑으로 앉을 테니 대회라도 참석해달라"고 한나라당 의원들을 설득했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7)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남측의 종교단장으로 참석한 지관 승려는 MH 당시 대통령의  "終戰선언 추진, 백두산 직항로 개설" 등의 선언내용을 적극 찬동하면서 힘을 몰아주었다. 종교분야에 대한 간담회는 3일 오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지관 총무원장과 북측의 유영선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이 각각 남북한 단장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여기에서 지관은 “남북 종교인 힘 모아 평화통일에 기여"하자는 주장과 함께 종교단체 간 인적 교류와 종교시설 복원 등을 의제로 내놓았고 북측에서는 민족성과 민족문화 전통을 고수할 것을 강조했다. 이 중에 인적교류 문제는 북측에서 난색을 표함으로 사장되었고 종교시설 복원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풀이해 보면 북측은 자신들의 민족성과 전통을 고수하겠으니 남측은 돈을 내서 건물이나 열심히 지어 달라는 뜻이다.8) 


2-3) 실천승가회의 주요 인물들


▶ 성관


승려 「성관」은 실천승가회 의장을 지냈고, 현재 실천승가회가 설립한 (사)lotus world의 이사장, 조계종 내 사회복지법인 선재원 이사장,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를 맡고 있다.


▶ 청화


승려「청화」는 실천승가회 의장과 명예의장을 지냈고, 현재 (사)lotus world의 이사와 조계종 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 장적


승려「장적」은 실천승가회 부의장을 지냈고, 현재 (사)lotus world의 이사와 조계종 재무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실천승가회와 유사성향인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이사로 재직 중이다. 


▶ 퇴휴


승려「퇴휴」는 실천승가회 부의장을 지냈고, 현재 (사)lotus world의 감사와 조계종 교육원 교육부장을 맡고 있다.


▶ 토진


승려「토진」은 실천승가회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사)lotus world의 감사와 조계사 부주지를 맡고 있으며 MH 정권에서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도 맡았다.


▶ 지선


승려「지선」은 실천승가회 의장과 조계종 중앙종회회원을 지냈으며, 99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출마. 현재 (사)lotus world의 이사와 조계종 백약사 유나로 있다.


▶ 법안


승려「법안」은 조계종 기획실장을 지냈으며, 현재 실천승가회 대표로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자문위원도 맡았다.


▶ 효림


승려「효림」은 실천승가회 의장과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현재 (사)lotus world의 이사와 조계종 봉국사 주지로 있으며  국보법폐지국민연대, 한총련합법화대책위, 송두율 구속대책위, 친북단체 통일연대의 공동대표로서 친북좌파 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다. 현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로 활동. 2002년 대선 당시 「민주개혁국민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병풍사기(兵風詐欺)」 주범인  김대업의 기자 회견장에 동행하여 MH 대통령 만들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 일문


승려「일문」은 2005년 6월23일 기재된  「불교신문」인터뷰 中에서 "나를 버리고, 이기심을 버릴 때 불교가 말하는 불국정토 즉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빨치산은 그들이 생각한 조국을 위해 「나」와 「이기심」을 버린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고 주장한 인물이다. (출처: 실천승가회 홈페이지)

▶ 수경


불교환경연대 대표인 승려「수경」은 2006년 5월8일 참여한「군경을 총동원한 폭력 강제집행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에서 『2006년 5월, 제2의 광주가 진행되고 있다...경찰은 맨몸으로 진입을 막는 노동자와 청년, 학생 등 평택 지킴이들을 향해 곤봉과 방패로 잔인하게 가격하고, 이에 저항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며 군인까지 폭행했던 「평택반미(反美)폭동」을 비호한 자이다. 2006년 3월21일에는 』『북(北)의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90년대 중반 발생했던 탈북 양상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거의 사라지고 있다』며 날로 악화되는 북한인권 실태를 은폐하고 김정일 정권을 비호하고 나섰다. 9)


(3) DJ의 비자금 의혹


1) DJ의 비자금 의혹


DJ의 비자금에 대한 혐의는  뉴욕 ‘정의사회실천시민연합’이 작성한 ‘DJ정권 비자금 뉴욕 유입조사 보고서’를 공개함으로 공식화 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2월 뉴욕시 플러싱에 거주하는 건축업자 모씨(52)가 지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고 정실련에 제보함으로써 조사팀을 구성, DJ 비자금을 추적 조사해 밝혀낸 것으로 되어 있다.


‘DJ 비자금 미국유출 및 방북규탄 특별 기자회견’이 2006년 6월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500여 명의 청중들과 취재진이 모여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뉴욕 ‘정희사회실천시민연합’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은, DJ 씨의 측근들 재산…찜질방 주인인 홍성은 씨 재산 1억2763만 달러, 생선가게 했던 이의건 씨 재산 1억668만 달러, 8년 전 파산선고 받았던 다니엘 리 씨 재산 1억2266만 달러로 밝혀졌다는 보고 및 자료 공개로 이어졌다. 


