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현대 한국정신문화의 특징
1. 1980년대의 문화
1) 뿌리 찾기와 3S 시대의 정신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희석시키기 위해 문화적 개념의 3s 정책(sex, screen, sports)을 장려했다. 한편으로는 5공화국의 정통성 문제에 대한 열등감 해소의 방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마을 운동에 버금갈 정도의 정신문화를 창출해 낼 수 없었던 당시 정권의 입장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우려하여 다른 편으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돌파구로 사용되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3s는 독재정권에 순응하는 비정치적 대중을 양산하는 우민화 정책이라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스크린을 매개로 하여 크게 성장했다.
몸으로 승부하는 3s는 현재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트랜드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특히 광고물과 홍보물로 제작되는 섹스산업과 프로스포츠 그리고 스크린의 경우에는 단 시간에 성공할 수 있는 성공의 비결로 고착되어 있다. 3s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은 대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를 양산한다는 점이며 여기에 대중의 열광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면 확실한 성공이 보장되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공을 보장받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우상이 되어야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미모 혹은 능력 혹은 실력자로 대중에게 평가되어지면 자연스럽게 펜이 생겨나고 그 펜들의 열광도에 따라 스타로 부상하다가 얼마 후에는 우상이 된다. 우상이 되면 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됨으로 해서 우상 만들기는 가히 필사적인 필살기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우상이 될 수 있는 정도의 우수한 인자를 타고 났던지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 되었다.
곧 ‘대중에게 인정하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명제가 성립되는데 이 명제 하에서 그 시대의 가치관을 축출해 내는 작업은 아주 쉬운 일이다. 곧 성공이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잡으면 된다. 무엇으로든지 일단 성공만 하면 된다는 성공지상주의는 3s의 산물이다.
몸으로 승부하는 3s외에 머리로 승부하는 종이문화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닉네임이 붙는다면 스타가 되며 스타가 되면 우상이 된다. 이미 전 세계를 강타한 다빈치 코드의 작가인 덴 브라운의 경우가 그러하다. 덴 브라운은 전 세계의 독자를 대상으로 가상의 코드 주입과 해결의 방정식(이것은 실상 게임방식이며 게임의 법칙으로 불린다)인 ‘다빈치 코드’로 일약 대스타 작가로 급부상했으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덴 브라운은 3s가 아닌 게임의 법칙을 대입하여 대중몰이를 한 결과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는 곧 ‘사람을 미치게 하면 성공한다.’는 등식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순수문인의 좌소는 스크린에 밀리고 경제논리와 타협하면서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방송을 타거나 광고를 하게 되면 신예라도 기라성같은 문인들을 젖히고 베스트셀러작가로 등극했다. 행림출판사에서 출판된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젊은 주인공인 장총찬을 내세워 종횡무진하며 부정부패를 척결하였고 홍길동적인 무술과 기행으로 어지간히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긁어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의 작품을 보면 마치 문학과 문화가 힘겨루기를 하는 듯 문학이 문화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
2) 민주화 운동
유신정권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막을 내리자 이어서 “쿠데타에 성공한 정권은 정통정권이다”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전두환 장군의 5공화국이 들어섰다. 5공화국은 입각하자마자 양동작전을 펼쳤다. 첫째는 조상의 뿌리 찾기 정책을 전개하여 5공화국에 전통성을 부여하는 정책이었고 둘째는 군사정부에 대한 불만. 불평세력제거를 위한 삼청교육대를 설치한 일이었다.
