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박현채가 내린 격문과 김대중이 내린 격문
(김대중, 박현채, 임헌영, 조정래의 사상은 한 줄기)
1957년 2월, 서울대 상대 학생이던 박현채는 고등학교 졸업이 늦어진 김경추(71세, 가명)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채근담’이었다. 당시는 광주서중에서 같이 운동했던 친구가 월북기도 후 잡혀 사형당한 직후였다. 편향된 돌출 행동은 통일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박현채는 믿었다. 김경추에게 준 책은 ‘중용을 배우라’는 뜻이었고, 흔들리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김경추는 이 책을 64년부터 98년까지 테이프로 묶어 숨겨두었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감된 박현채와 연루될까 두려워서다. 물건 하나로 조직사건에 엮여 들어가는 시대였다. 이 책은 김대중 정권이 탄생하고서야 다시 빛을 봤다. 책 표지 뒷면에 쓰인 몇 마디 문장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칼날같이 서늘하다고 김경추는 적고 있다. 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 단계의 싸움에 주는 격문”
인생은 투쟁이며 젊음의 상징은 기대이다.
투쟁은 조직화 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이율배반적 사상의 예술적 통일.
그를 위해 나는 너에게 동양적 중용, 이를 제시한다.
편중하지 말라.
그러나 전투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투쟁에 있기에....
서기 1957. 2. 26 민봉(民奉) 서.
여기에서 그는 누구인가? 박현채가 뼈골 깊이 각인하고 충성을 맹세한 그는 김일성이다. 박현채는 그 이름을 혀 밑에 감춰두고 임헌영이 그에게 넣어준 지혜를 따라 글과 책을 수단으로 하여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 격문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슬며시 공개되었다. 저들의 말에 의하면 김대중 때에 와서 박현채의 격문이 빛을 발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양쪽에 연결 고리가 확실하다는 뜻이며 동지라는 뜻이다.
김대중의 박현채 따라하기
김대중이 현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국민이 들고 일어나 이명박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원인은 김일성의 충복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김일성 부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친북자로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안 될 역적이다.
김대중이 내린 격문은 과거 박현채가 내린 격문과 동일본질의 것으로서 김일성 부자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그의 충성심이 그대로 녹아 있다. 김대중은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친북정책에 대해 간섭을 해왔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도 그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김대중의 정체는 분명해졌다. 김대중은 간첩사건에 연루된 전력을 친북자인 노무현 정권 하에서 재심을 통해 딱지를 떼 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역사를 수정하려 했으나 제대로 안 되었다.”고 했던 말과 무관치 않다. 북한의 김정일이 감행한 2차 핵실험 이후에도 김대중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현 정권의 체제를 전복시키자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이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는 빨갱이 일 뿐이다.
사기꾼 김대중
김일성의 소년전사 박현채와 친북자 김대중은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현채 계열과 김대중 계열은 연결선상에 있다. 김대중은 거짓말에 능한 희대의 사기꾼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경제의 대가로 자처하며 전 국민을 기망했다. 그는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을 스스로 저술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실상은 박현채 교수가 대필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 刊)에 실린 논문 ‘조국근대화론 대(對) 대중경제론’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대필’ 문제가 학술 논문을 통해 공론화되기는 처음이다. 김대중씨의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 경희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1969), 신동아’ 기고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1969)는 모두 박현채씨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하다고 김 교수는 확언했다.
김대중, 박현채, 임헌영, 조정래의 사상은 한 줄기
박현채의 경제 사상은 전 통일부 장관인 이재정을 통해 2007년 새해 벽두에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북한을 지원할 책임이 남한에 있다”는 2007년 새해의 취임식 발언이 그것이다. 이재정은 통일부 장관 청문회에서 6.25를 남침으로 보느냐 북침으로 보느냐 라는 한나라당의 질문에 대해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물쩍 유야무야 넘기려다가 집중적인 답변 추궁에 마지못해 남침으로 말했다. 여기에서 이재정의 사상적 좌소가 역사까지도 왜곡하는 친북자임을 확실히 증명해 주면서 그 라인이 김대중-노무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현채-김대중 계열인 조정래는 자신의 작품인 태백산맥이 박현채를 모델로 작품화되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박현채에 대한 존경심은 모방심으로 까지 발전되어 있다. 조정래는 박현채 다운 조정래가 되기 위해 태백산맥을 썼다. 박현채는 목숨을 걸고 빨치산 소년전사로 김정일에게 충성했는데 자신은 그렇게까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필을 통해 박현채의 행동을 추앙함으로 충성하고자 했다.
박현채는 마르크스의 경제론을 바탕으로 만든 민족주의 자급 경제론으로 김일성을 측면 지원하는 경제의 줄기로, 조정래는 문단에서 태백산맥을 통해 김일성을 측면 지원하는 문학의 줄기로 각각 줄기를 형성하고 뻗어나갔다. 이 줄기는 한국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통일에 대한 환상과 동포라는 민족주의와 김일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북한의 실정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하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평생을 바친 탈북인사 황장엽 씨는 “김일성의 대남공작이 이토록 빨리 먹힐 줄은 상상을 못했다”며 “남한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체사상자들과 친북세력들을 색출하여 근절하지 않고 이 상태로 가면 적화될 것은 시간문제”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황장엽씨가 김일성교의 경전에 불과한 주체사상에 쉽게 잡아먹힌 남한의 지식인들에 대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허무맹랑한 주체사상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된 배경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있다는 사실을 황장엽씨가 몰랐을 뿐이다.
