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함의에 따른 요구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에디슨이다. 수학박사 1000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에디슨 10000명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가 경제가 살아나며 국가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자를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학자는 대학원에서 만들어 내고 대학까지는 사회가 필요한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인식에 대한 흡수성의 속도나 완성품을 내놓는 속도가 다르며 개성과 책임감의 차이가 있고 사명감이 다르다. 죽어도 수학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학이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보편적으로 수학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청소년의 수가 15만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분명히 말해 사회에서는 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면 족하다. 아인슈타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에디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공교육은 보편성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하고 사교육은 차별성에 포커스를 맞춘다. 적어도 보편적인 에디슨으로 내어 놓으면 될 일을 되지도 않는 아인슈타인으로 내어 놓으려니 15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가출 청소년으로 전락했다. 이 책임은 교육부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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