국민에게 있어서 5공화국의 등장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정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당시 부통령이었던 최규하 씨가 대통령이 되었음으로 정통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있었다. 아무리 구테타에 성공했다고는 하나 국보위의 도끼날을 앞세운 군사정부가 달가울 리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뜻대로 소장에서 대장까지 1980년 한해에 중장과 대장계급장을 갈아 붙이는 전두환 장군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도 없었다. 국보위와 전두환 장군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 소화가 되지 못했고 그것은 시간이 가야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국보위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나서는 일사천리로 대통령이 되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박수부대를 동원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기가 막힌 현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군부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총검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제멋대로 급조한 정권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기에 국민적 정서는 아직 전두환 정권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당시로 돌아가 보면 산발적인 데모와 민주화 운동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곤 했었다. 또 하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아직 유신정권에 대한 애정이 있던 때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성격이 달랐다. 광주항쟁은 말 그대로 그러나 폭력성 항쟁이었고 정권과 맞서 극렬저항 운동으로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사태였다. 정부와 시위운동자 둘만 놓고 보면 원수도 그런 원수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운동의 핵에는 어떤 사상이 깔려 있었나? 이는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사상이 어떤 사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온다.
당시 야당인사 계열과 재야인사계열이 있었다. 김영삼, DJ, 박찬종이 이끄는 야당인사 계열과, 강원용, 함석헌, 문익환이 이끄는 기독교 계열과 김동길, 백기완으로 일컬어지는 재야인사계열이 있었다.
김영삼 등의 야당인사계열은 민주화 운동을 정권교체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정치화했다. DJ와 문익환은 친북주의자로서 공산주의 사상을 민주화 운동의 포장 안에 감추어 두었다. 함석헌, 강원용, 김동길 등의 재야인사군은 유신체제로 이어진 독재에 맞서 순수민주주의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문제는 김영삼 정권인 문민정부로 정권이 바뀌고 난 후에도, 민주당과 DJ, 문익환과 한총련 등의 학생단체와 노동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으로 가장한 민주화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어졌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결국 5.18 사건이 터졌는데 5.18 사건은 DJ 정권에 들어와서 무려 7번의 보상심사가 열렸던 점은 5.18 사건이 단순히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5.18 사태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는 결국 북한군이 개입되어 저질러진 일이며 DJ의 비호 하에 이루어졌던 일이라는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뉴스타운 편집부와 지만원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추적 연구한 결과 이 사건이 북한군과 DJ의 합작품으로 순수한 광주시민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근거를 찾아 왔다. 지만원 박사의 고발내용을 보자.
3) "5.18 광주폭동에 북한군 1개 대대 왔다!" (지만원)
장기표: 슨상님, 무정부상태를 만들테니 대통령 되십시오.
1980년 5월 12일 17:00시, 국민회의 지도부, DJ,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이 북악파크호텔에서 또 다시 회동하여 투쟁 방향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보고와 지시 내용은 이러했다.
장기표-심재권의 보고내용: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45명이 5.11.15:00시부터 5.12.09:00시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를 통하여 앞으로 잠정적으로 교내시위만 한다. 휴교령 발동 시에는 단호히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령 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촉구한다. 학원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와의 대화를 위하여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한다는 사항을 결의 하였으며, 이어 5.16. 전국대학학생회장단은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키로 하였는데 앞으로 학원시위가 확산될 것이 전망됩니다”
DJ: “과도정부의 실권을 잡고 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하여 정권을 계속 잡으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반독재 민주회복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반민주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본쇄한 다음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펴보라”
장기표: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DJ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 구상을 미리 해두시기 바랍니다.”
DJ: “알았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인가, 반역의 해방구 인가?
1980년 5.14일 및 15일 양일간의 소요는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이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DJ가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한 투쟁이었다.
5.22일로 계획돼 있는 소요는 국민연합 등 소위 재야정치 단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이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국방장관은 5.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5.17 계엄령은 이렇게 해서 선포됐고, 이 선포에 모든 지역이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광주만은 당시 개념으로 ‘반역지역’이 됐다. 광주 법관들은 5.18에 북한 특수군 개임이 없었다고 판결했지만, 탈북자 세계에서는 황장엽 씨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특수부대가 남파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지만원, “5.18 광주폭동에 북한군 1개 대대 왔다!” (뉴스타운, 2006.10.14자)
지만원 박사가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중에 북한군 중위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 씨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5·18당시 북한특수부대 700명 투입됐다"는 제하로 양심선언 격으로 발표된 내용은 이러하다.
