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김병준 부총리와 교수세계의 비망
학자와 작가는 다르다.
학자는 진실을 바탕으로 가설에서 출발하고 작가는 허구를 바탕으로 창작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학자는 입증이 안 된 사실에 대하여 주장하려면 가설을 세워야 하고 가설은 진실로 방증해 주어야 하게 되어 있다. 작가는 허구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진실을 토대로 허구가 개입되는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학자는 가설을 결론으로 세워 놓고 가설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다른 진실들을 추적하여 자신의 가설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작업의 과정을 거친다.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거나 발표되어 있는 학문에서 검증자료를 추출하여 논문을 완성하는 작업이 학자의 논문작업인 반면,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과 경험을 토대로 한 허구로 진실을 설명해 작품을 완성한다. 따라서 학자와 작가는 논지에 대한 접근시각부터 각각의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어 있다.
학자의 논문이나 작가의 작품이나 이미 발표된 내용으로는 다시 발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중복발표의 경우 출판 및 저작에 관한 법률에 위배되기도 하거니와 글을 쓰는 이의 양심으로도 이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허구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도 표절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물며 학자이랴.
김병준 교육부부총리의 문제로 불거진 중복발표와 제자 논문에 대한 표절문제는 그 동안 학계와 교육부에서 묵인되어 온 관행이었다는 김 부총리의 증언에서 심히 충격적이다. 이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황우석 교수의 문제와 견주어 볼 때, 한국의 교육부와 교수세계의 윤리와 도덕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실증적 예이다.
교수란 학문의 최고 권위자라는 신분과 전문성을 보장받는 직책이다. 정부는 BK 21사업을 통해 한국 대학의 수준을 세계주요 100위권 대학에 진입시킨다는 목적으로 교수들의 연구에 물질적 지원을 보장했다. 교육부는 BK 21 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 기준으로 연구 목표와 논문을 요구했다. 교육부에 의하면 엄정한 실사를 거쳐 BK 21 사업을 통해 지원 받을 수 있는 대학과 교수를 선발했다 한다.
그런데 이 모양이다. 중복발표에 표절까지 용인되고 있는 것이 교육계의 관행이란다. 그것도 참여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병준 교육부부총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쉽게 말하면 교육부의 BK 21 사업은 국민에게서 추징한 교육세를 교수와 교육부에서 나눠 먹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동안 학자란 자신의 학문에 대하여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목숨을 지키듯 자신의 학문을 지키는 존재로 여겨 왔다. 학자의 양심은 거짓이 없다는 것과 명망에 걸 맞는 양심적 행위의 대명사로 교수를 인정해 왔다. 김병준 교수의 사건은 이제 교수세계에 대한 국민적 슬픔이며 속히 잊어버리고 싶은 망이다. 그래서 교수세계에 대한 비망이다.
1. 김병준 부총리의 경우.
8월 1일 국회 교육위원회의 논점은 두 가지였다. 현 학계에서 중복논문을 인정한다는 것과 그것으로 교육부의 BK 21 사업 지원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인정이 되고 있다는 점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표절의 부분에서 교수에게는 표절의 상당부분이 묵계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두 가지 문제점은 교수라는 신분이 학문의 주체이며 학문을 세울 수 있는 권위자라는 권위와 학자의 양심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빈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문이 빈곤하고 논문이 빈곤한데 억지로 BK 21 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해 주려니 중복논문이라도 좋고 표절논문이라도 좋다는 이야기이며 어느덧 교육부의 관행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김병준 부총리의 경우에서 드러난 BK 21 사업의 문제점은 오히려 교육부와 교수들의 양심을 왜곡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는 BK 21사업의 중단, 혹은 전면조정을 해야 한다는 데 까지 나가야 하는 문제이다.
BK 사업은 과거 이해찬 전교육부장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해찬 전교육부장관은 교육개혁이라는 메스를 잡고 구조조정에 착수하였다. 먼저 폐교와 교육공무원의 정년단축에 메스를 들이댔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해지며 교수노조가 결성되는 등 실력대결의 양상으로 치달리게 되자 대학의 경쟁력과 학문적 발전을 위한 대학두뇌사업이라는 BK 21사업을 고안해냈고 BK 21 사업을 통해 교육부의 최고두뇌인 교수들을 연구지원비라는 명목 하에 장악했다. 당시 차량의 증가와 함께 늘어나는 교육세에 대하여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자 취한 정책이었다.
당근으로 출발한 BK 21 사업은 결국 세계 주요대학의 100위권 진입조차 실패하면서 교육부와 대학당국의 나눠 먹기식의 사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 대학 리포트와 논문의 차이
교수는 대학 과제물인 리포트에서 표절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0점 처리를 하고 있다. 적어도 최고의 학문을 하는 학자의 양심을 고수하라는 의미이다. 참고나 인용의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도록 명시되어 있다. 이는 기본이다. 만약 출처를 밝혔다고 해도 두 문단 이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표절이다. 왜 인용하였는지 그리고 연구자의 입장은 어떤 입장에서 인용하였는지에 대하여 평한 내용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석사 이상 학위자의 논문은 대체적으로 논문작성의 기본원칙이 준용되는 반면 박사 이상의 연구원 및 교수들의 논문은 기본원칙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역시 돈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연구실적은 BK 21 사업이 시행되고 난 후부터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특히 교육부와 관련되어 있는 연구 분야에서 그 정도는 두드러진다. 일 년 단위로 한 편 이상의 논문발표 주문은 실상 논문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주문에 불과하다. 통상 A4 용지로 15매 이상의 논문은 기실 해당 학문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A4 용지 15매 분량은 긴 수필에 해당되는 분량인데 학문적인 논문이 고작 A4 용지 15매로 얼마나 깊은 내용의 논문이 나오겠나.