“DJ 비자금을 國庫로 환수하라!” 는 구호로 시작된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자료공개에 이어 '안경본' 고문인 서석구 변호사는 “우리 단체가 DJ와 김홍업을 고발하는 고발장 접수할 예정”이라며 “우리는 DJ의 측근들이 빼돌린 비자금을 조사하는, 용기있는 미국 정부를 박수로 응원한다.”고 말했다.


서석구 변호사는 “DJ 씨는 뇌물 공여 및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정치자금법, 항적죄, 형법 상 일반이적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함과 동시에 노벨 평화상 또한 반환되고 비자금은 국고에 환수돼야 한다. DJ 씨는 구속수사를 해야 함은 물론 출국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 일을 계기로 DJ을 벌하는 투쟁에 모두 동참하기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DJ의 행보에 대한 궤적은 있으나 동선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정일과 어떤 체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김정일과 DJ을 연결시키고 있던 커넥터가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야당 총재시절 무수히 떠돌아 다녔던 소문들도 그가 대통령으로 등극하고 난 뒤에는 사라졌다. 과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IMF라는 국가적 위기가 오히려 DJ에게는 막강한 호재로 작용되어 IMF의 장막 뒤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일은 없다.


2) DJ, 노벨상 위해 돈 주고 정상회담


동아일보는 미국에 망명한 전 국가정보원 직원 김기삼 씨의 주장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6일 미국 법원으로부터 정치적 망명 허가를 받은 전 국가정보원 6급 직원 김기삼 씨는 "새로운 정부가 그동안 내가 제기해 온 의혹들에 대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면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날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귀국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DJ 전 대통령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북한에 불법 자금을 송금하면서까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며 "김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프로젝트는 자신의 노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 전체를 이용한 대(對)국민, 대국제사회 사기극"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김 씨는 또 "특검 결과 DJ 정권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4억5000만 달러 상당을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사실은 15억 달러 정도가 건네졌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당시 믿을 만한 소스를 통해 들었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대가로 3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여러 정황으로 볼 때 15억 달러에 합의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2000년 국정원을 그만둔 김 씨는 2003년 1월 김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로비 의혹을 제기하고 미국에 머물다 그해 12월 내부 고발자 자격으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당시 그는 '김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약 2조 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2005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이른바 '미림 팀'을 만들어 정·관·언론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 도청을 실시했다고 폭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 씨는 자신이 과거 몸담았던 국정원에 대해서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는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이 거꾸로 국가안보를 해치는 일에 앞장섰다"며 "국정원 내에 과거사건 진실위원회가 설치돼 1960, 70년대 사건을 재조사했다는데 먼 과거의 일보다는 최근 10년 동안 저지른 과오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10)


역사가 진실이라는 가치를 가지려면, 가려져 있던 일들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것은 DJ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스스로 양심선언을 하고 광주를 대한민국의 광주로 되돌려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국민은 DJ을 청문회에 세워서 단죄를 해야 하고 DJ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 공개함으로 광주와 DJ의 고리를 끊어 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남겨야 하는 중대한 숙제를 안고 있다.


1) 4.19혁명,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인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 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2) 한국일보,"민주화 발자취를 찾아서 1부", 2003-04-10.  

3) 계간시대정신에서는 [특집] 대담으로 “민중운동사에서 대한민국사로”라는 주제로 “고교교재 ‘한국 근. 현대사’의 개혁방향”에 대한 공론의 시간을 가졌다. 강규형 교수(명지대 교수, 현대학) 사회로  전용우  교감, 최문형 교수(한양대 명예교수, 역사학), 유영익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한국사), 신복룡 교수(건대 교수, 정치학)가 페널로 참석하여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깊은 우려와 해결점을 모색한 자리였다.

4) Ibid, 유영익.

5) 동반작가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학경향을 가진 작가를 말하는데 러시아 혁명 후 소련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1920∼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왕성하였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 러시아의 작가로는 I.에렌부르크, S.A.에세이닌, V.이바노프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바노프의 《빨치산 이야기》(1923), B.A.필냐크의 《나년(裸年)》(1922), 레오노프의 《굴 속에 사는 곰》(1925) 등이 대표작이다.

6) 김성욱, 정치평론가 김성욱의 홈페이지: http://www.chogabje.com/.

7)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2007-06-17 18:36.

8) 불교신문, 허정철 기자, 2366호, 10월 10일자.

9) 필명 콜라, 한나라당 논객, www.freezonenews.co.kr 에서 참조한 내용으로 출처 표기.

10) 동아일보,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2008.04.18.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