1. 남한의 모든 크고 작은 소요에는 빠짐없이 북한의 공작이 개입돼 있다.
2. 5.18 때, 광주에 700명 정도의 특수군이 투입됐다. 제1진에는 300명, 제2진에는 400명, 모두 서해로 투입됐다. 서해안에 이르자 남조선 배가 마중 나와 길을 안내했다.
3. 남한에 있는 탈북자 중에는 5.18때 광주에 왔다가 돌아갔다가 탈북해온 사람이 현재 있다. 그가 오늘 기자회견장에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안 나왔다.
4. 광주사태에 투입됐던 특수부대원 중 상당 부분이 지금도 남한에 남아 있다.
5. 광주사태에 참여한 사람들 중 62명이 영웅으로 추대됐다.
6. 죽은 사람 사진들(현장전시) 중에는 전기톱에 의해 얼굴이 가로로 잘려진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이 둔부를 드러낸 채 목이 잘린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의 등에다 뒤로부터 총을 쏜 흔적이 있는 사진들이 있다. 한국의 공수부대 요원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제주 4.3 시간 등에서 보듯이 공산당들은 공포감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장 잔인하게 죽인다. 이 세 개의 사진을 보더라도 광주 학살이 북한 특수군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7. 남파된 북 특수부대 요원들은 각 군단 소속 특수부대들에서 차출됐고, 반은 국방군 복장이었고, 반은 민간인 복장으로 내려갔다, 국방군 복장을 입은 특수부대 요원들은 진압군 행세를 했다.
8. 남한의 HID 등 특수부대 요원들도 장갑차를 몰지 못한다. 한국군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도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 시민들만을 가지고는 장갑차를 몰거나, 무기고를 탈취하거나, 주요 시설에 대한 방화를 동시 다발적으로 지휘할 수 없다. 타 지역에서 발생한 시민 봉기에는 북한군이 개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갑차를 빼앗거나, 무기고를 털거나 정부군을 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싸우지 못했다. 광주에서만 이런 것이 가능했다. 바로 북한 특수군이 개입됐다는 증거다.
9.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갔다 온 사실들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남한 사람들만 이를 부정하는가?
기자회견 자료는 방대한데다 오늘은 자료를 얻을 수가 없어서 후에 입수되는 대로 올릴 것이며, 동영상은 아날로그로 찍었기 때문에 며칠 걸릴 것입니다. [글 지만원 박사]
위의 내용에 대하여 데일리안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2006.12.20. 15:15 발로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는 제목과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자유북한군인연합´ 기자회견. "5.18 광주사태는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 증명시켜주는 현장" 으로 부제가 달린 본 기사 내용을 보자.
광주5.18민주화항쟁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제기돼 충격이 예상된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혔다.
그는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전기톱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광주사건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며 입수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김 주석이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발언한 내용이며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서 출처를 얻었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반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이 1982년 3월 북한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한 것이며 출처는 교도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라고 밝혔다.
임 대표는 당시 현장에 투입됐다 북한으로 귀대한 참가자들의 증언을 확보했다며 그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A씨:<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패거리 싸움 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씨: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씨: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임 대표는 “허울을 쓴 민주화 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입을 맞추며 광주의 희생을 자시들의 정치적 자신으로 역이용하고 특정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다”며 “파괴되는 국가사태 앞에서 더 이상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 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 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2는 희생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귀대했다”고 말했다.[윤경원 기자]
같은 날 뉴시스 보도는 "5.18 때 북한 특수부대 침투했다" 는 제하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5.18광주민주항쟁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북한의 현역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로 침투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일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말한 김일성의 비밀지령 전문 등을 인용, 광주사태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투입됐었다고 밝혔다.