논문은 경우에 따라 10여년 이상의 고민 끝에 탄생되어지는 논문도 있다. 대개 의학논문의 경우 임상실험 결과 분까지 도출해내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논문도 있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볼 때 논문의 양 보다는 질이 우선되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행정편의주의 발상으로 논문의 양을 추구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대학교수의 경우에도 자신의 책을 출간하지 못한 교수도 있으며 간신히 책 한권을 출판하고 교수평생을 책 한권에 의지한 채 교수하는 교수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논문은 책으로 발표할 수 있는 수준의 논문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며 교육부의 BK 21 사업은 교수의 얄팍한 논문이 아니라 책으로 발간할 수 있는 정도의 논문을 목적하고 지원해야만 세계 100위권 대학진입이라는 숙제를 풀 수 있다.
3. 논문의 질
논문에도 질이 있다. 초본논문이 있고 문제해결의 전문성의 논문이 있다. 통상 논문은 학문적 비판을 목적으로 작성하기 마련이다. 학위를 위한 논문은 학문적 비판을 통해 학문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이미 학위를 가진 연구자의 논문의 경우에는 숙제를 푼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 말은 학문을 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릇된 가설이나 쓸모없는 논리를 보게 될 때에 생겨지는 학자 특유의 본능을 말한다.
송두율의 경계인 사상과 또 다른 경계인 강정구의 친북사상에 대한 발표가 그것이다. 6.25를 왜곡하는 정도까지 나간 반역사관을 보게 되면 설명곤란한 분노와 울분이 솟구치게 되어 비판과 성토의 글을 쏟아 놓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학자적인 본능에서 나온 분노와 울분이다. 대체적으로 분노의 에너지로 쓴 논문은 비판과 성토로 마쳐지게 되어 있다.
초보논문의 경우는 비판으로 마쳐진다는 특징이 있으며 문제해결의 논문은 비평까지 간다. 이는 그만큼 고민의 각도와 심도에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비판은 문제제기에서 접근까지 도달하는 반면 비평은 문제해결까지 간다. 비판적인 논문의 경우 1년이 걸린다면 비평적인 논문은 2년이 걸린다. 다시 말해 비평적 논문의 수준은 비판적 논문에서 제기하려고 하는 문제의 제기와 접근의 방향을 알고 있다는 말이며 이미 그 문제를 숙제로 안고 해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논문의 양식은 비평으로 가게 되어 있다. 비평의 양식을 띤 논문의 질과 비판에서 멈춘 논문의 양식에는 현저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왜 그러한가? 비평은 문화와 문화사이, 문화와 문학 사이에 가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엉망이라고 판단한다면 교육과 사회, 교육과 정치, 교육과 경제와의 사이에 현실적인 커다란 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벽과 벽 사이에 놓여 있어야 할 가교인 비평이 너무 열악하다는 현실에도 눈길이 머물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릇된 정책, 잘못된 신앙, 왜곡된 진실 등에 대한 비판은 비난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문제제기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비판을 했다면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결방법을 제시해 주고 향후를 예측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평이다.
4. 비평
교육과 사회기관의 연결, 교육과 정치와의 연결, 교육과 안보와의 연결, 교육과 경제와의 연결은 연결점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각 개체 간에 활발한 비평이 오고갔다면 오늘날 한국의 교육현실이 이토록 참담한 실정까지는 가지 않았을 터이다.
비평가란 적어도 그 계통에 있어서는 권위자이며 전문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각 장르를 연결시켜 놓을 수 있는 정도의 해석력과 논리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비판은 비판으로 그쳐질 것이 아니다.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제의식과 문제해결을 위한 첩경까지는 놓아야 한다. 그래야 잘 못 되어 있는 것까지는 알고 있으나 해결방법을 몰라 방법론에서 고민하고 있는 해당사자들이 행동으로 옮길 동력을 얻는다.
국가정책의 비평가, 사회과학의 비평가, 문화, 예술의 비평가, 통일문제의 비평가, 신학과 문화의 비평가, 해당학문의 비평가의 예리한 시각과 설득력 있는 논지, 향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이 열려 있는 비평가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이다.
통일을 대비하여 폐쇄적인 북한의 주체사상과 이념에 대한 활발한 비평도 있어야 한다. 전교조에서 북한역사를 그대로 배껴 한국의 역사를 뒤집는 무책임하고 무모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한총련이 교사가 되어 전교조의 뿌리가 되어가고 있는 마당이다.
적어도 주체사상과 이념적 사상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북한의 교육과 비판력마저 상실한 채로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있는 남한의 교육체제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겠고 남한의 교육체제의 맹점과 직무유기에 대하여 개혁할 수 있는 논리가 세워져 있어야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다. 북한의 사상교육은 전 구성원들에게 의무화되어 있는 반면 사상교육과는 비교도 되지 못하는 남한의 안보교육은 밀리고 밀려 간신히 군에서 시행하는 정신교육의 한 교과에 편성되어 있을 정도이며 그것도 비디오물로 보여지고 있는 정도이다. 교육을 하면 하는 만큼 눈이 새파랗게 변해가는 북한의 주체사상 교육과 교육을 하면 하는 대로 눈이 감기는 남한의 비디오 안보교육과는 게임조차 되지 못하는 시대이다. 교육부와 양식이 살아 있는 학자 군에서 눈이 새파란 비평가들이 많이 나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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