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론에 대한 문화적 담론

제3장 독일의 통일모형, 한국형 통일모형이 될 수 있는가?

도제조 안형식 2009. 10. 20. 12:52

제3장 독일의 통일모형, 한국형 통일모형이 될 수 있는가?



1. 독일의 문화적 양태


학자에 따라 구분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16세기는 종교개혁시대로 특정 한다. 17세기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발달 시기로 18세기는 산업화 시대와 과학의 시대로 19세기는 열강의 할거와 식민지 시대로 20세기는 세계전쟁과 이데올로기적 격변의 시기로 각각 특정할 수 있다.


독일의 문화적 양태는 한 마디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로 특정지어진다. 독일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함으로 교황의 신적인 권력을 묶고 개신교의 발흥을 가능케 했던 국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국가이다. 국민은 국가적 자부심으로 세계 1등 국민임을 자처했고 여기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독일 국민은 아리안 민족으로 자처했는데 이는 중세의 이단인 아리우스의 자유주의 정신을 계승한 국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서방교회의 리더였던 아리우스가 동방 교회의 리더인 어거스틴에게 밀려나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가 되고 말았다. 독일은 서방교회의 리더였던 아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했다. 이후 아리우스의 자유주의적인 정신은 결국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발현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문화적 양태는 자유주의의 문화적 양태를 띠고 있으며 그것은 신학의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칸트와 헤겔을 통해 발원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임을 특정하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신학까지 자유주의 성향이 팽배하고 또 그것이 인정되었다면 그 외의 문화적 양태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자유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터지는 중대한 동인이 되었다. 첫째는 히틀러(Adolf Hitler, 1889.4.20~1945.4.30)의 나치즘의 탄생이며 두 번째는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를 통한 공산주의의 탄생으로 인한 세계대전이다. 이중 칼 마르크스를 통한 공산주의의 탄생으로 세계는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중대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독일 또한 피해가지 못하고 국가가 분단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20 세기에 세계 각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1억7400만 명의 희생자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자 정권(Marxist regimes) 하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는 1억4800만 명이었다. 이것은 전쟁으로 죽은 3410만 명의 4배에 해당한다.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 것이 역사상 가장 참혹한 기록으로 남아 있기는 하나, 공산주의로 인한 학살은 그보다 더 많다. 예를 들면, 소련의 스탈린이 2000만 명을 학살한 것과 캄보디아의 폴포트가 당시 인구의 1/3인 200만 명을 학살한 것 등이다.


캄보디아의 살인마 폴포트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했다. 크메르 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을 구덩이에 생매장 시키고 우물에 넣기도 했다.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 명도 학살당했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캄보디아의 중산층, 상류층 지식인층은 대부분 살해됐고, 수많은 양민들이 농업과 건설 현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특히 캄보디아 내 800명의 의사 중 760명, 그리고 545명의 판사 중 541명이 살해될 정도로 크메르 루즈의 지식인 혐오증은 극한을 치달았다. 이때의 대학살로 캄보디아는 국가 기반이 궤멸됐고, 이때의 상태에서 회복되기 위해 캄보디아는 여러 세대를 인내해야 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무려 7700만 명을 학살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과학자인 럼멜(R. J. Rummel)의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중국 모택동(Mao Tse-Tung) 공포 정권 하에서 살해된 사람의 수는 7700만 명 이상이었다고 World Net Daily는 보도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하여 벌인 6.25 사변을 통해 남북한 합쳐 522만 명이 희생되었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남한의 인구는 1949년 정부에 의해 실시된 전국인구조사에서 남한인구 2천16만6천758명으로 집계되었다.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에 달하였고,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야후 백과사전)