자유북한군연합 최중현 참모장이 밝힌 비밀지령에 따르면 김일성은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연합은 "김일성의 비밀지령과 1980년 5월을 전후한 북한군의 움직임 등 제반 상황은 광주사태에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최 참모장은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속보를 전해 들으며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북한의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며 "그 후로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고 덧붙였다.
최 참모장은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 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 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며 "이 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고 말했다.
2. 1990년대의 문화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컴퓨터 운영체계인 윈도우 방식을 개발하여 세계의 컴퓨터 시장을 석권하였고 1990년대 후반기에는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컴퓨터 시장에서 편리함과 안정성에서 뛰어난 윈도우 방식은 빌게이츠를 세계의 부호로 급부상시켰다. 인터넷의 효율성과 편리함에 열광한 인터넷 사용자들을 통해 네티즌이라는 신용어가 창조될 만큼이나 윈도우운영체계는 인터넷과 함께 네티즌들의 우상이 되었다. 인터넷 문화권은 인터넷 문명이라 불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인터넷과 관련된 거대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인터넷은 인터넷 중독 혹은 증후군이라는 후유증까지 유발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인터넷에 미치게 만들었다. 사람이 인터넷에 빠져들어 중독이 될 정도로 미치게 되었으니 인터넷 관련 사업은 곧 성공이라는 보증수표가 되었다.
빌게이츠의 성공신화와 더불어 전 세계는 마이크로소트프사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IBM, Apple, Dell, HP, Intel, Samsung 등의 메모리칩과 하드웨어의 급속한 발전과 동시에 업그레이드된 윈도우 방식을 민첩하게 내놓았다.
인터넷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추세에 발맞추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전 세계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MSN Chat 이라는 무료 체팅 서비스를 시행함으로 인터넷은 곧 체팅이라는 인터넷 체팅 문화권을 구축했다.
체팅은 인터넷 중독이라는 증후군을 만들어 내면서 일파만파로 확장되어 쳇을 위해 컴퓨터를 구입하게 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윈도우를 통해 인터넷 접속을 하는 경우 MSN의 Chat과 연결되도록 설정해 두었다. 그리고 메신저를 계발하여 인터넷을 하는 네티즌의 경우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품을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철저히 압박했다.
1992년 전화 접속 모뎀을 이용한 피시통신으로 첫 발을 내디딘 하이텔은 90년대 젊은이들의 필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한때 35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강자로 군림했던 적도 있었으나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KORNET service)를 개시하자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로 2004년을 기점으로 5만명 정도의 회원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인터넷 기반 커뮤니티로 전환되었다가 KTH와 병합되었다. 한국통신이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개시하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ISP)가 생겨났는데 이들 사업자는 개별적으로 미국이나 기타 국가의 인터넷 접속 사업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1995년부터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 문화는 당시 인터넷 부부를 탄생시키는 등의 사회적인 반향까지 일으키면서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야기 시키며 인터넷 중독 문화권을 뿌리내렸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한국의 쳇팅 서비스를 전격으로 중단시키기까지 인터넷은 중산층의 필수 아이템이며 컴퓨터 책상 앞에 붙잡아 놓는 놀이문화의 대표명사가 되었다.
3. 2000년대의 문화
1) 안티문화
2000년대에 들어와서 가장 특징적인 문화는 안티문화이다. 초고속 인터넷망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망으로 연결되면서 단 몇 초 만에 지구촌의 소식이 땅 끝까지 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네티즌으로 불렸다. 네티즌들에게 있어서 가장 관심을 끄는 대상은 단연 정치인과 연예인의 동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의 정책과 공약은 주요 이슈가 되었고 내용 하나 하나에 리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지지 혹은 반대의사를 밝힌 내용들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페러디물(뒤집어 보기)을 제작하여 유포하거나 상대방을 낙선시키기 위한 목적의 페러디물이 봇물을 이루면서 안티라는 용어가 파생되어 나왔다. 반대자라는 뜻을 가진 안티는 상대방이 굴복하기까지 집요한 공격을 가하면서 인터넷 상의 테러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안티가 생긴 정치인이나 연예인은 심각한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티가 생길만한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안티 팬이 생겼다. 심지어 종교적 안티로 반기독교 안티가 생기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인기경쟁상대라는 이유로 안티가 되곤 했다. 이로 인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국가는 인터넷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의 기능을 역기능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페널티를 줄 수도 없는 것이어서 고민은 깊다.
