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시 모음

해금이 울어 예는 밤

도제조 안형식 2009. 8. 17. 16:58

해금이 울어 예는 밤


해금이 할퀴는 밤, 잠을 놓쳤습니다.

대금이 못 다한 말을 쏟아 놓습니다.

시린 겨울을 이겨낸 기나긴 겨울 밤 이야기입니다.

피아노는 세월을 노래합니다.

흰 건반이 달리며 세월을 붙잡아 놓습니다.

밤은 깊어갑니다.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동백이 피어나는 언덕

조그만 흙집 이야기입니다.

그 집 울에 심겨져 있던 동백이야기입니다.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우느냐

따졌던 시인의 옛 이야기입니다.


꽃봉오리가 열립니다.

마침내 붉은 동백꽃잎이 열립니다.

하나 둘 터지듯

봉오리를 깨치며 입을 벌립니다.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입니다.

엉엉 웁니다.


두 줄 해금에 20년 세월을 담았습니다.

대금에 60년 세월을 담았습니다.

피아노에 30년 세월을 담았습니다.

이들이 어우러져 함께 울어 옙니다.

흙집의 호롱불이 울고

담장의 동백이 웁니다. 


백남준 선생은

예술은 사기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핏대를 세웁니다.

티브이 앞으로 다가가

왜냐고 묻습니다.


가슴으로 들어라

사상으로 보아라

사기의 실체가 보일 때까지

눈을 감아라

가슴을 찢어라

영혼을 톱질하라


너 있는 그곳

나 있는 이곳

너와 내가 있는 여기

세월이 뭐라 하더냐

빛같이 바람같이

날아가는 것이라 하더냐


피아노 건반이 달립니다.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귀를 막았습니다.

가슴 속에서 홧홧한 것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동백꽃잎은 말하려는데

꽃술이 열리지 않습니다.

두 줄 해금이 할큅니다.

대금이 목을 조릅니다.

동백은 다만

비명을 지를 뿐입니다.


세월이 뭐라 하더냐

이제 그만 울라 하더냐

멈추라 하더냐

대금이 흐느끼고 있습니다.

흙집 안의 호롱불은 심지가 다한 듯

그을음을 길게 물고 있습니다.


대금 산조가락이 심상치 않습니다.

부러지듯 퉁겨지듯

호흡마저 빨라집니다.

그리고 끊어집니다.

이어 통곡합니다.

예술을 했더니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울부짖습니다.


아아 내 애간장이 토막 납니다.

대금 산조의 가락이 살점을 도려냅니다.

널브러져 있는 내 배위로 피아노의 건반이 달리고 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 귀도 열지 못한 채로

다만 숨만 몰아쉬고 있습니다.

어허 고여헌, 고얀 밤의 귀성곡(鬼聲哭)인가 보우다.

'아침이슬·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09.09.23
소쩍이 우는 밤  (0) 2009.09.23
능금씨앗  (0) 2009.09.23
가끔 우리는 자주  (0) 2009.06.19
은반위의 세레나데  (0) 2006.12.18