2. 건강하지 못한 산모의 젖으로는 두 자식 못 키워


1) 독일의 통일모형


참여정부의 통일정책은 그 근거를 통일독일에서 가져왔다. 통일독일을 모델로 차용하여 세워진 통일론은 점진적 통일론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 투자형 통일론, 평화적 통일론, 독일적 교육모델 등 참여정부가 채택한 대북포용정책의 기조에서 독일을 떼어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최문성 교수는 “통일한국의 교육체제에 관한 일 고찰”에서 점진적 통일론을 전제로, 문용린 교수의 흡수형, 연방제형, 표준형으로 구별하면서 표준형을 가장 바람직한 모형으로 제시했다. 점진적 통일론이니 투자형 통일론이니 연방제형 통일론이니 통일비용이니 등 청와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모두 독일형 교육모델에서 차용해온 용어이다. DJ의 국민의 정부 시절에 연구되었으나 용어사용에 없던 연구내용이 MH의 참여정부에 들어와서 거침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중 가장 큰 문제이며 중대한 문제 두 가지는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첫째는 누진성의 원리이며 둘째는 상반된 체제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현실에서 독일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현재의 독일의 보편적인 문제와 갈등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통일독일은 동독과 통일이 되고 난 이후 이전에 번영했던 서독의 모습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차대전 당시 U-Boat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독일의 과학과 제품은 세계 최고의 견고함과 내구성을 자랑해왔다. 하지만 통일 이후 독일제의 이미지와 제품에 대한 신뢰도는 급속히 추락했다. 세계시장은 벤츠 등 기존의 확실한 서독제품에만 신뢰를 보낼 뿐, 중소기업에서 출시되는 독일제품에 대해 냉정했다. 과거 쌍둥이 칼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주부들에게 사랑을 받던 쌍둥이 칼도 동독에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가격은 떨어졌는데 구매력은 급속히 추락했다. 쌍둥이 칼은 얼음탄공 기법을 적용하여 절삭력과 강도, 그리고 요리 시에 나는 독특한 소리로 인해 전 세계의 주부들로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 왔다. 따라서 쌍둥이 칼이 세계 시장에서 외면을 받는다면 독일제품 전체에 대한 신뢰도에 금이 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면서 동독에 들인 공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애절했다. 무려 10년 동안 매년 1조 달러씩 10조 달러나 되는 돈을 동독발전에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사정은 현재 20%대의 실업률에 머물러 있고, 통일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현재 1%대에 머물고 있다. 원인은 공산주의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동독인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기 못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로 50년이 지나는 어간에 자유나 시장경제원리 등의 용어는 부르주아 사상으로 단죄를 받아 용어의 사용 자체가 금기시 되었다. 용어조차도 사용할 수 없는 정도라면 그로 인한 가치관은 전혀 생성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서독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동독인들의 가치관 교육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최고의 공산주의자로 길러진 공산주의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은 거대한 벽에 부딪쳐 난항만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해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육을 받아야 하는 동독 공산주의자나 교육을 하는 서독당국이나 서로 반발과 불평만 터져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무슨 재주로 교육이 되겠는가. 50년 동안이나 단절된 두 개의 사상체계에서 같은 생각이 나올 수는 없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동독은 50여 년 동안 공산주의 사상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사상교육에 치중해 왔다. 사상적 출신성분과 충성도에 따라 순차별로 국가의 고위직에 중용되어 지도층이 되었다. 이 기간 중에 상대적으로 창조적인 사고방식과 경제관은 도태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수십 년이 지났다. 결국 현재에 와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경제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창조적인 사고방식은 붕괴되고 말았다.


구소련의 경우를 보라. 구소련이 무너진 직접적인 원인은 두 가지였다. 사상으로는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없다는 경제문제가 첫 번째요, 사상으로는 빵을 빌어먹을 수도 없다는 외교적 고립이 두 번째 원인이었다.


이 두 가지 중대한 원인은 그대로 동독의 가장 큰 문제였고 현재까지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딜렘마이다. 북한도 예외 없이 이 문제에 걸려 있다. 충성도와 사상을 가지고는 경제가 창출되지 못하는데 굶어 죽어가면서 사상과 충성도를 최고의 가치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독일의 경우와 같이 공산주의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동시에 공존하는 형태로 통일이 이루어질 때 나타난다. 서독의 경우 서독인 한 가정이 동독인 한 가정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역사적인 소명의식까지 부여하여 숭고한 책임으로 떠맡았으나 벌써 10여 년 동안 매년 1조 달러 이상의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동독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동독인과 서독인이 한 국가 안에서 공존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독이라는 빈곤계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끌어안음으로 해서 국가 전체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은 우선적으로 동독이라는 빈곤계층에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성장 동력은 급격히 소실되면서 양쪽 국민은 갈등의 요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침륜의 늪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이 아무리 통일비용이니 동포애적인 측면에서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임이니 해도 깨진 독에 물붓기이다. 때문에 서독인은 통일증후군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도대체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더 쏟아 부어야 할지 그리고 과연 원하는 대로의 변화를 이끌어낼지에 대하여 그 누구도 예측을 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역사학자는 하나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이 토착화 되어 생산을 일으킬 수 있으려면 3대는 가야 생산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2대까지는 토착화 되는 것이고 3대째부터 생산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 세대를 20년으로 볼 때, 60년 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끔찍하게도 앞으로 50년간 매년 1조 달러씩을 동독에 퍼부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해서 동독과 서독의 수평이 맞아진다면 그 수평의 질은 대체 어떻게 나타날까. 경제학의 대가인 사무엘슨(P.A. Samuelson) 이 경고한 ‘누진성의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1)