현재까지 안티는 인터넷 문화권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날마다 생겨나는 안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안티 문제와 인터넷의 역기능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들에 대해 심각하고 고민을 하고 있으나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안티문화는 정치인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출발되었다. 여기에 풍자와 희화가 개입되면서 인터넷은 또 하나의 가공할 공격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연예인들은 안티 펜들과 악품로 인한 피해자들이다.
과거 MH가 탄핵을 당했을 때, 참여연대와 한겨레 등이 연합하여 탄핵을 했던 국회의원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안티를 했고 MH 당인 열린우리당원들을 지지하면서 몰표를 준 적이 있었다. 이 사례는 정치권이 안티를 활용하여 정적을 제거한 사례로 역사에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안티 문화로 인해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은 더욱 자기관리를 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논문 표절 등에 연루되어 있는 학자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티와 악플로 인해 자살자가 증폭되는 현실이라면 네티즌들은 스스로를 통제하여 안티나 악플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 만약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면 단호하게 인터넷을 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며 책임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취할 행동이다.
2) 웰빙 문화
2003년 후반부터 낯선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웰빙이다. 웰빙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웰빙은 단숨에 유행어가 되었다. 웰빙족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면서 웰빙족은 차별화된 삶의 형태를 구가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잘 먹고 잘 살자는 구호와 함께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친환경적인 요소와 요가 등의 생활체조 그리고 여행. 등산. 독서. 다변화되어 있는 동호회를 결성하고 취미생활의 고급화와 습관화로 이어졌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지향하는 삶의 유형 또는 문화 현상이라는 정의와 사전적 의미로는 '복지·안녕·행복'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참살이'라고 번역되어 사용된다. 휴머니티와 친환경이 어우러진 의미로, 물질적인 풍요에 치우치는 첨단화된 산업 사회에서 육체와 정신의 건강하고 조화로운 결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문화 현상으로도 이해되었다.
그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히피주의에서 연관성을 찾기도 하고, 패스트푸드에 반대하여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 부르주아의 풍요와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보보스(bobos), 고액 연봉도 마다하고 한적한 시골로 낙향하여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즐기는 다운시프트족(downshifts)의 문화에 대한 모방이 웰빙문화라는 트랜드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론한다. 결국 물질적 가치나 명예보다는 건강한 심신을 유지하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가치관의 일종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곧 삶의 질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며 가장 강력한 휴머니티로의 발전 혹은 진화를 의미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삶의 질을 구가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신분과 그 신분을 따라하기로 유행처럼 번진 웰빙이 아닌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그 동안 한국을 지배해왔던 정신은 근면과 성실 그리고 책임감이었다. 이 정신은 새마을 운동 정신과 맞물려 있으며 새마을 운동을 경험한 세대에서는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식의 문화는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히피식의 문화로 인식되어 있다. 자신의 행위와 삶에 대하여 도덕성을 강조했던 세대는 아날로그 세대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주 5일제 근무의 확대는 즐기는 문화권을 도입한 디지털 세대와 근면 성실 정직으로 일관되어 있는 아날로그 세대의 격차를 한껏 벌려 놓았다.