격문에 따라 사회각층에 침투한 북한의 혁명전사들
소년 빨치산 박현채가 서울대학교 상대와 대학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하는 동안에 서울대 안에는 박현채를 따르는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이 동아리들은 인혁당 사건의 진원지가 되었고 주범인 박현채는 간첩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1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박현채는 직접적인 동선에서 간접적 동선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노선을 수정하게 된 동기는 임헌영의 권고에 따라 경제평론가로 변신을 하면서부터이다. 이미 임헌영은 문학평론가로 완벽하게 변신해 있었다. 남민전의 사건의 사실적인 지도자였던 임헌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후 나는 어떤 자리에 있든 박 선생을 형님처럼 대했고, 내가 있는 주변 어딘가에는 꼭 박 선생의 영향력이 미치게 했다. 1970년 나는 주간 <경향>에서 월간 <다리>지로 직장을 바꿨는데, 내가 착수한 첫 작업이 편집위원을 개편한 일이었다.
경제분야는 당연히 박 선생을 모셔서 이 계통의 필진을 강화했다. 그는 필진 동원에서 무한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천거해서 편집 실무진을 놀라게 했다. 서울 소재는 물론이고 지방대학과 각 언론기관, 심지어는 경제관련 기관의 인사까지 총망라하여 해당 주제에 걸맞는 필자를 거명했는데, 내용이나 주제의 취급 방향에서 전혀 실패가 없었다.” (박현채 추모집, 아 박현채)
좌익사상범에서 전향한 소설가 김정익씨는 교도소內 남민전 연루자들과 겪었던 경험을 기반으로 1989년 ‘囚人번호 3179’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 책에서 김씨는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 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며 남민전이 교도소內에서 조직을 강화시켜 80년대 국내 좌익세력의 토대가 됐다고 증언했다.
노선을 수정한 박현채는 김대중의 재야운동에 합류하여 소위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하여 주체사상과 김일성 찬양 사상을 전파했다. 겉으로는 경제학자요 속으로는 여전히 빨치산인 박현채는 조정래의 스승이 되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성의 찬양자인 빨치산으로 거듭났다. 조정래가 박현채를 위대한 사상가로 포장해서 한국 문단에 내놨을 때 김대중과 박현채 라인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한국 최고의 걸작품이자 대단한 작품으로 평하고 광고를 해주었다. 시류 또한 유신정권이라는 타킷이 있었기 때문에 시류의 흐름을 이용했다.
유신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한 김대중은 정치일선에서, 박현채는 재야운동가로 민족경제론을 앞세워 선두에 섰다. 당시 학생이었던 386세대들과 서울대에서 발생한 박현채 동아리파들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층들을 마음껏 유린하며 주체사상의 독을 전파했다.
경향신문의 분석에 의하면,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 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뱀의 머리는 김대중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친북 좌파들의 온상이었던 민주화 운동은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이어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정체가 친북좌파 운동을 포장한 것임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결국 성역화 되었던 민주화 운동은 국민을 기만한 친북좌파들의 공작이었다는 사실이 역사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소위 민주화 운동은 간판을 내렸다. 그것은 북한에서 강행한 핵실험의 결과 때문이었다. 참여연대의 최열 등은 즉시 북한의 핵실험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몸보신에 나섰고 친북좌파 문인들의 온상이었던 조정래가 고문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는 슬며시 간판을 내리고 ‘한국작가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개꼬리 3년 묵힌다고 해서 황모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박현채 추모집 출간에 온 힘을 다하는 혁명전사들
소년 빨치산 박현채의 격문을 따라 각계각층에 포진하여 북한을 지원하는 논리를 배출하고 있는 남한 내의 김일성 추종세력들은 서울대를 장악했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백낙청을 필두로 강만길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위장했다. 백기완은 재야인사로 위장하여 김일성에 대한 애오라지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강정구, 송두율,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 등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찬양자로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박원순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위장하고 있으나 박현채, 임헌영과 함께 한길출판사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이력자이다. 간첩 전력이 있는 자들과 함께 작업을 해왔다는 말은 박원순의 사상 역시 좌파라는 뜻이다. 초록은 동색이며 가제는 게편이다. 사상을 중시하는 이들은 사상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제사를 빙자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는 좌파들은 헌법을 최대한 악용하고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현재의 헌법은 미국의 헌법을 그대로 차용한 헌법이다. 미국의 경우 한국과 같이 휴전선을 맞댄 채로 아군과 적군으로 대치하고 있는 국가가 아니다. 미국과 같은 국가의 경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적용하여 창의성과 창작력을 최대한 보장해 주어도 되지만 한국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창의성과 창작력 보다는 국가보안 문제가 더 크다. 때문에 창의성과 창작력도 일정부분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10년 친북정권의 시절에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쳐댔던 끝에 현재는 국가보안법이 거의 죽어 있는 상태이다. 왜 이들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쳐 왔는지 현재에 와서 충분히 이해되는 것인데 결국은 자신들의 이적행위에 대해 보호를 받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해이다.
반공정권 하에서도 김대중은 처형 되지 않았다. 남로당의 괴수였던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으나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살아남았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국가보안법 철폐하고 역적법 만들어야
김대중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지극히 왜곡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숨도 크게 못쉬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철폐해야 마땅하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역적법을 만들어 적을 이롭게 하는 자들은 역적법으로 다스려 시청 앞 광장에서 처형시키는 법을 만들어 엄히 다스려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괴 김대중을 심판하는 일이다. (2009.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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