반대로 동독인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그날부터 서독인과 동일한 삶의 질과 풍요를 기대했으나 조금 나아졌다는 것 외에 얻은 것은 없다. 대신 정부를 잃었고 전혀 다른 교육 환경과 살벌한 시장경쟁체제로 내몰리고 있다는 절박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동독과 서독이 갈려 있을 때에는 유명한 관광지 혹은 자신이 꼭 가야 할 고향이라고 해도 출입국에 지장을 받았다. 통일이 되고 난 후에 동독인과 서독인은 자신들이 가고 싶었던 곳에 언제든지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자유를 구가하며 만족했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1년뿐이었다.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서 관광을 하고 만나고 싶었던 분단가족을 만나고 고향에 오가고 하는 것도 1년이 지나니 시들해졌다. 남은 것은 형편없이 추락해 가가는 삶의 질이었고 상대적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서독인들에게 불만이었다. 동독인은 점차 서독인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갈등은 어느 날 눈덩어리같이 불어나 있었다. 이것은 양쪽 다 도무지 참거나 견딜 수 있는 기약이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양쪽은 깊이 절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동독인은 돈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돈에 따라 사람의 가치도 평가를 받는다는 자유경쟁체제에 대해 적응할 수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맞닥뜨린 자유경쟁체제에 대한 동독인 2세대의 당혹감은, 당장에 강요받는 자유경쟁체제의 냉혹한 현실에 적응되지 못함으로 절망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출신성분과 사상만으로 출세를 보장 받았던 동독의 기득권자들은 통일 전, 좋았던 동독시절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


결국 양쪽 다 왜 통일을 했느냐는 원론적인 불만만 증폭되고 있다. 이로서 통일독일은 체제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젖이 충분하지 못한 산모는 두 자식을 키울 수 없다. 젖을 동냥해서 키우지 않는 한 두 자식을 키울 수 없다.


2) 독일 정치판의 갈등과 미래적 갈등


통일 이전의 서독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은 선진국이었다는 자존감에서 후퇴하고 있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전에는 국민소득 3만 불에 가까웠던 서독이 통일을 이룬 후에는 1만 불 수준의 동독과 통합되는 바람에 전체적으로는 1만 7천불 수준으로 떨어졌다. 동독인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고 서독인은 하향적 균형에서 오는 삶의 질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동독의 모든 교육은 서독형 교육으로 교체되면서 동독의 지식인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혁명논리와 저항논리에 익숙한 동독 지식층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갈 바를 몰라 표류하고 있다. 과연 동독의 역사적 중심인물들이었던 이들이 역사에 순응하여 현재의 체제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정치판에 뛰어들어 공산주의적 동독식 정치로 판을 바꾸어 버릴까?


실제로 통일독일의 정치계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내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동독출신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의 발상과 사고를 끌어안고 대거 입문하게 된다면 독일 정치계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 동독인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몫을 빼앗아 가져다 줄 동독인 출신의 정치가들의 입문을 독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 말은 서독인이 세계시장에서 벌어들인 경제력을 동독인이 가져다 쓰는 양태인데, 이런 양태로 가면 얼마가지 못해 성장의 동력이 소진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찌 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해답이 없다. 현재의 상태에서 끝까지 가서 함께 망하던가, 함께 흥하던가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통일독일은 심각한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이었던 통일조국의 미래니 동포애 등은 착시현상이었으며 감성이었을 뿐, 현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론이었음이 밝혀졌다.