특히 삶의 질적인 향상이라는 명제 앞에서 아날로그 세대는 손해를 보고 살아 왔다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고 남은 생애 동안 즐기며 살자는 논리로 슬며시 회귀하면서 웰빙문화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미 대세는 웰빙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3) 명품 문화
MBC 뉴스는 명품 문화에 물든 사회적 부작용에 대해 고발형태로 방송했다. '빈센트 앤 코'라는 브랜드의 손목시계 사기 사건이다. 이 시계는 강남일대에 번진 명품 손목시계로서 유럽 왕실에 납품되는 100년 전통의 스위스 산 최고급 명품시계라고 선전을 했던 시계이다. 가장 비싼 제품의 가격이 9천7백5십만 원, 제일 싼 게 5백8십만 원에 달한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 원가를 분석해 본 결과 5, 6백만 원짜리의 원가가 단돈 6만 원으로 밝혀졌다. 또 9천7백만 원짜리라는 것도 조그만 다이아몬드를 박은 원가 3백만 원짜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값싼 중국산 부품을 사용해 1백 배 가까운 폭리를 취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빈센트 앤 코'라는 브랜드 자체가 가짜로 밝혀졌다.
경찰은 "지오 모나코"라는 브랜드의 가짜 명품 시계를 적발했다. 한 영화 속에 등장한 이 시계는 무려 6백만 원을 호가하는 소위 값비싼 시계로 알려져 왔다. 특히 청담동에 고급 매장을 열고 유명 연예인들에게 시계 협찬을 해주면서 명품 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시계이다. 스위스 정통시계로 180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 브랜드는 보석 세공만 3대째 해 온 브랜드일 뿐 실제로 시계를 만든 지는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국적도 전통도 없는 명품시계 지오 모나코. 그동안 명품에 눈먼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고 고발했다.1)
4) 4000만 원 짜리 황금수의까지
SBS의 8시 뉴스는 4000만 원 짜리 황금수의까지 등장한 세태에 대해 고발했다. 하현종 기자가 보도한 내용은 황제수의라는 이름으로 촘촘한 삼베결 사이에 순금실을 사용하여 만든 수의였다. 최고급 삼베 원단에, 일일이 순금 도료를 입혔다는 황금수의의 한벌 가격은 무려 4천만 원이다. 업체대표는 "우리나라가 왕이지 황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옛 문헌에 보면 우리나라 임금님도 (황제) 황금수의를 입은 전례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 황제들은 입었거든요."
홈페이지에는 10명에게만 한정 판매한다고 돼 있지만, 지금까지 100여 벌, 40여억 원 어치가 팔려 나갔다. 일부 부유층 사이에 최고급 수의가 인기를 끌면서, 일반 백화점들까지 판매에 나섰다. 최고급 9새 원단을 쓴다는 주문 제작품은 무려 1천만원, 웬만한 수의도 5백만 원을 호가하고 있다. 매장 직원은 "좋은 수의를 쓰면 본인이 좋은 게 아니라 후손한테 좋대요. 잘 삭아주면, 깨끗하게 환골이 되면 후손들한테 좋은 거래요."라며 최고급 수의를 권했다. 한 시민은 "4천만 원씩이나 주고 수의를 구매할 능력도 안 되지만, 그 돈 있으면 차라리 진짜 좋은 일에 쓰는 게 낫겠네요."라고 했다.
하현종 기자는 마지막 말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마지막 옷이기에, 주머니도 없다는 수의. 우리 사회의 끝없는 허영 병은, 차분하고 겸허해야 할 장례의 모습까지 바꿔놓고 있습니다."라고 고발했다.2)
4. 월드컵과 페닉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를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가치관은 붕괴되었다. 두 정부를 거치는 동안에 애국 애족이라는 용어는 쓰레기장에 던져졌다. 두 정권이 친북사상을 감추고 인권을 앞세우고 민주화라는 거창한 개혁논리로 포장하여 친북행위를 하는 동안에 모든 권위도 다 상실되었다. 국민의 희망을 이끌만한 이렇다 할 정신운동도 없는 터에 박정희 죽이기를 위해 친일과거사 정돈이니 뭐니를 하는 동안에 한국은 싸움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가장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동안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면에서도 시원한 것이 없었다. 1년 마다 배로 뛰는 세금폭탄으로 인하여 가뜩이나 조여진 살림살이에서 전 국민이 휘청거렸다.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주류를 이루었을 때에 폭발직전에 달한 국민의 불만을 달래줄 묘수가 전혀 없는 절박한 때에 2002년 월드컵대회가 열렸다.
2002년 월드컵대회에서 사상최초로 4강에 진입하여 전 세계는 물론이고 한국은 월드컵 신드롬에 빠졌다. 배설되지 못한 불만은 월드컵 응원으로 배설해냈다. 통쾌한 슈팅이 골 망을 쫙 가르면 십 년 묵은 체증마저 가라앉아 버렸고, 살아 있다는 실감에 사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바로 이때에 월드컵 기간 중에 바닥을 치던 노대통령의 지지도는 꿈틀하고 움직여 상승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선수들에게는 국방의무를 면제해 주는 한편 선수 일인당 수억 원의 상금과 표창을 했다. 일설에 의하면 10억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선수도 있다 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더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국민은 월드컵을 통해 쓰레기 하치장에 쑤셔 박혀 있던 애국 애족을 찾아내 응원이라는 수단을 통해 함성으로 애국심을 표현했다.
한국과 중국의 대결에서는 공한증이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탄생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대결에서 자유주의 한국은 공산주의 최후의 수비수인 중국을 이겼다는 애족심의 만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패한 중국은 페닉 현상까지 보였다.
살펴 보건데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만들어 낸 동력은 전 국민이 사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거리 공원 운동장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옥상에 올라가서는 미친 듯이 응원한 응원에 있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경기 때와 현재와는 아주 다른 면이 있다. 이는 붉은 악마로 시작된 자발적인 응원이 국민적인 응원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던 2002년 월드컵 경기 때와 달리 정부 주도로 대대적이며 조직적인 응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2006년 월드컵 경기 참가국 중에서 선수에게 걸린 상금의 액수가 참가국 중에 3번째로 높다는 이유에서도 찾아진다. 세계의 언론은 한국이 월드컵우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한국전체가 월드컵에 미쳐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없는가? 만약 정부까지 나서서 응원전을 주도할 정도가 되어있는데 만약 16강에서 도태되어진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왜 한국인 전체가 월드컵에 미쳐 있는 것인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답을 내어 놓아야 하겠고 이어서 대책을 내어 놓아야 하지 않겠나. 이는 지금 한국이 월드컵에 대하여 비정상적인 양태로 가고 있지 않느냐는 염려이기도 하다. 한국은 미칠 것이 없으면 못 사는 사회로 변질 되지 않았는가? 혹시 황우석 박사의 문제로 전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현 정부에서 타개책으로 월드컵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정치적 호재인 월드컵을 포퓰리즘으로 단련된 참여정부의 행동대장들이 가만 두고 보겠는가.
지상파 방송3사는 연일연야 월드컵 중계에 열을 올리고 있고 전 국민이 월드컵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청와대 지하벙커에서는 은밀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국가의 장래에 가장 중요한 이슈거리인 FTA 협상에서 참여정부는 한국을 통째로 넘겨주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월드컵 함성에 묻혀 가장 중대한 이슈거리는 저녁 찬거리 밖에 되지 못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봇물이 터지듯 쏟아질 비난을 잠재울 묘수를 그들은 오늘도 모여서 찾고 있을게다. 16강에서 탈락된다면 한국인은 과거 중국인이 경험했던 페닉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페닉 현상에서 터져 나올 분노의 에너지는 무능한 참여정부를 향해 폭발하지 않겠나. 이래저래 밤잠을 이루기 힘든 밤이다.
1) MBC뉴스, 김경기 기자, 2006.08.08 21:00.
2) SBS 뉴스, 하현종 기자, 2006.08.2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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