3. 발 빼는 노 대통령


이제 이 문제를 한국의 현실로 가져와서 고민해 보자. 참여정부는 독일의 현실이 이렇듯 심각한 딜렘마에 빠져 있으며 헤어 나올 수 없는 정도의 통일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참여정부에 들어와 대북포용정책은 그 기조를 몽땅 통일독일에 두고 연구할 결과물로 대북포용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세종연구소 등 대북관련 연구소는 물론하고 김국신, 김동규, 김동춘, 전국대학통일문제연구소협의회, 이상우, 이영희, 양호민, 아태평화재단, 조민, 한국교육개발연구원, 한만길, 한국정치학회, 통일교육원, 김병로, 문용린, 박명규, 박영도, 백영철, 손기웅, 이두원, 이우영, 이종각, 정상돈, 최영표 등 수많은 학자들이 대북관계론에 대한 논문과 책을 저술하였고 그 내용은 전부 통일독일의 모형을 근거로 채택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출판한 책의 출판연도는 1990년대부터 활발히 연구하여 2002년에는 커브를 그리며 주저앉았다. 이 말은 10여 년 간 활발히 연구하였으나, 10여 년 세월이 지난 현실에서 드러난 통일독일의 결과는, 기대치와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연구의 모델이 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문제와 관련, 노 대통령은 "국가연합, 연방제, 다음 통일 이러는데 저는 경제통합,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이고, 그 다음에 문화통합, 그 다음이 정치통합의 순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이 시간은 아주 넉넉하고 여유 있게 잡아서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평화를 깨는 통일은 지금 적절하지 않다"며 "어떤 경우라도 평화가 깨지면 통일이 오지도 않고 더욱 더 분단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승부가 나지도 않으며 동북아 전체의 질서가 아주 심각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이후에 일관된 태도로 자신의 임기 중에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통일비용을 이야기해 왔다. 동독과 서독의 예를 들어 서독 국민 4인당 1인의 동독 국민을 책임졌다는 실질적인 예를 들면서 설명까지 했다. 그리고 임기 중, 통일은 원치 않으나 통일 대신 북한지원에 대하여 열린 입장을 가지고 지원 문제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겠다 했다. 심지어 한국의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동포애적인 입장에서 북한을 지원 하겠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 왔다.


그리고 새로운 통일관으로 경제 통일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임기 동안에는 남한의 경제 문제는 차선으로 하고 북한 살리기에 우선하겠다는 입장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사상을 좌파적 신자유주의라는 자의적인 해석까지 동원하면서 북한 지원에 전력투구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논리의 근거는 동포애이며 남북의 평화라는 근거로 제시했다.2)


그런데 MH 대통령이 통일독일의 모형을 대북포용정책의 근거로 채용해 놓고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독일의 모형을 따르지 않았단다. 그동안 참여정부는 MBC의 100분 토론과 KBS의 심야토론을 통해 독일식 점진적 통일론과 통일비용을 주창해 왔다.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에 김근식 등의 대북포용정책찬성론자를 내세워 강력하게 주장했던 내용은 점진적 통일론과 통일비용의 지원이었다. 그리고 그 기조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시켰고 무려 60조원의 재원이 들어가는 대북지원에 대한 프로그램을 포괄적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진척시켰다. 포괄적 지원 프로그램의 핵심은 남한의 재원, 즉 국민의 혈세로 북한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서 MH 대통령은 독일식 통일론으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이제 뜻하던 대로 다 되었으니 손을 털겠다는 뜻이다. 이어서 노 대통령은 낮은 수준의 연방제 통일론을 다시 내놓았다. 이미 폐기된 DJ의 6.15 선언과 같은 맥락이다. 더 늘어난 것은 남한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경제적 책임에 대한 문구들이 나열된 점이다. 다 만들어 주고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다 내어 줄테니 싸인만 해 달라 했다. 60조원을 퍼주고 얻는 것은 겨우 이산가족들의 상봉 밖에 없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렇게 말장난을 해도 되나. 감히 국민을 어찌 보고 이런 정도로 농락을 하는가.


핵 폐기 문제도, 국군포로 문제도, 납북자 처리 문제도 그 어느 것도 의제조차 되지 못했다. 무엇했다는 이야기인가? 60조원의 프로젝트를 싸들고 가서 김정일의 눈치를 보고 비위만 맞추다가 싸인 받고 기껏 밥만 먹고 놀고 왔다는 말이다. 이것이 노 대통령의 정체이다.


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낸 정체는 간단하다. 그의 사상은 주체사상이요 주체사상을 이루는 행동강령의 논리는 북한식 연방제 통일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1) P.A. Sammoelson, "Economics", (McGraw-Hill Kogakusha, Ltd, 1976.) p.165.

2) 계룡대, 군고위지휘관과의 대화, 2006.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